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목수들을 길러내는 학교 — 예수는 요셉의 견습생이었다
[416호 브루더호프 통신]
1989년, 허리케인 휴고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지역을 강타하여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그 여파로 역사적 가치가 있던 고옥과 건물들의 복구 작업이 불가피했고, 주택 소유주들은 미장공이나 석공을 찾아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런 기술자들 수가 많지 않아 복원 작업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 무리의 교육자들이 ‘남녀 장인 정신과 기술의 재건’이라는 비전으로 찰스턴 지역에 미국 건축 예술대학(American College of Building Arts, ACBA)을 설립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의 장인 학교 제도인 콩파뇽 뒤 드부아(Compagnons du Devoir)를 본보기 삼아 중세의 길드 제도를 현시대에 재현하려 합니다. 길드의 역할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기술 감독이었습니다. 정부가 아닌 길드가 표준을 정하고 직접 감독하여 자격과 품질을 결정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진입 기회가 제한적이었지만, 오늘날은 평등을 향한 노력 덕분에 불우한 사람들과 여성들, 소수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무역에 진출하여 향상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육의 개방과 공유였습니다. 견습생도 길드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풍부한 자원을 이용하고, 스승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사업 세계와 달리, 경쟁이 아니라 좋은 일을 하고 더 나은 장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길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습니다.
ACBA의 목표는, 값싼 재료를 사용한 쉽고 빠른 공정보다 아름답고 오래가는 건축물을 만들어 보존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찰스턴 시내의 고가도로 아래에 있는 작은 캠퍼스를 다니다 보면 건물 곳곳이 학생과 교수들의 작품으로 꾸며져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현관문은 건축 목공 학생들이, 천장에 드리워진 샹들리에는 대장장이 학생들이 만들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날에는 석고 설치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이런 최종 결과물은 학생들이 길드에 소속되었으며, 존중받을 만큼 가치 있는 양질의 기술을 가진 기능인이 되었음을 증명합니다. 자체 개발한 아름다움으로 꾸며진 건물들은 아주 멋스러웠습니다. ACBA의 목적은 좋은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좋은 작품은 단순히 기술이나 기법, 원칙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웬델 베리는 《소농, 문명의 뿌리: 미국의 뿌리는 어떻게 뽑혔는가(The Unsettling of America)》에서 좋은 작품은 ‘문화적으로 준비된 열정에서 나온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우수성과 질서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ACBA는 구체화된 방식으로 기술을 전승하면서 세련미와 발전에도 열려있는 살아있는 전통의 일부입니다. 혁신에 열려있지만, 혁신은 반드시 전통의 장점을 보존해야 합니다. 매튜 B. 크로포드는 2006년에 〈뉴아틀란티스〉에 쓴 에세이 ‘혼이 깃든 기술 교육(Shop Class as Soulcraft)’에서 손의 숙련과 기법 역량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장인은 새로운 것을 쫓기보다, 옳고 그름의 방식을 분별하고 올바른 것을 따르는 데 습관적인 경의를 표한다.”
대다수 직업학교와 달리 ACBA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과 인문학이 통합된 교과과정인데, 교양 있는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인문학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입학생 대다수는 공예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며, ACBA는 이들에게 공예의 역사와 중요성, 보존의 가치 등을 교육합니다. 특정한 기술 수업에서는 이런 지식을 실용적으로 적용합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기둥 구조를 설계할 때, 수업에서 배운 기둥 양식의 역사와 피타고라스 정리를 실질적으로 활용하는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연계는 인간 교육에 다다릅니다. 학생들이 기본 제도 과정에서 가장 먼저 그리는 것은 인체입니다. 좋은 작품이 사람에 의해 생산되듯이, 훌륭한 작품이란 인체에 잘 맞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모든 사회 제도의 시작과 주체와 목표는 인간이며 인간이어야 한다”(교황 바오로 6세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는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을 종교와는 상관없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신체를 모두 갖춰야 온전한 인간이라 하듯, ACBA는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전통적 장인을 양성합니다. 값싼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저임금과 싸구려 재료를 고수하는 산업주의 세계에서 ACBA는 지속 가능한 작업 방식을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왜 모든 학교가 이렇게 하지 않나요?
