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적 신학을 창안하는 자유주의적 칼뱅주의자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종교&신학과 크리스 다우더 판 트로스트베이크 교수

[416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3]

2025-06-30     김동규
이하 사진: 인터뷰어 제공

크리스 다우더 판 트로스트베이크(Chris Doude van Troostwijk, 1962-)는 네덜란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위트레흐트 대학교, 암스테르담 대학교, 레이든 대학교에서 신학·철학·연극학을 공부한 후, 암스테르담 대학교 대학원 문화분석학연구 과정에서 ‘발명의 철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창안하며 〈발견들, 비판의 상기. 칸트-프로이트-리오타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텔레비전 미디어 파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개신교 신학부 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는 룩셈부르크 종교&사회연구소 윤리학 및 종교철학 교수이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종교&신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발명적 신학이라는 새로운 사유를 통해 비-교의적으로 신학함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알자스&로렌 개신교 교회 연합 소속 목사인 아내 알렉산드라 브뢰킨크(Alexandra Breukink)와 ABC-Climont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영적 구도자들과의 실천적 만남의 장을 열고 확장하는 일에도 크게 힘쓰는 중이다. 이 프로젝트와 연계하여 프랑스 클리몽 소재의 집을 쉼과 재충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하며 섬김의 도를 실천하고 있다. 칸트의 《형이상학의 꿈을 통하여 해명된 어느 시령자의 꿈》, 리오타르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네덜란드어로 번역했고, 지은 책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함께하는 삶》, 《재신론의 내기》(공저) 등이 있다. 인터뷰는 2024년 3월 24일 프랑스 클리몽에 있는 판 트로스트베이크 교수의 자택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 선생님의 신앙 형성과 종교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어제 산책할 때 선생님께서는 자신을 “자유주의적 칼뱅주의자”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저는 장로교회에서 성장했어요. 아버지는 카이퍼의 교회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더 오래된 개혁파 칼뱅주의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어머니는 의학을 공부하셨고, 저는 항상 의사가 되고 싶었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저는 문화와 관련된 무언가를 탐구하기로 결심했어요. 음악(연주를 했습니다), 연극, 글쓰기 분야의 꿈이 있었지만, 대학에서 적합한 교과과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하면 문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노출될 수 있고, 그 후 언제든지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하셨지요. 그래서 문화인류학적 접근에 가까운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목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고, 심지어 믿음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죠.

위트레흐트대에서 공부한 후, 국립 암스테르담 대학교로 적을 옮겼습니다(자유대학교와는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성서해석학, 특히 구약해석학에 중점을 두었지요. 유대교적 독서 방식을 따라 텍스트를 읽으면서 단어와 구절에 관한 매우 분석적인 성찰을 했어요. 이것이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텍스트에 집중해서 의미를 찾고, 해석을 창안하는 것 말이지요. 해석학적이고 다소 유대교적인 텍스트 접근법이 저를 신학으로 이끌었습니다. 이 접근법은 개방적이고 창의적이었지만, 같은 학부에 강한 바르트-칼뱅주의적 경향이 있었죠. 신앙과 하느님, 믿음에 관한 것이었기에 전혀 흥미롭지 않았어요. 저는 문화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니까요.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했지만, 다음과 같은 긴장이 존재했습니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텍스트를 읽고 새로운 관점을 찾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며 이해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교리에 동의하는 것인가? 제 관심은 분명히 전자였지요.

4년 후, 드라마와 연극을 두 번째 전공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은 항상 제 취미였는데요. 저는 연극과 비극, 희극을 연기하고 감독했으며, 작품을 번역했죠.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에게 매우 중요했던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옮겼습니다. 연극과 신학 —문화와 믿음— 사이의 결합에서, 저는 둘을 이어줄 다리를 찾고 있었어요. 이 다리는 철학이 되었습니다만,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모든 신학자처럼 저도 이미 얼마간 철학을 공부했지만, 제 진입점은 키르케고르였습니다. 이때 키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작품으로서 키르케고르가 아니라 익명의 작품들이었죠.

