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는 왔는데 평화는 왜 아직도

[417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7-28     이한주

아모스 오즈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저명한 작가였다.  현대 히브리 문학의 아버지라 칭송받았던 그는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다. 아랍 국가들과의 공존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우파 시온주의 가문에서 자랐지만 생명과 평화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가 75세에 쓴 마지막 소설 《유다》(현대문학)도 이 문제를 다룬다.

《유다》의 시대 배경은 이스라엘-아랍 전쟁이 일어난 후 10년이 지난 1959년 겨울이다. 주인공 슈무엘 아쉬는 스물다섯의 대학원생으로 유대인으로서는 드물게 예수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유대교와 예수의 관계를 연구하는 논문은 진척이 없고, 부친의 사업 실패로 생활마저 어려워지자 학업을 그만둔다.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구하던 슈무엘은 장애인 노인의 말동무를 해주면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을 준다는 광고지를 보고 예루살렘 변두리에 있는 오래된 집을 찾아간다. 이곳에서 슈무엘은 게르숌 발드라는 거동이 불편한 70대 노인과 그의 며느리인 아탈리야 아브라바넬을 만난다.

원래 이 집은 게르숌 발드의 친구이자 아탈리아의 아버지인 쉐알티엘 아브라바넬, 아들이며 남편인 미카까지 네 명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참전했던 미카는 전사했고, 아랍과의 공존을 주장했던 쉐알티엘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외롭게 죽었다. 그 후 게르숌과 아탈리아는 세상과 단절하고 둘만 남겨진 집에 그들이 고용한 젊은이와 함께 살다 헤어지곤 했다. 슈무엘도 그런 젊은이 중에 한 명으로 온 것이다.

예수에게 관심이 있는 유대인 젊은이와 전쟁으로 아들과 남편을 잃은 노인과 과부를 통해 작가는 ‘실수와 욕망, 실패한 사랑과, 답 없이 남겨진 종교적 문제’를 이야기한다. 슈무엘과 발드가 대화하는 장면 중 발드가 종교가 가진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 유대인들이 권력과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이스라엘을 미워했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추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도들을 뒤쫓고 그들을 궤멸시킬 때까지 박해했을 걸세. 유대교와 기독교, 물론 이슬람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꿀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은 자기들 손에 수갑, 쇠창살, 지배권, 지하 고문실과 교수대가 없을 때뿐이지. 이런 모든 종교는, 지난 세기에 태어난 수많은 종교 중에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고 있는데, 모두 우리를 구원하러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피를 쏟게 만드는 것이라네. (103쪽)

발드는 한때 이스라엘이 아랍과 벌이는 전쟁을 신성한 전쟁이라 믿었던 애국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10년 전 전쟁에서 외아들을 잃은 후로는 그런 죽음에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약속과 세상의 회복을 믿지 않는다. 아탈리아 역시 남자들의 세계와 전쟁에 환멸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아랍인들은 날마다 패배자가 당하는 재앙을 살아야 하고 유대인들은 밤마다 보복을 당할까 봐 떨며 살아야 해요.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좋은가 보죠. 두 민족은 증오와 독에 잡아 먹힌 후 둘 다 복수와 정의라는 훈장을 달고 전쟁을 마쳤으니까요. 복수와 정의가 가득 차 흐르는 강물들이 됐죠. 그렇게 정의가 넘쳐나다 보니 온 땅이 묘지로 덮이고 가난한 마을들이 수백개씩 폐허가 되어 지워지고 사라져 갔어요. (278쪽)

슈무엘은 세상에 있는 힘을 모두 합한다고 해도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꿀 수는 없다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광신도를 온건한 사람으로, 복수하고 시비를 걸려는 사람을 친구로 바꾸는 일에 이스라엘의 생존이 달렸다 말한다. 공존을 거부하는 현대 이스라엘을 향한 작가의 호소다. 슈무엘은 유대 민족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상상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메시아가 오는 순간 온 땅에서 피 흘림이 그치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 대항하여 칼을 드는 일이 없어지며, 그들이 다시는 전쟁하는 법을 배우지 않게 된다고 성경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고 지적했지요. 그것들은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죠. 그렇지만 예수가 살던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각처에서 잠시라도 유혈 사태가 그친 적이 없어요. (171쪽)

구약의 하나님을 폭력적인 전쟁의 신이라 비판하는 이들에게, 신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변호하면서 그 증거로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신 예수님을 내세울 수 있다. 하지만 예수가 세상에 온 후로도 전쟁은 그친 적이 없다.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했던 이사야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평화도 함께 예언했다.

그런데 왜? 왜, 메시아는 왔는데 평화는 아직 세상에 오지 않는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은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니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유대인들이 성경에 더 충실한 것 아닌가? 예수를 좋아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유대인 슈무엘의 고민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손님》(창비)은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났던 학살 사건을 다룬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에서 집단 학살의 비극과 광기가 일어났다. 3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신천 학살 사건’은 황해도 지역에 일찍부터 뿌리를 내렸던 개신교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벌어진 사건이라서 더 특별하고 비극적이다.

소설은 미국에서 목회하는 류요섭 목사가 고향 방문단에 선정되어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 전개된다. 그의 품에는 고향 방문 며칠 전에 죽은 형 류요한 장로의 뼛조각이 있다. 류요한은 죽기 전에 용서를 구하라는 동생의 말에 크게 화를 냈었다.