서양철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머리와 손, 즉 지성과 실용 기술이 분리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그린 이상 사회는 철학자 왕이 통치하는 사회였습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재화는 이성인데, 실용적인 일에 몰두하는 하층 시민은 고차원적인 것을 생각할 시간이나 지성을 가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엘리트들 몫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이 현대에는 실용 예술에 유리하다고 여겨지지만 산업계는 학교와 대학이 마치 효율적인 기계 부품처럼 작동하는 인력을 양성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실용 기술을 알려주세요.” 웬델 베리의 지적처럼, 광범위한 ‘교양’을 의미했던 교육은 생계를 위한 ‘실용적’ 준비와 자격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했습니다. 먼저는 ‘교양과 실용’이 ‘실용’으로 축소되고, ‘실용’은 다시 ‘전문’으로 대체된 다음, 교육 목적의 기준도 유용성에서 경력주의로 바뀐 것이죠. 지금의 현대인을 만드는 것은 돈을 벌고 소비하는 교육입니다. 교육마저도 소비자의 사고방식에 맞춰 흥미롭고, 쉽고, 재미있어야 하는 일종의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쓰는 사람과 손을 쓰는 사람을 분리하는 교육 방식은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습니다. 몸이 마음과 떨어져 건강할 수 없고, 마음이 몸과 떨어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이 둘을 다시 이어 조화시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선각자가 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시몬 베유가 지적 문화에 참여하는 도제 프로그램을 구상했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기술을 배우고 학업에 열중하는 만큼 낙후된 농촌 지역을 경험하기를 바랐습니다. 베유는 이를 통해 청년들이 자신의 출신지를 귀하게 여기고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가톨릭 일꾼 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을 통해 화해의 이상을 실천했습니다. 이 운동은 원탁 토론, 환대의 집, 농경 대학, 지적인 대화를 포함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땅을 가꾸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저도 여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제가 사는 곳 인근에는 블랙 마운틴 칼리지가 위치했습니다. 인문학 중심에 예술교육을 결합한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던 예술 학교로서 1933년부터 1957년까지 운영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교육 시스템에는 언제나 주목할 만한 대안이 있긴 해도 교육의 전일성보다는 전문화를 목표로 합니다. 개인의 성격 유형과 관심사를 직업에 맞추려 애쓰는 것이 보통의 진로 교육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 개개인의 전인성을 북돋울 수 있을까요?
요셉의 견습생
인문학과 직업교육을 결합한 새로운 학교로서 다른 예를 들자면,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청년들을 위한 가톨릭 직업학교인 하멜 아카데미가 있습니다. 하멜 역시 필요성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믿을 만한 숙련 노동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상인들은 다수의 가톨릭 학교와 대학들에 직업학교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2021년에 이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왜 기술에 중점을 둔 가톨릭 대학은 없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이 세계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발전되어 이 학교를 생기 있게 이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기술자가 더 필요하니까 양성한다”는 경제적 또는 학문적 문제를 다룹니다. 후자는 영적 문제의 본질에 더 가깝습니다. 청년들에게 미비한 점이 기술이나 인문학 교육만은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많은 젊은이가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잃고 있습니다. 하멜 총장인 데이비드 펠프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단순히 인재 양성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이나 학문 토론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섬김에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에 기반한 통합된 영성이 필요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노동은 사람에게 좋은 것입니다. 인간성에도 유익합니다.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자기 필요에 이용하면서 자연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을 이루어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인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썼습니다.