같은 시기에, 저는 네덜란드에서 개신교 신학을 공부하여 부목사나 목사가 될 수 있는 과정으로 레이든대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곳은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부를 갖추고 있었죠. 제가 자유주의 신학자라면, 그것은 레이든 대학교 덕분입니다. 키르케고르가 중간에서, 제 배경인 연극과 신학을 연결했지요.

키르케고르에서 시작하여 신학을 하기 위해 레이든으로, 텔레비전 미디어국이 있는 (네덜란드 미디어 파크가 있는) 힐베르쉼으로 갔습니다. 힐베르쉼에선 약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이것이 제 드라마 연결점이었어요. 레이든에서는 실천신학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런 다음 (아내) 알렉산드라가 룩셈부르크에서 네덜란드어 공동체의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로 이사했습니다. 그렇게 룩셈부르크에서 7년 동안 살았고, 저는 텔레비전 미디어 분야에서 계속 일하면서 논문을 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항상 철학을 연구해왔고, 어느 시점에서는 저 자신이 철학자임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철학으로 박사논문을 쓰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지하고, 개신교적이며, 제 마음에 와닿는 철학자가 한 명 있다면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당시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 (그는 이 타이틀을 싫어했지만)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영향력을 발하고 있었죠. 리오타르는 칸트를 꽤 읽었지만, 이는 자신의 체계를 완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칸트였습니다.

저는 룩셈부르크에 있을 때 프랑스어를 향상시키고 싶었습니다. 논문을 프랑스어로 썼죠. 논문 제목은 《발견들. 비판의 회상(칸트, 프로이트, 리오타르)[Trouvaille. Anamneses de la critique(Kant, Freud, Lyotard)]》인데, Trouvaille는 일종의 언어유희인데요. 프랑스어로 trou는 구멍 또는 부재를 뜻하고, valoir는 가치나 의미가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이 아이디어는 우리의 사고에서 부재하는 데—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곳—의미 있는 것이 나타나도록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리오타르는 선생님의 작업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심지어 리오타르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번역하셨고 〈신을 표현하기: 리오타르의 숨겨진 종교 철학〉도 쓰셨죠. 리오타르는 특히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표자 중 한 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선생님은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던 사상을 어떻게 관련시키시고, 관여하시는지요?

1979년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아요. 당시 어떤 문서가 있었는데, 사회적 연구에 관한 정부 위원회의 의견서였을 거예요. 리오타르가 이 문서를 작성했고, 이것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 되었죠.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과 칸트에서 출발했습니다. 리오타르에게 ‘조건’이란 어떤 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칸트의 첫 번째 비판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방식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종류의 조건하에서 가능한지 이해하고자 했어요. 이 조건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렀지요. 개별화의 효과, 가치의 차이 효과, 기술과 미디어의 증가하는 영향력의 효과 등이요.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증대하는 믿음과 신앙의 차이 효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사는 조건이 더 이상 근대적이지 않고 포스트모던적이라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근대적 조건은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노력하고 믿는 사고방식이에요. 다양성에서 통일성으로의 수렴은 공산주의·자본주의·파시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다양성을 수집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근대적인 것이고, 메타 내러티브지요. 우리는 칸트나 데카르트에서도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형태가 아니라 주체가 다양성 수집의 중심적 기반이 되는 형태예요. 즉 인간 주체, 이성이 그런 기반이 되지요. 포스트모던적 조건은 이 수집과 통일의 원천 또는 중심이라는 것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며 위계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은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인데요. 리오타르는 이를 행복해하지 않았죠. 그가 암스테르담에 왔을 때 이 점을 말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 수용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그의 비평가들, 긍정적인 비평가들조차도 ‘조건’ 개념을 완전히 잊어버렸는데, 이는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는 이와 관련해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당신은 공산주의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아직도 공산주의가 존재하잖아요.” —당시 유럽과 동유럽 등에는 아직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틀렸어요.” 그런데 이는 경험적 접근이자 역사적 접근이에요. 리오타르는 가능성의 조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세운 것은 “거대한 서사가 그 신뢰성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포스트모던은 신뢰성 상실이며, 이는 우리 대화에서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 완벽하게 일치해요. 저는 세속화를 믿음의 신뢰성 상실이 아닌, 중앙 집중화된 통일적 신뢰성의 상실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조금 시간이 지나 리오타르는 자신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사회학적이고 정치적인 언어에서 철학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죠.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포스트모던》이 그런 책이지요. 제 생각에 그는 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포스트모던의 정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약간 역설적이지만, 그는 포스트모던을 근대적인 것으로 정의합니다. 포스트모던이 현대에 앞서 온다고도 말하지요.

