몸과 욕망
[416호 예술, 구원을 묻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에서 그분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몸을 가진 피조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체성을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신체성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1)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전 6:20, 새번역)
요즘 무척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나탈리 칸스라는 신학자가 쓴 《모성(Motherhood)》인데요. 표지가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인데, ‘고백록’(A Confession)이라는 부제 역시 시선을 끕니다. 아마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칸스는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대한 비판적 오마주로 의도했습니다. 대학에서 학기마다 《고백록》을 강의하는 칸스는, 육신의 욕망과 하나님을 향한 열망 사이에서 고뇌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여정에 깊은 연민과 공감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론 여성인 자신이 대면하는 인간과 욕망에 대한 성찰이 독신 남성과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특히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서구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묵상이 남성의 몸이 아닌 여성이나 아이의 몸이 겪는 분투에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지요(‘Preface’, 4쪽).
그렇게 칸스는 출산과 육아라는 여성 고유의 경험과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신학적 묵상을 통해, 인간의 몸과 욕망,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자신만의 체화된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갑니다. 저 역시 같은 여성이자 엄마로서 깊은 공감과 탄식(탄성)을 자아내는 칸스의 깊고도 섬세한 고백록을 울고 웃으며 음미하고 있습니다.
인간, 몸을 가진 피조물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칸스의 두 고백록 모두, 남자의 것이든 여자의 것이든 혹은 어린아이의 것이든 바로 우리의 몸이 우리의 인간됨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열망하고 발견하고 대면하는 신앙과 신학의 현장(loci)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이성이 지배해온 계몽주의 근대 세계는 우리 인간의 몸과 신체성을 부차적이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지요. 법이나 철학처럼 인간의 이성과 지적 사고를 강조하는 관념과 지성의 영역이, 예술이나 스포츠, 육체노동처럼 신체와 더 밀접하게 관련된 활동에 비해 우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성 위주의 사회구조는 근대의 산물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며, 그 안에는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끈질기게 이어져온 정신과 물질의 위계적 이원론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몸을 가진 —혹은 몸 자체인—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인간이 몸을 가진 피조물이라는 자각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을 알아가고 관계를 맺는 방식 역시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성에 기초한다는 중요한 함의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몸이 지닌 거룩하고 신성한 본질과 가치를 회복하고 확증하셨을 뿐 아니라, 이러한 체화된 삶과 신앙을 가르치고 강조하셨지요.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내 옆의 사람들을, 말로만이 아닌 행함으로 사랑할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포함해)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과 같은, 몸을 돌보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일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한 방식이라고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몸에 대한 강조가 왠지 불편하게 들린다면, 그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 몸과는 별 상관이 없는 영적인 차원의 일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 이해는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기독교 초기의 강력한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에 가깝습니다. 고차원의 영적 실재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몸과 물질세계를 저급한 것으로 폄훼했던 영지주의를, 사도들과 초기 교회는 단호히 거부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체화된 신앙에 대한 강조는, 바른 교리와 신앙 지식을 머릿속에 잘 정리해 담고 다니거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종교적 실천에 열심을 내는 것 자체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자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착각)하는 익숙한 신앙의 틀에 균열을 내는 도전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리와 지식, 말씀과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요소이지요. 정신과 육체, 성과 속,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거짓된 이분법을 벗어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술, 체화된 신앙의 파트너
근본적으로 인간의 신체와 감각을 본질적 요소로 삼는 예술은 몸을 가진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심화하고 구현하는 좋은 파트너입니다. 신체적 지각과 감각 작용, 물질적 구현을 통해 세상과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경험하며 발견해가게끔 하는 예술은, 관념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데 익숙한 우리가 체화된 신앙을 배우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신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예술신학자 제니퍼 크래프트의 연구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몸을 가진 인간의 본질적 조건으로서 장소성에 주목하면서, 예술을 더 광범위한 ‘장소 세우기’(placemaking) 차원에서 접근하는 예술신학을 발전시킵니다.
예술은 우리를 시간과 공간, 공동체라는 장소 안에 뿌리내리게 하는 ‘장소 세우기’의 한 형식으로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 안에서 온전하고 보다 창의적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또한 우리 주변의 세상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가 속한 다양한 삶의 자리와 장소에 책임감 있게 참여하도록 초대한다.2)
크래프트가 일깨워주듯이, 몸을 가진 우리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생각 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그렇기에 우리 자신과 공동체가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환경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참되고 충만한 인간으로 살아가며 사회 안에서 책임감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예술이 우리의 고유한 장소성에 대한 세심한 주의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크래프트의 통찰에 주목해야 할 이유입니다.
