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애’ 공간은 없다 — 장애인 접근성에 대하여
[416호 무브먼트 투게더]
접근이나 통합 자체만을 위한 접근성이라면 꼭 해방적이지는 않지만 사랑, 정의, 연결, 공동체에 복무하는 접근성이라면 해방적이며 변혁의 힘을 가지고 있다. —미아 밍거스(앨리스 웡, 김승진 옮김, 《미래에서 날아온 회고록》(오월의봄), 147쪽)
몇 해 전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2022년 2월-2023년 4월)라는 연재를 진행한 바 있다. 선천성 진행형 근육병 베커근이영양증을 가진 경증 지체장애인으로서 내 삶을 장애 이론과 이야기로 풀어낸 글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격려받았지만, 가장 실질적인 것은 사무실 접근성의 변화였다.1) 가톨릭 신자로, 10년 넘게 복음과상황 사무실이 세 들어있는 곳의 건물주가 글을 읽고, 입구에 낮은 계단 하나와 안전 손잡이를 설치해줬기 때문이다.
그전에 건물 입구 쪽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휴대용 경사로가 깔려있었다. 내가 이용하기에는 각도가 높았다. 건물 앞쪽이 야트막한 경사라서, 낮은 각도의 긴 경사로를 설치하기에도 애매했다. 그 휴대용 경사로를 이용한 적은 별로 없었다. 왼편의 석재기둥이나 오른편의 소화전 도구함을 손으로 짚어 무게를 실은 후에, 아슬아슬하게 턱을 오르곤 했다.
나는 다리 힘이 약해 항상 낙상을 조심하면서 천천히 다닌다. 컨디션에 따라 지팡이나 지팡이 대용 장우산을 챙긴다. 내 질환이 몸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근육병인 탓에, 이마저도 이용하고 나면 팔이 아플 때가 종종 있어서, 없이 다닐 때도 많다. 평지가 아니라면 다리가 불편하거나 근육통이 찾아오기에, 때로는 법적 기준을 통과한 경사로도 걷기가 힘들다. 난간이나 핸드레일, 안전 손잡이의 존재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사무실 건물의 입구를 기준 삼으면, 내게는 지금의 방법이 경사로 설치보다 접근성이 더 좋아지는 결과를 낳는다. 단지 한 칸짜리 계단에 살짝 한 발을 올리고 손잡이에 힘을 실으면 그만이니까. 무리하는 일 없이 한 번에 턱을 오를 수 있다. 손잡이와 계단에 의지하면 내려가기도 쉽다. 나로서는 높은 턱에서 한 번에 내려오면 발목을 삐끗하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다.
꽤 많은 장애인이 그렇듯, 나 역시 적응과 체념, 망설임을 오랜 습관이자 삶의 기본 태도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인지 건물주가 급작스럽게 나를 불렀을 때 당황스러운 마음이 먼저였다. 그는 이대로 휴대용 경사로를 이용하면 눈·비가 왔을 때 미끄러질 위험이 크다면서, 손잡이와 계단 설치에 관한 의사를 물어왔다. 그 후 나를 다시 부르더니, 계단과 안전 손잡이 위치와 높이를 내 몸에 맞추어 정해달라 요청했고, 현재에 이르렀다.
하루는, 나 말고도 계단과 손잡이가 유용한 사람이 있을지 입구에서 관찰해본 적이 있다. 비장애인들은, 있지만 없는 듯 지나다녔다. 보행에 있어 나와 유사한 정도의 어려움이 있다면 유용할 수 있겠지만,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의미가 없거나, 시각장애인에게는 불필요한 장애물일 수 있다. 다만 내게는 결정적 변화였고, 아슬아슬 입구를 오르며 문득문득 낙상을 걱정하던 시절에 비하면 삶의 질은 확연히 나아졌다.