포스트모던이 현대 이전에 온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철학자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이 근대 이후에 온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사회학자·역사가·경험주의자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리오타르는 그것을 거부했어요. 왜 포스트모던이 현대 이전에 오는 걸까요? 리오타르가 말하길, 단순히 메타 내러티브가 차이와 다양성을 통제하고 통일하기 위해 발명된 구성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타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종의 충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성물들이 구성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구성하는 충동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미 그 출현 과정에서 태어난 아이디어로는 아이디어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순간이 창조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성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죠.

우리는 근대성의 가능성 조건을 넘어서거나 그 이전에 무언가가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이 조건을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러요. 그것은 그가 숭고의 개념에서 발견한 통제와 이해의 결핍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첫 번째 비판에서 지식, 두 번째 비판으로 넘어오면서 윤리, 정언명령, 자연과 자유에 관해 이야기했죠. 자연과 자유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두 영역입니다. 다리가 있어야 하는데요. 칸트에게 그 다리는 아름다움이었고, 리오타르는 칸트가 또한 숭고에 대해 논의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숭고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것입니다. 다리를 열어주는 것이에요. 아름다움의 감정이 연결하는 것이라면, 숭고의 감정은 분리하는 것이며, 실제로 그 둘은 같이 가죠.

리오타르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말하자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경험, 뭔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등에서 역사에 결핍이 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의 순간이며,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탄생 상태의 모더니즘이지 그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과 관련해서 그것은 꽤 간단해요. 그때 우리는 부정신학과 같은 사고 구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순간 자체가 창조에 속하지 않는 부정신학의 논리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창조의 순간을 여러분은 신이라고 부를 수 있고요. 하지만 우리가 성경의 창세기 이야기에서 신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신의 이름을 사용하죠. 이미 신에 관한 이야기 안에서, 이 모든 이야기에 선행하는 무언가나 순간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소통 안에서 이 이름을 사용해요. 그것이 이 이야기의 조건입니다. 또 그것이 부정신학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가 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미 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셈이지요. 신은 선행하는 것, 또는 항상 이미 선행하는 조건입니다.

판 트로스트베이크 교수 자택은 게스트하우스로도 쓰인다. ABC-Climont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 선생님은 발명적 신학(ars credendi)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데요.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개념입니다. 이런 형태의 신학이 무엇이며, 전통적인 자유주의신학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저는 현재 룩셈부르크 종교사회학교(Luxembourg School of Religion and Society)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 흥미로운데요. 저는 칼뱅주의자로서 룩셈부르크의 가톨릭 기관에서 일하는 셈이며, 그전에는 암스테르담의 메노나이트 기관에서 7년간 일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결코 집에 있었던 적이 없으며, 항상 사이에(in between) 있었지요. 이 ‘사이’라는 말은 상징적인데, (제 해석으로는) 모더니즘에 선행하거나, 모더니즘적 확실성이 해체되는 특정 국면을 가리키는 포스트모던적 순간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두 번째 직책을 수락했을 때, 이 보직은 자유주의신학 석좌교수직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메노나이트 전통은 미국이나 세계 다른 지역만큼 정통적이거나 보수적이지 않아요. 17세기 이래로는 자유주의적 신앙 형태를 보였죠.

자유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에라스뮈스를 핵심 인물로 삼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에서 비롯되지요. 핵심 쟁점은 자유, 신과의 화해 및 구원에 인간이 기여할 가능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칼뱅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사역이며, 은총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는 특히 당시 가톨릭이 신앙의 급진적인 도덕화를 추구했던 상황에서 중요한 쟁점이었어요. 당시 가톨릭은 죄인인 신자를, 부도덕함으로 인해 구원의 가능성을 상실한 부도덕한 인간으로 간주했으니까요.

