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호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2025-07-28     이승은·정민호


남이 아닌 자기 자신. (표준국어대사전)

오해받기 싫어서 자주 글을 썼다. 비록 타인은 나를 오해하더라도 스스로를 오해하기는 싫어서 한 일이었다. 일상 글쓰기로 채워나간 메모장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찌질한 면모까지도 내밀하게 담아내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스무 살 이후로 교회와 학교 동아리를 오가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하는 일이 잦아졌다. 낯선 공간에서의 일상, 서로에게 무지하면서 친구라 불리는 관계들…. 교인 등록까지 오래 걸리는 나들목교회(현 더불어함께교회)에 다니게 된 일도 한몫했다. 몇 달간 새얼결(‘새로운 얼굴들의 결’의 줄임말, 새신자반)에 머물면서 매주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야 했다. 몸담았던 IVF(한국기독학생회)도 학기와 수련회 때마다 ‘나는요’라는 자기소개를 진행했다.

나에 대해 발화하는 일을 반복하자 질문이 생겼다. ‘진짜 내가 그런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나의 ‘불일치’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대학교 3학년 코로나 시기 교내 방송국 국장을 맡으면서 나를 향한 질문이 날카로워졌다. 모두에게 낯선 상황에서 책임을 맡았지만, 무엇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어 자주 두렵고 외로웠다. 국원들과 일하면서 스스로의 감정을 자주 살폈다. 코로나로 친구 만날 일도 줄어들어 혼자서 시간을 채울 궁리를 했다. 시대의 기류를 타고 MBTI 검사를 했다. INTJ(전략가형)였다.

내가 내향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전까지 ENFJ(선도자형)를 추구하며 살아왔기에, ‘T’인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MBTI에 홀랑 빠져 온갖 분석 영상을 보며 깨닫은 바는… 내게 F는 사회적 가면이자, 사랑받고 싶어서 만들어놓은 이상향, ‘추구미’였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삶을 돌아보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서 왜 항상 두 가지 생각이 충돌했는지, 사람과의 만남이 왜 그리 힘에 부쳤는지, 왜 리더의 자리를 책임지기 싫었는지…. MBTI가 과학적 신뢰도·타당성 면에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나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유용한 도구였다.

나의 다각성을 인정하니, 나를 소개하는 일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모난 생각도 자주 했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이 짧은 시간 안에 나를 소개하라고…?’ 단편적으로 소개한 ‘나’를 누군가에게 판단받는 일이 힘들었고, 나를 적확하게 알리려고 애쓰는 일이 힘에 부쳤다. 새로운 그룹에서 해야 하는 자기소개를 생각하면, 새해가 안 왔으면 했다. 해마다 부지런히 찾아온 ‘오해받기 싫은 마음’은, 나조차도 다 품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그동안 파헤쳐온 불편의 조각을 모아보니, ‘나’는 특정 집단에 속해있을 때, 관계 안에서 고민할 때, 타인과 다른 나를 마주할 때 더욱 선명하게 감각되었다. 나라는 존재의 고유성을 알아가는 일은 다른 존재와 동행하는 매순간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타인과 서로를 인지하면 인지할수록 상대성과 고유성이 짙어진다는 깨달음은 ‘관계’와 ‘변화’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이끌었다.

나의 존재는 수많은 남의 보탬으로 구성되었음을 이제는 긍정한다. 가족, 친구, 연인, 선생님, 단골집 사장님, 경비 아저씨(?)….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마지못해 감내하면서 서로의 현재를 가까스로 견뎌준 덕에 나는 ‘나’로, 너는 ‘너’로 더 고유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쌓여 나를 소개하는 문장이 이전보다 간결해졌을 때, 비로소 나는 타인의 시선(더 정확히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타인 또한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라는 이해에서 오는 관대한 이타심도 싹을 틔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질문하는 이유는, 이전보다 명확해졌다고 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나를 헤아리기 위해서다. 어제는 좋았으나 오늘은 구리다고 느끼는 취향과 기호가 있고, 내일은 다시 좋아질 수도 있는 변덕스러움마저 포용하는 일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존중 같다. 꾸준하고 끈질기게 탐구한 사람에게서 길러지는 총명함이 ‘나다움’을 견고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몇 해 전부터는 나를 탐구하는 일이 나와 주변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길임을 체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신앙)마저 나를 충분히 이해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신앙은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나를 감당하기 위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 결국 인간은 ‘나를 아는 숙제’를 가장 먼저 풀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라는 숙제를 줄 때는, ‘답’보다 ‘풀이’ 과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실 것 같다. 정답을 찾을 수 없어 쩔쩔매는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은 언제나 버겁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나’를 지치지 않고 정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늘의 나를 애써 긍정하며, 찌질함과 결핍마저 얼싸안는 경험이 점차 흔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은, 어쩌면 부정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물으면,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왠지 두렵다. 학창 시절엔 1년에 한 번 그런 날이 있었다. 2학기 방학식. 떨리는 마음으로 생활기록부를 받았다. 학교가 일찍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는 기분 좋은 날이지만, 마냥 들뜨지는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쓴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 때문이었다. 1년 동안의 나에 대해 한 줄로 써놓은 그 칸이 그렇게 신경 쓰였다. 기분 좋은 의견도 종종 있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표현도 있었다. 그런 표현을 마주한 날엔 힐끔 보고서, 다른 애들은 못 보게 뒤집어두기도 했다. 뭐라 쓰였는지 서로 보자며 자신 있게 자기 생활기록부를 보여주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이유였을까. 매번 방학식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정말 그런가?’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모범적’이라는 말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해력이 뛰어나다’처럼 나도 동의하고 공감되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서, 오래된 자의식 중 하나가 된 것 같다. 다른 말들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떤 말을 보고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많은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쓰느라 힘드셨나 보다, 나에 대해 맞춤으로 쓰기가 힘드셨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 학생생활기록부를 다시 보니(2002년 이후 졸업자는 정부24에서 초·중·고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다), 그때보다 더 꼼꼼히 살피게 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평가가 다르다. 내가 매년 다른 모습이었을 수 있지만, 선생님마다 나에게서 보고 싶은 부분만 본 것은 아닐지.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선생님들 모습이 어렴풋 기억나는 것도 같다.