공간 전체를 재구성할 여건이 안 된다면, 실상 이 과정이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는 현실적 방안의 처음이자 끝이다. 인간은 매일의 삶에서 나름의 역사를 지닌 몸과, 그날 맞닥뜨리는 공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고유한 작업을 해내는 낱낱의 존재이다. 이 고유한 작업은 장애인에게서 섬세하고 예민하게 다루어지며, 장애 유형에 따라 한 공간에서 서로 충돌을 빚기도 한다.2)
접근성을 위한 실천은 모종의 규칙들로 정리할 수 없는,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처럼 ‘육성’되는 기술이다. 또한 이 기술은 혼자서 일정한 루틴과 범례에 맞춰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통달할 수 없다. 구체적인 개개인과의 만남을 통해 각각의 개별적인 접근성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지 경험을 쌓고, 그 각각의 다른 경험을 상호 연결하고 통합해야 탁월함에 접근할 수 있다. … 이 기술은 우리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고 지속하는 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기예의 바탕이 된다. (김원영,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문학동네), 297쪽.)
개별적 접근성 확보는 특정 유형의 장애인이 각각의 공간과 만나면서 축적하고 체화한 서사에 따라 달라진다. 개별적 접근성에 관한 나의 사례를 몇 가지 언급한 뒤에, 교회 내 장애인 접근성 개선을 위한 논의를 이어갈까 한다. 접근성 개선을 이루어내는 노력의 과정은 ‘내가 아는 한 사람’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할 수 있으며,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실행하는 태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특정 공간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곳이 내게 열려있는 장소인지 닫혀있는 장소인지 판단하는 데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낯선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파악하는 정보는 대체로 남자 화장실 위치와 그곳까지의 동선이다. 계단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등, 확실한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자리를 뜬다. 피치 못하게 그 장소를 이용해야만 할 때는 어쩔 수 없다. 수분 섭취량을 줄이거나, 최대한 짧게 머물 뿐.
다른 사례로, 교회 수련회 때문에 고창의 어느 유스호스텔에 숙박한 적이 있다. 침대 없는 방에 머물다가, 결국 방을 바꾸게 되었다. 나는 전신의 근육이 약해진 탓에, 맨바닥에서 아무것도 없이 혼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일어나려다 진이 다 빠지고 만다. 병이 진행되면서 아킬레스건이 짧아지고 허벅지에 힘이 없어져서, 무릎을 뒤젖히지 못하면 체중을 지지하지 못해 곧바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손으로 무릎을 짚고 다리를 세운 상태에서 등을 곧추세우고 똑바로 일어나려면, 중간에 힘을 줄 만한 적당한 높이의 지지대를 짚어야만 한다.
처음 배정받은 방에는 작은 냉장고 외에 가구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냉장고 높이는 지지대로 사용하기에 낮았고, 옷장은 내장형이라 쓸모가 없었다. 벽을 겨우겨우 짚다가 레버핸들 형태의 화장실 문고리를 이용해 몸을 일으키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문고리가 고정돼있지 않으니, 이 작업은 불안정했다.
담당자가 숙소를 잡으면서 엘리베이터 유무와 동선은 세심하게 파악했지만, 내 몸에 맞춤한 내부 공간의 디테일은 확인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내가 어딘가에 갈 때는 사전 조사가 필수다. 무리해서 며칠 내내 드러눕지 않으려면 말이다.
나는 목적지가 정해지면, 로드뷰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미리 알아본다. 동선, 평지 여부, 엘리베이터·경사로 유무, 내부 구조, 화장실 등. 일례로 영화관에 방문할 경우, 위에서 내려가는 형태의 상영관인지를 블로그 사진을 통해 확인한 뒤에야, 맨 뒷자리나 한 칸 앞에 좌석을 예매한다. 이동을 계획하는 삶에 익숙해지다 보니, ‘휠체어 이용 장애인의 MBTI가 ‘J’로 끝나는 이유’(〈시사IN 919호〉)라는 기사 제목이 내게는 농담이 아니다. 지체장애인이 J(Judging, 판단형/계획형)일 가능성이 높게 설계된 세상이라는 것. 참고로 내 MBTI는 ISTJ다.
세상 속에서 나와 같은 존재로 살다 보면 계획을 세우는 일이 어느새 일종의 반사작용 또는 자동화된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다못해 물 한 컵을 마시는 일일지라도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관해 세세히 살펴보거나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 문 앞에 계단이 있는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미리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얀 그루에, 손화수 옮김, 《우리의 사이와 차이》(아르테), 163쪽.)