에라스뮈스는 중간 입장을 찾았습니다. 가톨릭 신자로 남으면서 은총과 인간 윤리 및 구원에 대한 책임 사이의 길을 모색하고자 했죠. 당시 자유주의적 프로테스탄트와 메노나이트들도 비슷한 노선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자신의 구원에 책임이 있는 동시에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존재로 여겼어요. 이들은 칼뱅주의와는 다소 갈라섰지요.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많은 메노나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 속에 용인되기는 했지만, 탑이 있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죠. 탑이 모든 사람에게 그 교회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어요. 오늘날에도 국립 암스테르담 대학교 도서관 앞에 숨겨진 메노나이트 교회를 발견할 수 있죠. 그들은 칼뱅주의자가 아니었고 구원에 대한 인간의 기여를 믿었기에 숨어야 했습니다.

18세기에 자유주의신학은 더욱 학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성적 한계를 설정했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 신학자의 예시예요. 예를 들어, 그는 영혼이 시간과 공간 내에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주장했죠.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가 없으며,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는 말이지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이는 신학에서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19세기에 실증주의와 프랑스 세속주의로 이어졌습니다. 20세기에 자유주의신학은 영성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했어요. 타 종교와 밀교(esotericism)에 개방성을 가지되, 이를 유사-과학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아인슈타인 등이 칸트의 시공간 모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증명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죠.

저에게는 ‘오늘날 자유주의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어요. 저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인문주의와 르네상스를 살펴보았고, 인간이 자신의 믿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죠. 구원에 관한 책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제가 믿음을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을 실천한다는 것은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 같은 습관에 몰입하며, 설득 또는 수사학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발명적 신학(inventive theology)의 기본 줄기는 믿는다는 것이 곧 ‘믿게 하는 것’(faire croire, to make to believe)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 단순한 생각인데요. 제가 설교자로서 누군가를 설득하여 믿게 만들면, 제가 믿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더욱 강하게 믿기 시작하죠. 이는 지속성의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즉,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은 믿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아이디어가 발명적 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왜 발명적(inventive)일까요? 이 수사학은 성경 본문, 관습, 형식, 색깔 등 전통으로부터 온 공통 장소(loci communes)를 가지고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음을 표현할 때마다 저는 선택을 해요. 성구를 고르고, 찬송가를 고르며, 아마도 신문에 나온 현재의 사건들을 통합할 수도 있겠죠.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믿음이 표현되는 재료를 형성하며, 그 사이에서 어떤 일, 즉 사건(event), 발명적인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발명적(Inventiv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이중적 의미를 지니는데요. 인베니오(invenio)는 ‘발견하다’(to find)라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주일에 사용할 본문을 찾거나 본문과 짝을 이룰 이미지를 찾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 즉 천재성(genius), 놀라움(surprise), 또는 사건(event) 개념도 있죠. 그래서 발명적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기예(ars credendi)에 관해 말하자면, 고전기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에는 자유 기예(artes liberales)가 있었습니다. 아르스(Ars)는 사실 그리스어 ‘테크네’(techne)의 라틴어 번역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광범위하게 사용한 용어예요. 테크네는 단순한 도구적 수단 이상으로, 현대적 의미의 기술(technique)이 아니죠. 오히려 일종의 능력(capacity)에 가까워요.

앎이 세계와 관계 맺는 한 가지 방식이고 믿음이 또 다른 방식이라면, 왜 우리는 기예를, 즉 믿음의 ‘능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겠습니까? 저는 숲에서 개를 산책시키다가 이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역사 속에서 이 ‘믿음의 기예’ 개념이 존재하는지 실증하려고 했을 때, 제가 찾은 유일한 문서는 조프루아 발레(Geoffroy Vallée)라는 프랑스인이 쓴 논고 〈아무것도 믿지 않는 기술〉(ars nihil credendi)이었어요. 그는 가톨릭교회에 매우 반대했던 자유사상가로, 그의 논고는 자유주의신학에 괜찮은 시발점이 되어주었죠.