3학년 때 선생님은 내 마음을 보려 하셨다. 나도 선생님의 마음과 태도가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4학년 때 선생님에게는 부당한 일에 자기주장을 하는 내가 보였나 보다. 남다른 정의감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셨다. 5학년 때 선생님은 나더러 교우 관계가 좋은 학생이라 써주셨다. 반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좋아했던 선생님이었다. 자꾸만 선생님에 대한 인상이 ‘종합의견’과 맞물린다. 내게 써주신 말들이 다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는 게 신기하다. 자기를 투영해서 타인을 보기 때문일까.

애초에 ‘나’를 어떤 사람이라 단정 짓기는 힘들다.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나를 적극 소개하게 되는 공간이 있었다. 육군으로 입대한 나는 훈련소 수료 후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에 배치됐다. 더플백을 메고 행정실 앞을 서성이던 순간, 진공상태의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이곳의 모든 사람, 모든 것과 접점이 없는 상태.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광명에서 왔습니다”라고, “뭐 하다 왔냐”는 질문에 “대학 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특별할 것 없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셀 수 없이 반복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곳에서 생활하는 나날만큼 구구절절 길어졌다. 얘기할수록 극적 요소가 보강되고, 조금씩 과장도 더해졌다. 기준이 없는 곳이기에,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와 비교해줄 사람이 없는 곳이기에, 아무도 내 말을 확인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과거를 가진 사람으로 각색될 수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종종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자꾸만 나에 대한 사실을 최소한도로 이야기하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되리라는 생각도 있었고, 다들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맥락을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할 말이 있더라도 굳이 다 전하지 않는 배려를 했다. 때론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역할로 ‘나’를 수행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오롯이 혼자 있는 곳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아무런 시선도, 관계도 없는 곳에 있으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3년 전 안식월에 혼자 먼 나라 아이슬란드에 가서 그런 시간을 보냈다. 사람을 만날 일이 별로 없는 광활한 자연에 혼자 있게 된 순간, 감흥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적막이 더 크게 느껴졌다. ‘외롭다’ ‘보고 싶다’, 그곳에서 궁금한 건 오히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과장되기도, 축소되기도 하는 나의 존재감은 찾아나선다고 해서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다. 내 의지가 관여되지 않은 상황,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의 존재가 드러난다. 나의 존재는 눈치껏 상황에 맞춰서, 예의 바르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론 당혹스럽고 낯설어서, 저항감 때문에 ‘이게 나야’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순간이 곧 나의 경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좀 더 존중해달라는, 존재의 신호다.

나의 성향과 선택은 앞으로 내가 머물고 영향을 주고받을 상황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상황은 다시 ‘나’를 만들어간다. 다른 상황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잘 만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사건을 겪는다. 사건 이후,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그 변화가 극적일수록 더 매력적인,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나는 원래 이래’라는 나의 경계는 그렇게 넓어졌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변해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독자님은 ‘나’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독자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상단어집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내향인들의 속마음 토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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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은
본지 독자위원. 엄마에 의하면 자아가 건강한, 아빠에 의하면 생각을 잘 묘사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며 길러진 사회성 덕에 E(외향형)냐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최측근은 모두 내향인이란 사실을 긍정한다.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서 관찰하기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자주 글을 쓰게 됐고, 쓰다 보니 주어진 삶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매일 반복되는 자기 검열과 자기 긍정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4년 차 직장인.

정민호
본지 기자. 신비로운 일들은 가까운 곳,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고 믿는다. 개신교 월간지를 만들며 조심스레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