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지 않고, 있는 사람들

[416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6-30     이한주

오지랖 넓게 다른 교회 교인의 고민을 듣는 날이 있다. 대체로 내게 찾아오는 분들은 자기 교회에서는 털어놓지 못할 사연을 가진 분들이다. 얼마 전 만난 권사님은 ‘멀쩡한’ 아들이 왜 마흔 넘도록 결혼을 안 하는지 묻는 교우들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자기 아들을 좋게 보고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체한 것처럼 답답하단다. 아들이 결혼 안 하는 진짜 이유를 말하면, 아들을 멀쩡하게 보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멀쩡한 부모로 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고, 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듣고 싶어 찾아온 권사님은 결국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동성애자들은 정말 지옥에 갑니까?” 충혈된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그동안 겪은 마음고생을 말해주었다. 어디 이 권사님 한 분뿐이랴. 어쩌면 내가 아는 누군가도 어디선가 이런 하소연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민음사)는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소설 화자이자 주인공인 엄마는 교회 권사님이다. 이 교회 교우들은 서로를 잘 알고, 사소한 변화도 금방 찾아낼 정도로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 대학에서 강의하는 딸이 함께 살기 위해 엄마 집에 왔다는 걸 알게 된 교인들은 딸에 대하여 말한다.

이 집 딸이 대학 교수잖아. 그지?
그래요? 대단한 일 하셨네. 큰 은혜지. 자식 잘되는 것만큼 큰 은혜가 없잖아요.
여기 권사님이 교직 생활을 하셨잖아요. 그래서 자식 가르치는 데엔 돈 안 아꼈어. 그래도 투자한 만큼 이뤘으니 얼마나 좋아요.
누군가 버튼을 누르듯 말을 시작하면 자기네들 멋대로 살을 붙여 부풀린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걸까. 그래서 내가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처럼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셨느냐고 따져 물을 수 없도록 필사적으로 막아서고 있는 걸까. (53쪽)

교인들은 딸을 대학 교수라 부르며 잘된 자식은 성공한 투자요, 큰 은혜라며 부러워한다. 그러나 딸은 교수가 아니라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시간강사이고, 한때 교직 생활을 했던 그녀는 하루 종일 끝나지 않는 돌봄 노동을 하는 요양보호사다. 그녀는 딸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켰다고 후회한다. 공부를 좀 덜했다면 딸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만큼 괴로운 속사정이 있다. 그것 때문에 왜 하필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셨느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으러 왔는데, 이 사연을 교우들이 엿들을까 봐, 들을 수 없는 말을 침묵 속에서 되뇐다. 교인들이 대학 교수라 부러워하는 딸이 레즈비언이었던 것이다. 성소수자인 딸을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엄마는 동성애 반대 집회를 목격하며 독백한다.

이제 나는 저기 반대편에 모여 선 사람들처럼 말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애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조용히 침묵하라고 명령하고, 죽은 듯 지내거나 죽어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편에 내가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애들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서 있는 걸까, 서 있어야 할까. (167쪽)

내 자식이라면 차마 하지 못할 말이 있다. 보이지 마라, 침묵하라, 죽은 듯 지내라, 죽어버려, 같은 말.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자식이 불쌍해서 속이 끓는데, 한편으로는 나와 다르고 남들과도 다른 자식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딸에 대하여》를 딸보다 엄마 입장에서 읽은 건, 내게 찾아와 괴로운 마음과 불안을 토로하던 권사님이 생각나서였다.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믿음에 대하여》(문학동네)에 나오는 철우는 동성 연인과 함께 살고 있는 게이다.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 하는 철우의 어머니는 그냥 친한 선배와 함께 사는 줄 안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 이사한 다음 날 철우의 어머니는 불구덩이 속에서 아들이 혼자 울고 있는 꿈을 꾸었다며 반찬을 싸 들고 찾아온다. 어머니는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탁상용 십자가를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과 기도한다.

우리 셋은 둘러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치 프롬프터를 보고 읽는 것처럼 줄줄 기도문을 외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랩 같은 기도를 들으며 한영과 나는 이따금 실눈을 뜨고 서로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발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때쯤 아멘, 하는 소리와 함께 기도가 끝났다. 눈을 뜬 어머니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구나.” (239쪽)

철우 어머니는 “기도는 아무리 넘쳐도 모자람이 없고,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퇴행성 관절염이 있으면서도 매일 20분을 걸어 새벽기도에 나가는 독실한 교인이다. 철우의 어머니가 교인이 된 것은 남편의 사업 실패로 어린 자식 둘을 홀로 건사하면서, 이혼과 자살이라는 서슬 퍼런 카드를 품고 살던 때였다.

난생처음 가본 교회에서 찬송가를 듣다가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진이 일어난 듯 온몸이 격렬하게 떨렸고, 그 진동이 멎을 때쯤 형언할 수 없는 환희가 찾아왔다. 그때가 구원의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은 매우 황홀해 보였다. 그 이후 어머니는 매일 아침 새벽 예배를 나가게 되었으며, 두 번째 배우자나 다름없는 예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생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241-242쪽)

철우는 어머니가 교회 단체 채팅방에서 받은 음모론 영상을 보내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해도 어머니의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머니 인생에서 교회와 신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교회에서 삶의 희망을 찾아 열심히 일한 덕분에 철우도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철우가 성소수자들 모임에 참석했을 때 대형교회에서 코로나 방역 지침도 안 지키고 예배를 본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 뉴스를 보고 동료들은 한마디씩 한다.