제가 발전시키고 싶은 프로젝트는 선하게 믿는 기예(ars bene credendi)입니다. 자신에게서, 세상에서, 신과의 관계에서, 그 무엇에든 유익을 주는 방식으로 믿는 기술이에요. 유익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믿음의 기예 말이지요. 이 유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요. 저는 단지 철학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나쁜 믿음은 믿음의 생명을 죽인다고 믿습니다. 믿음 안에서의 창의성이 저를 믿게 만들며, 그것이 곧 저의 책임입니다.

- 한국에서 칼뱅주의는 종종 극도로 경직되어 있거나 교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선생님은 칼뱅주의자로서, 칼뱅주의의 바람직한 형태나 칼뱅주의자의 올바른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칼뱅은 주로 법률가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인문주의자였죠. 칼뱅의 전기에서 나오는 법학(법적 담론)과 인문주의는 형이상학이 아닌 수사학의 틀 안에서 신학을 재사유하기 위한 이상적인 요소들을 제공해요.

정통 칼뱅주의자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 저자를 그 자신에 반하여 읽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저자에게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 대해 만들어온 고전적 수용에 반하여 읽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칼뱅이 신학 작업에서 수사학적 전략들과 인물들의 이론적 교리들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칼뱅이나 교리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어놓고 단순한 판단의 기준이 아닌 생명의 원천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지요.

비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외부에서 가해지는 비판입니다. 이는 외부적 규준이나 내부적 규준들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죠. 전통적인 칼뱅주의적 접근법들과 종종 연관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비판입니다. 자신의 사유를 살아있게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를 열어놓으려는 시도예요.

칼뱅주의의 엄격함에서 많은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주셨어요. 그분은 신앙을 주셨는데, 이는 매우 칼뱅주의적인 사상입니다. 우리의 믿음조차도 은혜의 표징이거나 은혜 그 자체라는 말이 그렇지요.

그러나 이 은혜는, 제가 확신하기로는, 생명을 기르기 위해 주어진 거예요. 다른 요소들, 죄, 지옥 등등은 이차적인 것들입니다. 명확한 것은 창조에서 하느님이 생명을 원하셨고, 우리에게는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분의 은혜를 통해 신앙을 주십니다.

이러한 해석은 칼뱅 사상의 삶에 대한 긍정적 측면들을 강조하고, 핵심 통찰들에 충실하면서도 성장과 쇄신을 허용하는, 칼뱅주의 신학에 대한 더더욱 역동적이고 열린 접근법을 제시합니다.

- 선생님은 현재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일하고 계시는데, 이 학교는 한국 개혁교회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유대학교의 최근 변화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질 것 같아요. 이제 이 기관은 개혁파 신학만이 아닌 다양한 종교적, 신학적 전통들과 교류하는 열린 학문적 환경을 마련하는 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네덜란드 교회사를 조금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저는 17세기 이래 지배적인 교파였던 칼뱅주의 교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 출신이에요. 역사적으로, 특히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이중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분열-분리가 있었습니다.1) 그리고 새로 형성된 이들은 자유대학교라고 부르는 자체 대학을 설립했죠. 왜 자유일까요? 국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립대학, 사립 개혁대학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개혁파 교회 학생들은 국립대학의 신학부에 속했죠.

저는 세 곳에서 공부했는데, 국립대학의 신학과 관련해서는 이중 체계(duplex ordo) 모델이 있었어요. 학사 과정에서 —당시 4년제였는데— 처음 4년 동안은 국가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국가 신학이란, 다소 정치적이지만, 이른바 학술적 신학입니다. 교회사, 종교학, 그리스어, 비평적 성서 읽기, 히브리어 등을 말하죠.

제가 신학으로 국가 교육을 받는 동안 종교적 의미의 신학서를 뜻하는 신학책은 한 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다소 과장은 있지만, 교육과정에서는 그런 책을 다루지 않았어요. 윤리학, 철학은 있었지만요. 종교적 신학은 없었고, 오직 예비 과목들만 있었습니다. 4년 후에는 석사과정에서 교회 사역 방향이나 학술적 방향의 공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았죠.