나는 국가에 등록된 경증 지체장애인이지만, 나의 현실과 교차하는 개별적 접근성을 모든 지체장애인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나는 퇴행성 장애를 갖고 있어서, 후천적 사고로 고정적 손상을 입은 사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꽤 많은 지점에서 겹칠 가능성은 있겠지만 말이다. 특정 유형에 속한 장애인을 한 덩어리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휠체어 장애인을 보면, 그가 아예 걸을 수 없겠거니 짐작하는 경향이 있는데, 걸을 수 있으나 이동이 힘들어서 이용하는 사례도 잦다. 누군가가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장면은 의외로 드물지 않다.
비장애인 관점에서는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면 걸어야 한다는 관념이 중요시되기에, 적지 않은 장애인이 재활을 통해 어떻게든 무리해서 걸어보려 애쓴다. 이 시도가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사례도 있겠지만, 나는 비용과 시간을 허비한 끝에 전동휠체어를 선택해서 이동의 자유를 맛본 장애인 이야기를 더 자주 접했다. 실제로 나와 같은 장애를 지닌 큰외삼촌이 나에게 권한 이동 수단이기도 하다.
장애를 가진 한 개인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 중 하나는, 그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겠다고 미리 판단하지 않는 데 있다. 당사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알아가야 하는 지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믿어줘야 한다. 비장애인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상정할 때 아예 안 보이거나 전혀 안 들리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 않다. 각각 전체의 10퍼센트 정도로 추산한다. 점자와 수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비율도 비슷하다.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는 편이 현실에 가깝다.3)
청각장애인의 경우, 저시력 장애인 관점에서 오히려 이중고를 토로하기도 한다. 열심히 읽어도 놓치는 정보가 생기거나,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사례에 비해 생활상 어려움이 적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20대 전반까지 약시인으로 지낸 경험이 있는 전맹인(全盲人) 장애학 연구자 쿠라모토 토모아키는 오히려 약시가 있던 경증장애인 시절이 더 곤혹스러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흰 지팡이 없이도 전철역을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안경을 써도 발매기 요금표를 전혀 읽을 수 없었고, 도움을 청해도 주변에서 ‘안 보이는 척한다고’ 오해하거나 이해받지 못한 것이다.4)
농인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국수화언어가 한국어와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독자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해 발생하는 오해도 있다. 수어는 몸과 손, 얼굴의 움직임을 통해 전체적·통합적으로 발화한다. 아무 준비 없이 무턱대고 마련한 수어 통역과 충분한 사전 논의 작업을 거친 수어 통역 사이에는 퀄리티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면 한국어에도 서툴 수 있어, 문자 통역을 하거나 한글 자료를 건네줄 때 쉬운 표현을 지향해야 한다.
아래는 한국의 장애 유형 15가지를 고려한 접근성 체크리스트다.
그러나 아무리 법적 기준에 따르거나, 가이드라인 혹은 체크리스트를 마련해서 그대로 지킨다고 하더라도, 단언컨대, 완전무결한 무장애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물리적 측면만 따졌을 때 접근성이 충돌하는 상황은 반드시 있다. 말하자면, 시각장애인의 이동을 돕기 위해 마련한 경계석이 지체장애인에게는 장애물일 수 있다. 점자블록은 지체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의 이동에 불편을 초래할 수 있어서, 공간이 넓다면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이 드나드는 출입구와 동선을 의도적으로 달리 구성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모두’가 접근가능한 공간 만들기는 불가능한 도전이다. 오히려 청각장애인을 전적으로 고려한 ‘데프스페이스’(DeafSpace)라든지, 공간 크기(청각)와 바닥·벽지의 질감(촉각)과 식물 배치(후각)로 장소의 차이를 자각하도록 설계한 ‘시각장애인 학교’처럼 특정 장애인에게 특화된 장소가 유의미할 수도 있다.5) 접근성을 위한 공간은 일정 부분 실용적 차원에서 타협하거나, 특정한 목적에 맞게 조율한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렇기에 접근성을 유기적·입체적으로 인식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사회학자 존 어리는 《모빌리티》(아카넷)에서 ‘접근성’을 ‘경제성’(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있는가) ‘물리성’(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가) ‘조직성’(제도·설비·서비스 체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시간성’(시간적 조건에서 접근이 가능한가),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344-351쪽). 이 네 가지 기준을 적용하면, 앞서 언급한 나의 접근성 사례는 물리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장애인이기에, 월세방이나 전셋집을 구할 때마다 접근성이라는 현실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깨닫고는 한다.