“모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죽어라 모이네, 무식한 새끼들.”

“교회 아니면 신이 기도를 못 듣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이 시국에도 몇백 명씩 모여 울고불고 난리라더라. 전염병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교회를 향한 비판과 조롱의 말들이 오가는데 철우는 눈치 없이 말한다. “저 사람들도 답답하겠지. 우리처럼.” 순간 정적이 일었고 논쟁이 이어졌다. 이때 철우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에겐 주말에 한 번 교회에 나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기도 할 거고, 그분들한테 거기 가서 소리 지르고 기도하는 게 취미이고 또 사는 낙이기도 할 텐데. 집단을 너무 악마화하면 안 되지 않나?”(209쪽)

이렇게 말할 때 철우는 자기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집단을 너무 악마화하면 안 된다는 말은 성소수자를 악마화하는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이면서, 성소수자를 악마화하는 교회의 폭력과 편견을 따라 하지 말자는 다짐 같다. 철우의 모습에서 교회로부터 비난받는 동료들이 교회를 비난할 때 홀로 교회를 변호하는 크리스천 성소수자들이 떠올라 마음이 찡해졌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문학동네)에 실린 단편〈루카〉는 주인공 이름에서 제목을 따왔다. 주인공 ‘루카’의 본명은 ‘예성’이다. ‘예수’와 ‘성령’의 앞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어준 예성의 아버지는 목사님이다. 대로변에서 십자가를 빛내고 있는 커다란 회색 건물이 아버지가 개척하고 예성이가 자란 교회다. 예성이는 모태신앙이고,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아들인데, 그럼에도 예성이는 루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쓰는 게이다. 청년부에서 떠돌던 예성이에 대한 소문이 저녁 가족예배 자리에서 전해진 날, 목사 아버지는 ‘그게 맞느냐’ 물었고, 아들에게서 ‘맞다’는 대답을 듣고 정신없이 울며 소리쳤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랐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예성이는 가족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인이 되었다. 예성이는 루카의 삶을 선택하며 가족과 교회,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포기한다. 하지만 그는 일요일 오전이면 연인도 모르게 교회를 찾아간다. 루카의 삶을 선택했지만, 정체성의 절반은 여전히 교회에 있는 예성이다. 그러나 루카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한평생 살아온 교회라는 세계를 동시에 감당할 수 없다. 이 혼란을 정리해야 했던 그는 집을 떠난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 후일 루카의 아버지는 외국으로 관광을 가서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경험을 하고 자신의 허위의식과 거짓을 깨닫는다. 그는 살아있는 아들을 죽은 사람이 되게 했던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지켜야 할 성경 말씀이 있고 그것이 저에게 의미 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단지 제가 목사고 제 아내가 교회 사모이며 제 아이들과 생활과 커리어 전체가 교회와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도저히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주님과도 예성이와도 아무 상관없는 세속적인 이유였지요. 그런 것이, 고작 그런 것이 저의 믿음이었어요. (147-148쪽)

루카의 아버지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 살아있는 아들을 죽었다 여기는 편을 선택한다. 철저한 믿음처럼 보였던 이 선택은 자신이 평생 살아온 세계를 지키려는 자기애의 다른 모습이다. 그가 지켜야 할 성경 말씀이라고 믿은 것은 사실 자기 생활과 커리어 전체가 교회와 너무도 긴밀하게 연결되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던 ‘삶이라는 완고한 종교’였다. 작가는 루카의 동성 연인의 입을 통해, 관용을 허락하기보다 차라리 그 대상을 제거해야 지탱되는 믿음과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대해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한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150쪽)

이 소설을 읽으며 ‘그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차라리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나?’ ‘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나?’ ‘성소수자, 동성애자들이 과연 그런 사람인가?’ 질문해본다. 어쩌면 많은 교회는 이미 그러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신앙이라 가르치기로 합의한 것 같다.

 

개신교는 동성애 문제에 가장 관심이 많은 종교이고,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가장 열심히 반대하는 집단이다. 이렇게 동성애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한국교회가 정작 하지 않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교회 안에도 성소수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소설이 대신해준다. “이 소설은 제 상상이 아니에요.” 위에서 소개한 세 소설 중 한 편을 쓰신 작가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다. 기도 열심히 하는 독실한 권사님의 딸이, 보수적인 목사님의 아들이 성소수자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자란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그 사람일 수 있다. ‘없지 않고, 있다.’ 이걸 인정하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고, 기독교에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가르침과 경험과 공통분모가 있다.

성소수자 청년에게 “왜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교회를 다니냐?” 물어본 적이 있다. 청년이 대답했다. “안 믿어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청년의 대답을 듣고 “네가 나보다 믿음이 더 좋구나” 했다. 괴로움과 갈등 중에도 교회에 남아있는 청년이 있고, 그 믿음은 내가 짐작도 못 할 만큼 크고 깊다. 나보다 믿음 좋은 그 청년이 부모님과 함께 계속 교회를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교회를 다니더라도 가끔 찾아와 하소연이라도 해주면 고맙겠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