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없이 아바 찾아

[417호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

2025-07-28     김기현

1

아.버.지.가 죽었다. 나도 죽었다. 어머니는 졸지에 과부가 되었고, 다섯 남매는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유리, 방랑하는 나그네가 되었다. 성경에서 가장 불쌍하고 돌봄이 필요한 일차 대상이 저들이 아닌가. 하나님은 과부의 남편(사 54:4-5)이고, 고아의 아버지(시 68:5)이고, 나그네의 보호자(신 10:18-19)이다. 나는 지상의 아비를 잃고, 천상의 아바를 만났다. 그리고 아바의 자녀로 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내가 중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1월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후반부터 줄곧 투병 생활을 하셨다. 간경화였는데, 지금이라면 충분히 고칠 병이었는데, 1970년대 말이라 치료하지 못했다. 정말 열심히 사셨다. 5학년 말께인가? 날 공터로 데리고 가더니 여기에 우리 집을 지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얼마나 뿌듯하셨을까?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번듯한 집을 짓고 얼마 살지 못하시고 내내 병원을 전전하셨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친형의 손에 이끌려 처음 교회에 발을 디뎠다. 아홉 살 차이 나는 큰형은 아버지만큼이나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니 자의가 아니라 끌려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언덕 위,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침례교회 예배당이었다. 예배 시간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 풍금에 맞춰 부르는 처연한 찬송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겨울이면 난롯가에 둘러서서 신앙에 관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추억처럼 예쁜 풍경이었다. 푸근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바로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러나 몇 달 뒤, 형의 군 입대를 기점으로 발길을 끊었다. 아버지의 병은 갈수록 악화하는 듯했다. 가세는 기울어갔다.

그즈음에 나도 모르게 교회를 찾았다. 교회 앞에서 몇 번을 돌아섰는지 모르겠다. 예배당 문 앞에서도 차마 열지 못하고 한참 서있었다. 내가 열고 들어간 것일까, 안에서 열고 나온 걸까? 둘러앉아 담소 중이던 선생님들과 형, 누나들이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때부터 내 발로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교회로 향했고, 등굣길과 하굣길엔 어김없이 교회에 들러 기도했다. 밤에는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공부했다. 한 해 열 명이 넘는 이를 교회로 이끌었다.

나의 종교적 열정은 갈수록 강화되었다. 중학교 2학년, 새해가 막 시작되었을 때, 담임목사님은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설교를 하셨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까지 공식 설날은 신정이라고 해서 새해 첫날이었다. 세배와 차례를 지내는데,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목사님의 설교인데 문자 그대로 순종했다. 집 안 곳곳에 붙어있던 부적을 모조리 떼어냈고, 차례를 지낼 때는 절하지 않았다. 그냥 버티고 서있었다. 말 그대로 첫 번째 계명이고 최고의 계명이 아닌가. 오직 순종할 일이다.

예배를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느라 수요 예배에 한 번 빠졌을 뿐이다.

2

아버지가 떠난 뒤, 우리는 집 없는 떠돌이가 되었다. 한 해에도 예닐곱 번씩 이삿짐을 쌌다. 형은 군 복무 중이고, 큰누나는 공장에서 일하고, 중학교에서 내내 전교 1-2등을 다투던 작은누나는 대구에서 여고를 다녔고, 아직 전학이 되지 않았다. 집에는 중학교 3학년이던 나와 초등학교 6학년 여동생만 남았다. 그래서 아주 멋진 집과 많은 짐을 버리고,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한여름 밤, 체육복 바지에 러닝셔츠를 입은 키 작은 까까머리의 나는 엄마를 대신해 손수레를 끌고 야반도주하듯 이사를 했다.

한 군데는 내 신앙 때문에 내쫓기기도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언제부턴가 머리가 아픈데 약을 먹어도 낫질 않아서 점쟁이에게 물은 모양이다. 점쟁이는 셋방에 예수 믿는 아들이 있어 병이 낫지 않는다고 했다. 귀신이 귀신같이 내 신앙을 본 거다. 그리하여 내가 처음 만난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신 제1계명의 하나님이었다.