각각 나름의 역사적 배경 아래 접근성 용어로 자리매김해온 ‘배리어프리’(Barrier-Free, 무장애) ‘유니버설디자인’(Universal-Design, 보편적 설계) ‘인클루시브디자인’(Inclusive-Design, 포용적 설계)과 더불어, ‘배리어컨셔스’6) 개념을 환기하는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에 주목해도 좋겠다. 배리어프리를 표방하는 공간에서조차도 장벽이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접근성 개선 활동에 임할 때 장애인 친화적 공간을 현실에 맞게 마련해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2010년대에 국내 공연예술계 일부에서 이어진 접근성을 향한 관심은 현재 국내 문화예술계의 주요 의제로 급부상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홈페이지에 가면 접근성에 관한 앞선 논의 및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배리어컨셔스’라는 개념이 일깨워주듯이, 교회 내 장애인 접근성 개선이 신식 예배당을 갖춘 자립교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 물리적 측면을 강조해서 비용의 문제로만 생각하면, 특정 기준을 충족할 만한 여력이 없는 예배당(상가 교회라든지)을 이용하는 교회는 접근성을 향한 관심의 끈을 놓아버릴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장애인 접근성의 몇 가지 물리적 기준을 충족해서 설계를 끝마친 예배당을 갖춘 교회는, 사회·문화적 측면의 장애 억압이 존재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위험성이 있다. 장애인에게 충분히 친화적으로 공간을 설계했다는 명목으로, 접근성 개선을 위한 논의를 이어가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다.
교회의 접근성 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내놓은 〈2022년 문화시설 장애인 접근성 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 고객 접근성’에서 가장 개선할 지점은 ‘정서적/태도적 접근성’(77점, ‘물리적 접근성’은 62.5점)이었다. 교회 현실이 이보다 더 나을까? 개인적으로 교회가 비장애인 중심의 성경 해석(장애은유·믿음-치유 공식의 도식화), 선교 방식(장애인부서·특수목회·기관목회), 예배 및 프로그램 운영(장애인 참여 배제 등)을 고수하는 이상, ‘정서적/태도적 접근성’에 있어서 취약한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요컨대, 접근성의 문제는 교회가 예수님처럼, 장애인과의 진지한 관계를 건설해나갈 용의가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접근성을 유기적·입체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물리적으로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 교회라도 장애 인식 개선 활동부터 할 수 있으리라. 구체적 대안으로는 세 가지를 언급해보려 한다.
첫째, 장애 인식 개선 교육 정례화이다. 장애 인식 개선은 강사를 직접 찾아서 부를 수도 있고, 교회·소그룹 차원에서 장애 관련 서적을 읽는 모임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장애 관련 전시나 연극을 관람하는 시도도 하나의 방법이다.
둘째, 장애인주일 활성화이다. 몇몇 주요 교단은 매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전후해서 ‘장애인주일’을 지키고 있다. 교단 차원의 행사 및 활동에 참여하거나, 교회 차원에서 통합예배 혹은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방법이다. 1년 중 하루라도.
셋째, 접근성위원회 설치이다.7) 문화예술계에는 접근성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접근성매니저가 소수 존재한다. 접근성을 안내하고, 접근성을 고려한 공연이나 전시를 기획하고 조율하고 콘텐츠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차용할 수 있다고 본다. 위원회/담당자를 통해 교회의 웹접근성과 예배당 접근성을 점검하거나, 접근성 현황을 안내할 수 있다. (단순한 건축헌금이 아니라) 접근성 개선을 위한 헌금이나 몸이 불편한 교인을 위한 이동지원금을 모으고 관리할 수 있다. 현재 교회 구성원 개개인의 공간적 필요를 귀담아들으며 작은 것부터 개선해나가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접근성의 변화는 언젠가 장애인이 예배당에 찾아올 수 있음을 상상하고 인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비용이나 환경의 제약이 있으면, 한 번의 시도로 많은 성취를 이루기는 힘들다. 연속되는 과정이라는 인식 아래, 할 수 있는 만큼 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비용의 문제 이전에 인식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 이전에 태도와 자세의 문제이다. 고민하지 않으면 달라질 수 없다. 장애인을 우리 곁의 존재로 받아들인다면, 함께 걸어가기 위한 공간을 준비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접근성은 “급진적인 사랑”이자, “장애를 다르게 사유하고자 하는 열망”이다.8)
1)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펴낸 《문화시설별 접근성 가이드 - 총론》에 따르면, 영어 표현에서 ‘접근성’(Access)은 ‘접근가능성’(Accessibility)과 혼용된다. 접근가능성은 물리적 차원에서 특정 장소나 무언가를 이용하기 쉽게 하는 일과 관련 있으며, 접근성은 이 의미와 더불어, 접근성에 얽힌 대상(주체)이 지닌 개별 특성(장애·인종·젠더 등)을 향한 존중을 포함한다. 이 책은 ‘물리적/감각적 접근성’ ‘콘텐츠/서비스 접근성’ ‘사회/문화적 접근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고 본다.