펠프스는 저와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짚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요셉의 견습생이었습니다. 그분은 행동으로 배웠던 직업인이었습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일 속에서 또 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모범입니다. 이것들은 그저 생각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시각입니다. 펠프스는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고 생기 넘치는 인간에 있다”라는 《이단 논박(Against Heresies)》에서의 이레네우스 말을 즐겨 인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비전이다”라는 자주 인용되지 않는 대목도 주목했습니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뵙는 것이며, 일이 곧 기도요 예배의 연장이 될 때, 노동과 직업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집니다. 이런 강조가 수도원적으로 들린다면,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멜 아카데미는 스콜라철학보다는 수도원 전통에서 더 많은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침 기도와 저녁 예배는 일상입니다. 학생들은 그 시간 사이에 학습을 하거나 주당 20시간의 현장 실습을 합니다. 점심시간에는 인문학 강좌 중 하나를 수강하기도 합니다. 하멜에서 가르치는 인문학 역시 전형적인 인간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는 완벽한 사람이었기에 학생들은 그분의 이야기를 배우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법을 배웁니다. 토론과 적용을 통해 단순한 이론이 아닌 삶의 방식을 배웁니다. 학생들은 다양한 소명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특정 직업으로서 소명뿐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이면서 성자로서의, 형제와 아들, 이웃,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소명에 관하여도 배웁니다. 인문학 강좌는 종종 학생들의 뜨거운 열기로 시작되는데,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시청하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위대한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이 모든 뛰어난 기술자들은 어떻게 함께 힘을 합쳤는가?” 그런 다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우정에 관한 C. S. 루이스의 책을 읽는 것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좋은 친구의 의미를 토론합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손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나, 공부는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을 주류 교육의 아웃사이더로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하멜 아카데미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유형을 찾아 적응해 나갑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 것을 잘할 수 있다는 점에 안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일꾼으로 오셨다면 그들도 같은 일꾼이 되어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대학은 너무 늦을까요?
직업 지향적 교육제도 안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삶과 꿈을 더 구체적이고 인문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이런 발상이 대학에 도입된다면 유용하겠지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2010년 초 이 잡지를 발간하는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는 실용 기술과 인문학을 가르치는 대안 고등학교를 시작할 때라고 판단했습니다. 마운트 아카데미는 2012년에 뉴욕주 에소푸스 허드슨강 유역에 있는 옛 리뎀프토리스트 신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브루더호프는 전체론적 교육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운트 아카데미는 기술학교나 입시 준비 학교가 아닙니다. 음악원이나 운동 명문고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철학은 “머리, 마음, 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접, 댄스, 농업, 환경과학, 미술사, 목공, 요리 등 다양한 수업과 동아리를 통해 학생들이 역량을 마음껏 기르고, 관심 분야에서 최대한 성장할 기회를 열어줍니다. 오전에 플라톤이나 셰익스피어의 저작을 읽는다면 오후에는 실습 활동을 주로 하는데, 이를테면 학교 주차장에서 해비타트를 위한 조립식주택 짓기 등을 합니다.