내가 왜 용서를 빌어? 우린 십자군이댔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사탄의 무리들이다. 나는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구 놈들을 계시록의 짐승들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주께서 명하시면 나는 마귀들과 싸운다. (22쪽)

해방 직후 이들 형제의 고향인 황해도 지역에서는 새 조국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하려는 공산주의 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했고, 토지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권력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이 북으로 진격하자, 이번에는 탄압받았던 기독교 청년들이 세력을 잡아 공산주의에 협력했던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 학살 사건의 주역 류요한은 다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내와 아들을 두고 월남했다.

류요섭 목사는 북측의 주선으로 조카와 형수를 만난다. 다행히 그들은 외삼촌 안성만에게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북에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안성만은 그 시대의 비극을 회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전한다.

그때 우리는 양쪽이 모두 어렸다고 생각한다. 더 자라서 사람 사는 일은 좀 더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어야만 했다. 지상의 일은 역시 물질에 근거하여 땀 흘려 근로하고 그것을 베풀고 남과 나누어 누리는 일이며, 그것이 정의로워야 하늘에 떳떳한 신앙을 돌릴 수 있는 법이다. 야소교나 사회주의를 신학문이라고 받아 배운지 한 세대도 못 되어 서로가 열심당만 되어 있었지 예전부터 살아오던 사람살이의 일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176쪽)

신앙은 땀 흘려 일하고, 베풀고 나누는 것으로 정당해진다 믿는 안성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북에서도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해달라’ 매일매일 기도한다고 말하는데, 그에게 ‘우리 모두’는 종교와 이념으로 적이 되어 죽었던 자들뿐 아니라 분단 체제에서 고통받는 살아있는 자들 모두일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된다는 것은 사람 사는 일이 복잡하고 서로 이해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살이의 일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탈리아 작가 이냐치오 실로네의 소설 《빵과 포도주》(고래의고래) 배경은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1935년 이탈리아다. 사도행전부터 등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를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가 정당한 이유 없이 침략하는데, 가톨릭 사제들은 이 더러운 전쟁을 부추기고 승전을 기도하며 군인들을 축복했다. 보편적인 인류애뿐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에 대한 연민도 없다. 방관 가운데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로 에티오피아 군인 수만 명을 죽였다.

주인공 피에트로 스피나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혁명가인데 경찰 추적을 피해 ‘돈 파울로’라는 사제로 위장해 시골 마을로 숨어든다. 가짜 사제인 돈 파울로는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지만, 그에게 다른 사제들에게서 보지 못한 신성과 희망을 본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로 성찬을 베풀어주길 바란다. 소설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가짜 사제를 통해 진짜 성찬이란 무엇인지, 예수의 몸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삶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온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있을 때, 돈 파울로 신부는 밤마다 몰래 숯덩이를 들고 다니며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구호를 쓴다. 돈 파울로 신부가 가짜이고 밤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늙은 신부 돈 베네데토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뼈저린 고통을 겪을 때에는 스스로 이렇게 묻곤 했지. 신은 어디 있는가, 신은 왜 우리를 버리는가 하고 말일세. 새로운 학살을 알리는 확성기와 타종 소리는 분명 신이 아니었네. 우리가 날마다 신문에서 읽는 에티오피아 마을에 대한 포격과 폭격은 물론 신이 아냐, 하지만 적의로 가득 찬 동네의 어떤 가련한 사람 하나가 한밤중에 일어나 숯덩이나 페인트로 동네 담벼락에 ‘전쟁을 중단하라’는 구호를 쓴다면, 신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사람 뒤에 임재하고 계시네. 누군들 위태한 상황에 대한 그 사람의 분노와, 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 속에서 신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겠나? 그러니, 만약 어떤 미천한 노동자가 그런 이유로 해서 특별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는다면, 신이 어느 편에 서 계신가를 달리 따져볼 필요도 없지. (380-381쪽)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빵과 포도주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랑과 생명이 되는가? 이 질문에 작가는 하나님은 한밤중에 숯덩이로 ‘아프리카 독립 만세’라고 쓰면서 적국 에티오피아를 돕는 사람과 함께 있다고, 포도주는 전쟁을 축복하는 금빛 나는 사제단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누더기 입은 가짜 신부를 통해 진정한 성찬이 된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종교가 평화를 말하는 것은 권력과 무기를 갖기 전까지다. 작고 약했을 때 평화를 주장하던 종교가 추종자를 거느리고 힘을 얻으면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와 전쟁을 부추기는 일을 자주 보았다.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기드온의 전차’ ‘일어서는 사자’라는 말을 성경에서 가져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을 죽이고 이란을 공격하는 작전 명칭으로 쓴다. 기독교는 신의 이름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한반도의 개신교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는 평화보다 전쟁에 더 유용한 것 같고, 평화를 구하는 기도보다 전쟁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기도가 더 우렁차다.

메시아는 왔는데 왜 평화는 오지 않는지 질문하다가, 우리에게 왔던 그 메시아가 예루살렘을 보고 울며 탄식했던 일이 생각났다(눅 19:41-42). 십자가에서 울지 않았던 메시아는 평화에 관한 일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평화에 눈을 감은 사람들 때문에 울며 탄식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는 예수님은 평화가 메시아의 업적이 아니라 땅에서 눈물로 함께 만들어갈 인간의 사명이라고 알려준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며 ‘복이 있다’ 하셨던 예수님은 이 땅의 전쟁과 폭력, 증오와 학살에 눈감지 말고 평화에 관한 일을 배우고, 전하고 그 길을 걸어가라고 눈물로 당부하셨다. 메시아가 왔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전쟁이 있다. 하지만 메시아를 믿고 울며 평화를 찾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 이미 오셨던 메시아의 얼굴을 본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