3

돌이켜보니, 내가 무심코 절하고 있던 또 하나의 우상이 있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누군가 우렁차게 선창하면, 거수경례도 하고,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곤 했다. 그러면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로 마치는 맹세문이 낭독되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인 양 충성을 다짐하고 예를 표하는 것이 우상숭배로 보였다. 그래서 부동의 차렷 자세만 취했다.

그걸 담임선생님이 알고 교무실로 불렀다. 체육 교사이셨는데, 체격이 다부졌다. 처음엔 타이르던 선생님은 내가 끝내 설득되지 않자, 주먹과 발을 날렸다. 담임목사님은 난감한 눈치였다. 그저 조심스럽게 ‘괜찮다’ 할 뿐이었다. 나는 갸우뚱하면서도 목사님 말씀이니 당연히 따랐다.

훗날 알게 되었다. 나처럼 신앙의 이유로 경례를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학교 수십 명이 퇴학을 당하면서까지 국기에 절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며 거부한 사건이 경기도에서 연달아 발생했다. 일명 ‘파주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학생 국기 배례 거부 사건’(1947년)과 ‘고양 지도국민학교 학생 국기 배례 거부 사건’(1948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1950년, 강원도 공근국민학교 학생들의 국기 배례 거부에 연루된 안중섭 전도사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투옥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간헐적으로 같은 사건이 반복되었다. 1973년 김해여고의 고신 소속 학생 다섯 명이 국기 경례를 거부했고, 결국 퇴학 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충북 제천의 한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와 전도사가 국기 경례 거부를 권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특이하게도 재판부는 ‘국기를 모독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들은 국가주의니 민족지상주의이니 반공이네 하는 것들에 일절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스트가 아니었다. 그저 진실한 신자였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을 철두철미하게 순종했을 뿐이다. 그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았다.

이쯤에서 나의 광기 어린 신앙 이야기를 더 고백한다. 아버지는 갈수록 위중하고, 처음엔 모른 척하던 어머니는 점차 잔소리가 심해지더니 급기야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박해하셨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어머니를 못살게 굴던 때였다. 아버지가 친한 벗의 보증 선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모든 빚을 몽땅 떠안았다. 어머니는 그저 울기만 하셨다. 한 집안에 두 신(神)을 믿어 아버지가 아프다며, 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다. 성경책도 찢고, 예배 마치고 늦게 가면 아예 못 들어오도록 문을 잠갔다.

나는 참다못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약간의 손찌검을 참다가 그만 부엌으로 달려갔다. 부엌칼을 집어 들고, 어머니와 누이들 앞에 내려놓으며 소리 질렀다. “날 죽이든지, 예수를 믿게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하세요!” 그날 이후로 박해가 사라졌다. 훗날 내가 목사가 되어 교회에 함께 가자 했을 때, 어머니는 그 일을 꺼내셨다. 그래서 교회를 안 다니겠다고. 내 무모한 열정이 오히려 어머니의 마음을 틀어막고 있었던 거다.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이 폭력적 열심의 기억은, 훗날 신학을 공부하며 사도 바울을 읽는 중요한 창이 되어주었다.

4

폭력적 열정은 얼마나 위험한가? 내 연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지금 나는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 나타난 폭력 문제를 살피고 있다. 신약학자들은 다메섹 체험(Damascus Experience)이라고 한다. 스데반을 투석형으로 죽이는 것에 찬동했던 바울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일당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일에 광분한다. 그는 국경을 넘어 다메섹(현 다마스쿠스)으로 가며, 그곳의 예수 추종자들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었다.

다메섹 가는 도중에 예수를 만나서 개종(Conversion) 혹은 하늘의 부름, 곧 소명(calling)을 받는다. 개종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회심을 의미하고, 소명은 기존의 유대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음을 인정하며, 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넘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내가 보기에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전이’(paradigm shift) 개념에 가까운 전환이었다. 즉,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하고 있었을 뿐인데, 사실은 그대로인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관점이 바뀌자 전혀 새로운 세계로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구약의 하나님과 율법을 담았던 옛 패러다임을 벗고, 새 프레임을 장착하자 과거에 알던 것들이 재해석되면서 본래의 의미가 풍성해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다메섹에서 신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등 신학의 전 영역에서 전복적 변화를 경험했다.