마운트 아카데미는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통합 커리큘럼을 운영합니다. 어떤 학생은 깊이 있는 학문을, 어떤 학생은 음악을, 어떤 학생은 특정 기술을 더 선호할 수 있습니다. 획일적 교육 방식에서는 일반적으로 특정 분야(학문과 체육)에 뛰어난 학생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모든 영혼이 가치 있습니다. 마운트 아카데미는 학생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으로 성장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니 윈터 교장은 학생들이 자기의 틀을 깨고 그들의 관심 분야로 가지를 뻗을 수 있게 돕는 것이 과제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의미와 목적을 찾았을 때, 학생들은 사랑하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학생에게 바라는 게 아닐까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수많은 정신 건강 연구가 수행되지만, 현대의 학생들이 겪는 장기적 절망감은 드러난 것 이상으로 심각합니다. 모든 생명에 가치를 부여하는 교육 대신 교육제도가 평가하는 대로 이들을 서열화하고 분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1973년에 발행된 E. F. 슈마허의 영향력 있는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50년이 흐른 지금도 교육에 유효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소외감, 당혹감 또는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한 이유로 학문을 추구한다면, 자연 과학 즉 노하우의 획득 같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과학은 사물이 자연계나 과학적 환경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많은 것을 밝혀주지만 삶의 의미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으며, 소외감과 내면의 절망을 치유하지 못한다.” 인문학이나 교양이 중심이 된 교육과정 없이는 이런 불안감을 안고 사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길러내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이 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사상만 심어주면 그들의 신체는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머리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삶은 몸을 포함합니다. 손으로 일하는 육체 활동은 정신세계를 더욱 향상시킵니다. 우리는 배우려면 많이 읽으라고 학생들을 꽤 종용합니다. (저는 학구적이라 독서에 만세를 외칩니다만) 사람들은 행동을 통해 훨씬 잘 배웁니다. 온전한 교육은 실질적인 기술을 포함합니다. 온전한 인간은 힘든 일마저 창의적이면서 생산적으로, 심지어 즐겁게 해낼 수 있는 머리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여러 문제 속에서도 선구적인 학교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소개한 곳은 세 곳이지만, 오하이오주 스튜번빌에 있는 가톨릭 학교인 성 요셉 노동자 대학(College of St. Joseph the Worker)도 전체 학생에게 기술과 교양을 가르치고, 버지니아 시골에 있는 성공회 남학생 기숙 고등학교인 성 던스턴 아카데미(St. Dunstan’s Academy)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학교들처럼 더욱 통합된 학교를 쉽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공예의 기초를 가르치되 그 역사와 기술을 함께 교육하는 직업학교들, 산업 예술 수업을 중심 교과과정에 둔 전통 학교들, 또는 학생들이 농업을 배울 수 있게 농장을 조성하고 학교 식당의 저장실을 채우면서 식품 보존법을 배울 수 있는 대학들 말입니다. 학문, 예술, 자연, 기술 분야 사이에 존재하는 극명한 분리는 왜 일어나는 걸까요?
데이비드 브룩스는 2018년 〈뉴욕타임스〉 칼럼에 이탈리아 코모에 있는 코메타라는 학교를 소개했습니다. 위탁 아동을 가르치는 이 학교는 루이지 주사니의 미를 강조하는 교육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아름다움이 가르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브룩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직업 고등학교의 교과과정은 대부분의 육체 작업이 금세 기계화될 것이라는 생각의 바탕에 수립되었지만, 그 어떤 기계도 정이 넘치는 가정의 분위기는 만들 수 없다. 이곳의 학생들은 식당 종업원, 목수, 패브릭 디자이너, 제빵사 등 어떤 분야의 훈련을 받든 친절을 이해하고 베푸는 법을 배운다.” 코메타의 교장인 알레산드로 멜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들이 ‘우리 집에 잘 오셨습니다’라고 환영하지요.”
현대 경제는 농업, 산업, 제조업 등 수작업의 기반 위에 구축됐습니다. 지금은 회계, 경영, 정보 기술 등 머리의 경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기술적이고 기술관료적인 경제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인간 중심적인, 머리와 가슴과 손의 경제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로봇도 ‘어서 오세요’ 하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가정을 세우고 폭넓게 환영할 줄 아는 사람을 키우려면 전인적이고 인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알렉스 소슬러
몬트리트 대학 교수이자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 있는 구세주 성공회 교회(Redeemer Anglican Church)의 부목사이다. 저서로는 《사랑을 배우다: 순례로서의 기독교 교육(Learning to Love: Christian Education as Pilgrimage)》《영성 형성을 위한 간략한 안내서: 영혼의 삶을 위한 진실, 선함, 아름다움, 공동체(A Short Guide to Spiritual Formation: Truth, Goodness, Beauty, and Community for the Life of the Soul)》 등이 있다.
번역 | 들꽃처럼
한때는 어린이를 가르치겠다고 유아 교사로 일했으나, 지금은 아이들을 스승으로 여기고 그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바느질과 농사일 거들기, 할머니들과 놀기를 좋아하고 쓸고 닦는 게 취미다. 현재는 미국 봄의 계곡 브루더호프에 살며 쟁기출판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