2) 장애학자들은 ‘장애인’(disability)이라는 범주를 근대 자본주의 전환기에 생겨난 개념이라고 본다. 산업 도시의 일터에서 ‘일할 수 없는 몸’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 이전 시대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 ‘환각을 경험하는 사람’ 등은 하나의 범주가 아닌 전혀 다른 존재들로 인식되었다. 2022년 3월호 ‘장애와 신앙의 교차로에서’ 참조.
3) 장근영·이성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 예술 현장의 배리어프리 리얼타임》(1도씨와온도들), 255쪽.
4) 같은 책, 254쪽. 쿠라모토 토모아키, 김은진 옮김, 《보통이 뭔데?》(한울림스페셜), 70-75쪽.
5) 미션잇 편집부,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 04 - 안전 Safety》(MSV), 34-39쪽, 12-21쪽.
6) 신재, ‘우리 사이에 있지만 없는 것들 - 0set프로젝트의 배리어프리에 관한 질문들’, 〈온라인 이음〉(2019.12.17.)에서 재인용.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 문턱을 없애는 것을 배리어프리(barrier-free)라고 부르지만 눈에 보이는 배리어를 없앤 곳에도 여전히 배리어가 있습니다. 있음에도 없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배리어를 인식하고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 — 법인 탄포포노이에[민들레의 집] 편저, 오하나 역 〈소셜아트 - 장애가 있는 이와 예술로서 사회를 바꾸다〉 미쓰시마 다카유키의 인터뷰 중.
7) 배융호, 〈교회와 접근성 - 모두를 위한 장애물이 없는 교회 만들기〉,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도농사회처 장애인복지선교협의회 엮음, 《교회와 장애인식 개선》(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도 ‘교회 내 접근성 정도 파악’ ‘단기·중기·장기 계획을 통한 접근성 보완’ ‘항상 접근성 우선 고려’에 이어, 네 번째로 언급하는 대안이다. “교회 내의 장애인 성도를 포함하여 건축, 목회자 등이 함께하는 접근성 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개선해 나간다.”(147쪽)
8) 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전혜은·제이 옮김, 《가장 느린 정의》(오월의봄), 144쪽. 엘리슨 케이퍼, 이명훈 옮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오월의봄), 382쪽.
※위의 글은 5월 29일 강원도 원주에 있는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IVF(한국기독학생회)가 주관한 행사 ‘교회의 문턱, 모두에게 낮지 않습니다’의 강연을 준비하면서 정리한 자료를 기초로 쓴 것이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IVF가 속한 원주 IVF는 이에 앞서 “장애인은 교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라는 주제로, ‘교회 내 장애인 접근성과 관련 시설을 직접 조사하고 각자의 인식을 나누는 소그룹 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이 강연과 활동은 모두 사회선교를 담당하는 학생 리더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결과물이었다(매해 사회선교 영역을 선정해서 다룬다고 한다. 올해는 ‘장애 인권’이었다). 그동안 장애인 접근성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었으나, 강연 요청이 없었다면 416호에 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선교 담당자의 활동은, 글 말미에 제시한 대안 중 ‘접근성 문제’를 다루는 위원회/담당자가 존재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도 언급할 수 있겠다. 원주 IVF가 사회선교 담당자를 정해서 관련 활동을 진행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실제로 교회에서 접근성 개선을 시도하고자 할 때 추가로 참고할 만한 콘텐츠에 관한 내용을 아래에 덧붙인다.