이는 단순히 박사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마친 사람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박사가 될 준비란 현재의 석사에 해당하는 사람이죠. 이는 다른 개념이에요. 무언가를 숙달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할 준비를 하는 거니까요. 그러나 사립대학이었던 자유대학교에서는 신학이 전체에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이중 체계를 갖지 않았어요. 첫해부터 이미 교의학과 교리, 실천신학과 같은 과목들을 공부했죠. 그런데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체제처럼 계산적으로 대했고, 신학부 4개를 유지하는 데 너무 비싼 비용을 치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실제로 지나치게 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습니다. 대학의 학부들을 통합하기로 결정했죠.

약 15년 전, 제가 컨설팅 분야에 있었던 때이기도 한데요. 그때 이 문제에 약간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학부제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거든요. 아이러니하게도 국립대에서 폐지되었던 이중 체계를 재발명했지요. 이중 체계는 모든 학생이 배워야 할 학술적 학문 분야들이 있고, 그 중심의 주변에는 흔히 신학교라고 부르는 위성들이 자리한다는 의미예요. 메노나이트 신학교가 있지만 불교도들과 힌두교도 있고, 침례교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학문이 종교적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방법을 배우는 개방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개방적인 중간 지대에서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서로 만나고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 내부 교회 교육을 받을 수 있죠. 이것이 저에게는 흥미로운 모델입니다.

아내 알렉산드라 브뢰킨크 목사와 판 트로스트베이크 교수

- 선생님은 알렉산드라 목사님과 함께 ABC-클리몽(Climont)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세미나, 체류 프로그램, 컨퍼런스, 예술가 거주, 그리고 취약한 상황에 있거나 그저 지나치는 사람들을 환대함으로써, ABC-클리몽은 만남을 위한 실험실 같은 장소가 되고자 합니다. 프로그램은 네 가지 주제 영역으로 나뉩니다. 뿌리내리기(자연), 창조하기(문화), 사유하기(성찰), 믿기(영성).” 한국 독자들도 이 운동에 관심이 있을 것 같습니다.2)

우리가 하려는 것은 믿음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믿음을 지속적으로 양육할 책임과 활동을 요구하는 거예요. 이 양육은 아이디어, 사건들, 말하자면 일어나는 일들로 이루어져요. 이런 일들은 계획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지만, 밭을 준비하듯이 할 수는 있죠.

두 가지 이질적인 요소를 나란히 놓는다고 해봅시다. 여기 컵이 있고 여기 책이 있습니다. 이들을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성찰하거나 실험하기 시작하면 갑자기 무언가가 나타나요. 그것은 사물이나 아이디어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인간을 위한 거예요. 이질적인 집단과 사람들, 개인들이 만나서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는 영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삶과 신뢰, 그리고 살아갈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기르는 것이죠.

여기서 하는 일은 네 가지 주제와 분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거예요. 자연 생태, 예술, 성찰(철학이나 다른 것들), 그리고 영성. 오늘 여기서 보신 것은 예술과 영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우크라이나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렇게 사람들과 노래 부르는 이들이 만나 무언가를 이루지요. 이것이 ABC-클리몽의 아이디어예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는 발명적 신학.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시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능성을 위한 플랫폼을 제공하고 조직하는 것이죠.

■ 주

1) 19세기 프랑스의 이중 개혁(double réforme)은 일반적으로 교육개혁과 종교개혁을 지칭하는 용어로, 교육과 종교를 분리하는 교육의 세속화를 골자로 삼는 개혁이다. 공교육 의무화가 도입되면서 공교육 내에 종교적 내용을 배제하는 교육 방향이 제도적으로 수립되었다.
2) 새로운 공동체적 수양 경험이 필요한 이들은 ABC-Climont(abc-climont.eu)에 참여할 수 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조금 떨어진 클리몽을 기반 삼아 이루어지는 해당 프로젝트는 쉼과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이들이 함께 모여, 생태·예술·철학·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한 갱신을 꾀한다. 또한 판 트로스트베이크와 알렉산드라가 함께 운영하는 클리몽 산기슭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climont.eu/maison-d-hotes)는 쉼과 회복이 필요한 나그네들이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이다.


김동규
독립연구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