평화주의 연구자인 내가 보기에 나의 폭력적 열심은 어머니에게 상처와 공포로 남았고, 그분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그 모진 행동이 바울을 반성의 시선으로 읽게 했다. 그의 다메섹 체험은 ‘폭력에서 비폭력으로의 개종’이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하던 그가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를 통해 비폭력적 열심을 가진 사도로 변모했다.

그가 다메섹에서 정녕 변했다면, 적절한 이름은 폭력에서 비폭력으로의 ‘개종’이다. 신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소명’이라고 명명한다. 내가 굳이 ‘개종’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바울의 변화가 단순한 부름이 아니라 전적인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울이 만난 예수의 정체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세 번의 회심 장면 모두, 예수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박해/폭력을 행사하는 예수다.”(행 9:4-5, 22:7-8, 26:14-15) 첫 번 것은 기록자의 것이고 다른 두 개는 바울 자신의 증언이다. 세 기록 모두 일관되게 박해 또는 핍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모두가 일관되게 가리키는 것은 바울이 저지른 폭력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이었다는 점이다.

바울의 몹쓸 폭력이 향한 대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이다. 이스라엘의 세계관에서 하늘의 음성은 곧 하나님이다. 그 하늘이 자신을 일컬어 바울에게 핍박받는 예수라고 했다. 아마 이 대목에서 밝고 큰 빛과 함께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을 때, 그는 충격으로 눈이 멀었을 것이다. 이는 첫째, ‘예수=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행 22:3-4, 빌 3:6)으로 행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for) 한 모든 행위가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against) 짓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 진리를 위해서라면 폭력도 불사하는 신앙이다. 이것이 진공상태에서 돌출한 것은 아니다. 횡적으로는 예수와 바울 시대 당시의 열심당원과 바리새파의 열심이 있었다. 종적으로 보자면, 민수기의 비느하스, 갈멜산의 엘리야, 외경 속 마카비 형제들, 그들을 본받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 그리고 광야와 겟세마네에서 받았던 유혹까지, 이 열심은 성경의 서사를 관통한다.

내가 탐독했던 한 책은 정당한 대의를 위한 수단의 정당화조차 넘어서, 아예 ‘대의’ 그 자체를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급진적 사유를 제안한다.

“문제의 핵심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모든 합법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정당한 방법을 통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할 때 우리의 정당한 목적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어린 양의 승리에 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열심을 구약은 어느 정도 지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열심의 방향을 완전히 뒤튼다. 예수는 타자에게 가해지던 폭력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된다. 더 이상 타자, 심지어 동물 희생조차 불필요하게 만든다(요 2장의 성전 심판 사건). 그리하여 히브리서의 고백대로 예수는 단번에 영원한 제물이 되어 모든 제사의 종언을 고했다. 모든 제사가 완성된 것이다.

5

21세기에 진입하면서, 특히 2020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다메섹 가는 바울을 닮았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하나님의 진리처럼 외치고, 그것을 타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다른 이들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내치고 차별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들 대다수에게는 다메섹으로 급히 말을 달려가던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바친다는 확고한 확신으로 기쁨에 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나 자신도 그러하거니와 우리의 신학과 이념 속에는 타인이 머물 여지와 숨 쉴 여유가 있어야 하겠다.

제1계명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제도와 체제, 이념과 신념이 신적인 것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바닥에 있다. 하나님의 한 조각을 경험하고는 그것을 전부라 착각하는 일은 우상숭배로 이어질 위험이 다분하다. 폭력에 사로잡힌 열성으로 자기 자신과 이웃,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폭행을 일삼고, 마침내는 폭력에 중독된 마성적(demonic) 존재로 추락한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를 나도, 우리도 만나야 한다. 이제는 이방인, 낯선 타자에게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다메섹 이후의 바울을 닮아야 하겠다. 이것이 나의 폭력적 열심에 대한 반성이자, 내가 만난 첫 번째 하나님, 제1계명의 심화이며, 복음이 지닌 공적 진리이자 공공적 실천이다.

■ 연재를 마칩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용을 추가해 곧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김기현
로고스교회의 담임목사이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사야 50장 4절의 학자와 제자가 되어, 작가와 목사가 되어 말과 글로 주님과 교회, 이웃을 섬기는 비전을 품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부전자전 고전》 등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