먼저 내가 본지 381호에 쓴 ‘교회가 규정하는 ‘보통의 몸’에 대하여’(2022년 8월)도 교회 내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다룬다. 위의 글과 겹치는 내용이 있으나, 예배와 신학에 관한 부분을 일부 언급한다.
접근성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의 건물과 시설을 직접 조사해 개선 방안을 제시한 연구와 기획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2025년 7월 1일 현재). 조사 대상이나 통계를 내고 분석하는 방식, 도출한 결론 등에 있어서 한계점이 있지만, 장애인 접근성 논의가 거의 없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유의미한 자료들이다.
1. 이종희, 〈장애인 및 노약자를 고려한 교회 본당 시설의 환경 개선 방안〉, 《한국디자인문화학회지 Vol. 15 No. 1》(2009)
2. 이종희·마은주, 〈장애인 및 고령자를 고려한 교회건축 편의시설 개선방안〉, 《디자인학연구 Vol. 23 No. 1》(2010)
3. 곽호철 외 12인, 《한국 교회 건축에는 공공성이 있는가》(동연, 2017)
4. 무지개신학교×뉴스앤조이, ‘교회의 문턱’(2024.6.28.-2024.9.4.)
이종희의 논문(2009)과 이종희·마은주의 논문(2010)은 단일 건물을 보유한 출석 교인 500명 이상인 중형·대형 교회의 장애인·고령자 편의시설을 직접 조사한 결과물이다. 각각 38개 교회(서울 22곳, 수도권 16곳), 42개 교회(서울 25곳, 수도권 17곳)를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등편의법)과 ‘서울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매뉴얼 2006’에 근거해서 만든 평가항목 43개(이종희)와 체크리스트 70개(이종희·마은주)를 적용해서 실태와 인식을 분석·평가했다.
《한국 교회 건축에는 공공성이 있는가》는 물리적 공공성(개방성·접근성·쾌적성·관계성·장소성), 신학적 공공성(포용성·환대성·규모적합성·평등성·교육성·거룩성)을 지표화해서 대형·초대형 교회 10개를 분석한 논문을 묶은 책이다. 책에 실린 논문 중 김정두의 ‘교회 건축의 포용성과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에 관한 연구’가 장애인 접근성 문제를 심화해서 살피고 있다.
‘교회의 문턱’은 ‘장애인등편의법’을 반영해서 제작한 교회용 체크리스트 10개를 토대로,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교회 예배당 114개의 편의시설의 배리어프리 현황을 직접 조사했다. 현시점을 기준으로 〈뉴스앤조이〉 홈페이지에 올라간 기획 기사는 총 13편이며, 제한 없이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교회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지만, 접근성의 다양한 측면을 심화해서 살피기에 좋은 콘텐츠로는 미션잇에서 내놓은 단행본 ‘MSV 소셜임팩트 시리즈’가 있다(현재 6권 출간, 7권 준비 중). 관심이 있다면 MSV 뉴스레터 구독을 추천한다. MSV 홈페이지에는 133편의 뉴스레터 콘텐츠가 올라와있다.
최근 LG전자와 스토리소사이어티는 접근성 매거진 〈BOLD MOVE〉를 창간하기도 했다. 창간호를 일부 독립서점이나 교보문고(ebook)에서 구입할 수 있다(현재 ebook은 교보문고 단독 선공개이며, 앞으로 판매처를 확대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계의 접근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참고해서 적용하면 유익할 만한 콘텐츠로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내놓은 ‘문화시설별 접근성 가이드’(2024)가 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총론’ ‘공연시설’ ‘전시시설’ ‘예술교육’ 4권의 PDF 파일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 ‘2024 접근성 가이드 연계 포럼’ 내용이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있다.
문화인류학 연구자 안희제가 쓴 ‘우편-상처-응답’은 삶과 이론을 조합해 ‘접근성의 접근성’을 비평적으로 논하는 정교한 글이다. 2025년 5월 16일부터 7월 20일까지 진행되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의 전시 연계 웹 도록에 실려있어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해당 전시의 관람도 추천한다.
강동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