몸의 (재)발견
최근 점점 더 많은 신학자가, 성경에 근거한 유대-기독교적 사고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악한 몸 안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순수한 영혼이 아닌, 몸, 영혼, 정신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연합체인 통전적 존재로 인식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요. 문화 전반적으로도 근대의 이성 중심적 인식론과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통전적 인간 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그동안 간과되었던 신체성과 물질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더군요. “생각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느낌으로, 죽음의 유한성을 통해서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3)
예술에서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우선 모더니즘 미술의 발전은 전통 회화가 추구하던 환영적 재현이나 이상화된 미의 표현을 넘어,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물질성과 구조적 특성에 주목하는 획기적인 전환을 불러왔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몸과 신체성 자체를 작품의 주제나 매개로 삼기도 합니다. 인간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로서는 영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안토니 곰리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곰리는 자기 몸을 주된 조형 재료이자 출발점으로 삼아, 세상 안의 육체적 현존이라는 인간의 존재 방식과 존재의 본질을 묻고 탐구해 왔습니다. 그는 신체를 단순히 형태나 물질이 아닌,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그렇게 신체와 공간을 매개로 인간과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내는 작품 세계는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영국에 안토니 곰리가 있다면 미국에는 리처드 세라가 있습니다. 세라는 영속성을 중시하던 전통적 조각의 관습에 저항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녹슬고 부식하는 재료 고유의 물질성과 시간성을 작품 안으로 깊숙이 가지고 들어옵니다. 〈기울어진 호(Tilted Arc)〉나 〈비틀린 타원(Torqued Ellipses)〉 같은 대표적인 작품에서는 단순한 형태의 대형 강철 구조물을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설치하여, 그것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공간 사이를 관객이 걸어 다니며 체험하게 합니다. 이런 그의 작품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은 몸을 통한 지각이라고 주장한 메를로 퐁티의 체화된 현상학을 반영하는데요. 실제로 메를로 퐁티를 읽고 영향을 받은 세라는 “작품은 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다니며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하지요.
2년 전 여름, 흔히 라크마(LACMA)로 불리는 LA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을 방문했을 때 세라의 작품을 직접 만났습니다. 녹슨 강철판의 정직하고 거침없는 물질성과,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그 거대한 강철판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공간의 긴장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작품 앞에 가만히 서서 작품을 들여다보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 대신, 거대한 미로처럼 저를 압도하는 녹슨 강철판 사이를 걸어 다니며 물질과 공간, 신체의 상호작용을 통한 지각의 변화를 따라가보는 것은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지요. 세라의 조각을 직접 만난다는 설렘 역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정말로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장소의 낯선 공기, 낯선 풍광 속에서 우리 몸이 느끼는 긴장과 설렘, 세밀해진 감수성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새로운 지각의 능력을 선사하는 힘이 있나 봅니다. 내가 알아온 세상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경험될 때, 우리의 지평은 한 뼘 더 넓어집니다. 바로 그런 게 여행과 예술의 매력이자 마력이 아닐까요.
인간의 몸과 욕망에 관한 신학적 탐구
신학에서도 그동안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몸을 가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우리의 신앙과 근본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집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탁월한 신학자 새라 코클리는 《하나님, 성, 자아(God, Sexuality, and the Self)》에서 인간의 몸과 욕망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데요. 코클리는 프로이트 이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성적 충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비판하면서, 몸의 욕망을 무조건 억압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나, 무조건 만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 양쪽 모두 인간의 몸과 욕망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대신,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근원으로 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루는 신비의 장소이며, 기도를 통해 정화되고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코클리가 인간의 몸과 욕망을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연결한다면, 제임스 스미스는 동일한 인간의 몸과 욕망이 갖는 신학적 중요성을 예전(liturgy)과 연결시킵니다.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인간을 일차적으로 “생각하는 사물”(thinking things)로 보는 데카르트식의 합리주의 인간관에 반대하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랑하고 욕망하며 정서적이고 예전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기존의 합리적 인간의 인지적 모델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몸을 지닌 피조물인 우리의 사랑과 욕망의 지향을 형성해주는 기독교 예전의 물질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주지하듯,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 교리의 지대한 영향 아래 말씀을 절대적으로 중요시해온 개신교인들은 신앙을 많은 면에서 문자화·개념화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몸을 가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이 녹아든 체화된 신앙의 형식과 전통에 반감을 갖거나 낯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스미스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 머릿속에 바른 사상과 교리, 신념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이 사랑을 통해 세상과 관계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기독교 예배의 물질적 실천에 몰입함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물과 포도주를 바라보고 그 냄새를 맡으며 정서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져 간다.4)
스미스의 도전이 정곡을 찌르는 만큼, 또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우리의 욕망을 형성하는 물질적·신체적 실천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전에만 국한되지는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이가 사랑하는 작가 티시 해리슨 워런이, 침대 정리나 청소, 이 닦기처럼 매일 우리가 몸으로 하는 실천과 반복적 습관을 일상의 예전이라 부르듯이 말이지요. 실로 우리가 보여주는 일상의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욕망하는지를 형성하고 그 사랑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합니다.
매일 몸으로 하는 일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형성한다
바하마 출생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자닌 앤토니는 기독교적 배경과는 무관한 작가이지만, 작품에서 신기할 정도의 싱크로율로 이러한 신학적 통찰을 구현합니다. 〈핥고 거품을 내다(Lick and Lather)〉는 원형 기둥 받침대 위에 세워진 아이보리색 일곱 개, 진갈색 일곱 개로 총 열네 개, 곧 앤토니 자신을 본뜬 일곱 쌍의 흉상 조각들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얼핏 보면 모두 똑같은 흉상을 두 가지 색으로 여러 개 반복해서 만들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르지 않아 보이는 이 작품에는 의외의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조각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데요. 다름 아닌 초콜릿과 비누입니다. 사실 앤토니는 기상천외한 재료를 사용하기로 (큐레이터들 사이에서는 거의 저주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습니다. 〈갉아먹다(Gnaw)〉라는 작품에서는 심지어 고체 지방, 그러니까 기름 덩어리를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너무 파격적이라고요? 현대미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의외의 재료 선택 뒤에는 조각의 전통적 개념을 한 번 더 보기 좋게 뒤집는 또 다른 전략이 숨어있지요. 제목이 힌트를 주는 것처럼, 초콜릿 흉상의 경우 입으로 핥고, 비누 흉상의 경우 물로 씻기는 과정을 통해 작품이 완성된 것입니다. 먹고 씻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행위를 제작 과정 일부로 삼음으로써, 행위 미술의 요소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지요. 그렇게 핥고 물로 씻기는 퍼포먼스는 흉상의 형체를 미묘하게 지우고 희미해지게 합니다. 일곱 쌍의 흉상은 저마다 미묘한 차이를 지니게 되지요. 또한, 앤토니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통해, 칠등신을 완벽한 신체 비율로 칭송하는 전통적 미의 기준을 소환하지요. 그러고 보니 실물 없는 복제처럼 수많은 변주로 존재하는 일곱 쌍의 흉상은, 일정한 미의 기준에 맞추어 마치 찍어낸 듯 비슷한 얼굴과 체형을 한, 그러나 정작 자기 모습은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와 연예, 패션, 뷰티, 광고에 떠밀려 다른 듯 닮은 수많은 복제품으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인 셈이지요.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별생각 없이 매일 반복하는 먹기와 씻기 같은 일상의 신체적 실천이 우리의 욕망과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거나 변질시키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초콜릿은 흔히 욕망을 상징합니다. 그 초콜릿을 핥아 먹는 행위로 완성된 진갈색 흉상들은, 끝없이 욕망을 탐하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는 가장 필수적인 신체적 실천인 먹는 행위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점점 흐리게 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가꾸는 일 역시 우리의 몸을 돌보는 중요한 신체적 실천 중 하나인데요. 거품을 내서 씻기는 행위로 완성된 비누 흉상은 사회가 조장하는 온갖 미의 조건,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에 근거한 획일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 지배받는 사회에서, 씻으면 씻을수록 역설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점점 지워지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냅니다.
비록 깎이고 지워졌을지라도 앤토니의 얼굴을 담은 초콜릿과 비누 조각이 여전히 고요하고 아련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듯이, 우리 얼굴과 몸에 담긴 정체성은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우리의 인간됨을 간직하고 있기에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욕망의 핥기와 씻기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이 흐릿한 아름다움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린, 얼굴 없는 끔찍한 흉상만이 남겠지요. 이렇게 은유적이고 체현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자닌 앤토니의 아름답고 아련한 조각은, 먹고 씻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일상의 신체적 실천이 우리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반영하고 형성하고 있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샬롬을 향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임무는, 가장 일상적이고 소박한 하루 안에서 몸을 돌보는 것과 같은 사소하고 반복적인,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초콜릿과 비누 얼굴들은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입니다.
워런의 이 닦기에 대한 통렬하고도 아름다운 묵상이 그 속삭임을 좀 더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몸이 거룩하며 그 몸을 또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몸을 돌보는 일은 거룩한 행위임을 알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내 몸이 모든 깨어짐 속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언젠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진리를 붙들 것이다. 그렇기에 이 닦기는 비언어적 기도, 장차 올 소망을 붙드는 예배의 행위다. 영광의 작은 맛보기인 민트 향 나는 내 숨결.5)
1) 제니퍼 앨런 크래프트, 《Placemaking and the Arts》, 2쪽.
2) 《Placemaking and the Arts》, 2쪽.
3) 한병철, 《생각의 음조》(디플롯), 122쪽.
4) 제임스 스미스, 박세혁 옮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IVP), 46-47쪽.
5) 티시 해리슨 워런, 백지윤 옮김, 《오늘이라는 예배》(IVP), 74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하나님의 집》 《온 마음 다하여》 《빅 스토리 바이블》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