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세속 성자, 조선산 생(生)의 기독교를 살아내다
[417호 20세기, 한국, 기독교]
대학원 시절부터 일관되게 김교신 연구에 천착하여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을 포함한 연구 논문을 20편 이상 저술하고, 평전도 쓴 바 있는 전인수 강서대 교수는 《김교신 평전: 세속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서로북스, 2024)라는 제목의 김교신 전기를 펴냈다. 12년 전에 펴낸 평전 《김교신: 조선을 성서 위에》(삼원서원)를 저본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대폭 수정해서 다시 썼다. 저자 전인수 교수가 필자에게 추천사를 요청했다. 김교신에 대해 전문적 식견이 없는 필자가 추천자로서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언젠가는 김교신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는 오랜 부담감을 갖고 있었으므로, 추천사를 쓰기로 했다. 아래는 출간 전 최종 원고를 읽고 썼던 추천사 중 일부다.
필자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40여 년이 훌쩍 지났다. 신학과 기독교 역사 공부를 한 지도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다. 학자와 교수로서 서양교회사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고 글을 쓰며, 학생들 앞에 서서 가르친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다. 그 과정에서 수백, 수천 명의 기독교 인물을 만났다. 그중 일부에 대해서는 책과 논문으로도 써냈고, 역시 그중 일부에 대해서는 어디서든 존경하고 흠모하는 대상이라고 소개도 했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을 읽을 때, 그가 산 삶을 마주할 때, 필자를 예외 없이 옷깃 여미게 만들고, 또 무릎 꿇고 싶을 만큼 숙연해지게 만드는 기독교 역사 속 인물을 꼽으라면 그는 단연 김교신이다. 대쪽 같고 올곧으며 타협하지 않는 조선 선비 같은 그의 신앙과 삶은 그만큼 많은 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저자 전인수가 맺음말에 해당하는 14장에서 표현한 대로, 김교신의 삶은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조선산 고무신이나 짚신과도 같았다.
기독교 신앙의 선교적이고 문화적인 특징을 강조한 역사가 앤드루 월스는 역사상 존재한 모든 기독교의 전파 및 수용 과정에는 ‘토착화’ 원리와 ‘순례자’ 원리가 동시에 작동했다는 유명한 주장을 펼쳤다. 특정문화의 시공간에 종속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복음의 보편성이 ‘순례자’의 원리다. 그러나 전파되고 수용된 복음은 동시에 그 특정문화의 시공간에서 늘 뿌리 내리며 ‘토착화’한다. 김교신은 기독교 복음의 순례자적 보편성을 ‘성서’라는 표현 안에서, 그 복음이 한국 토양과 한국인의 심성에 뿌리 내리는 원리를 ‘조선’이라는 표현 안에 녹여 냈다. 그가 발간한 잡지 ‘성서조선’은 그 원리를 설파하고 시험하고 적용하는 무대였고, ‘조선산 기독교’는 그런 설파와 시험과 적용의 열매였다.
한학 서생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 4월 18일에 함경북도 함흥군 남주동면 사포리에서 아버지 김념희(김염희, 1883-1903)와 어머니 양신(1882-1963)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시 함흥 지역에서 유명한 경주 김씨 양반가였으며, 일가 선조 중에는 고위 관직에 올랐던 이도 적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김념희는 김교신이 두 살이 된 190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럼에도 함흥의 대표적인 유력자 중 한 명이었던 작은아버지 김충희(1884-1939)를 중심으로 가문이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한 덕에,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문의 장손이었던 아버지 사망 후 김충희는 김교신 가족의 아버지 역할도 이어받았다. 김교신이라는 이름도, 다섯째로 태어나는 김교신의 장남 김정손의 이름도 숙부 김충희가 지었다(전인수, 26·86쪽).
구한말 유교적 시대에 태어난 남자아이들이 대개 그랬듯, 또한 해방 이전 기독교에 입문하고 강점기 말기와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의 주역이 된 지도자 거의 모두가 그랬듯, 김교신도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특히 양반가 자제였던 만큼, 서당에서 천자문부터 시작해서 사서삼경을 모두 꼼꼼하게 배우고, 강독(독서와 암기), 제술(시와 글짓기), 습자(붓글씨 쓰기) 등에도 열심을 냈다. 서당 한학 공부가 김교신의 이후 생애에 끼친 영향은, 어린 시절 유학과 한학을 공부했다가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 유교를 과거의 구습으로 보고 단절하려 했던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그는 서당에서 배운 강독 방식, 유교와 한학이 강조하는 생활관, 세계관, 국가관, 가족관을 자신, 가족, 국가, 직장, 무교회주의 운동 및 〈성서조선〉 활동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적용한다(양현혜, 25쪽; 전인수, 27쪽).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마친 1910년 어간에 김교신은 함흥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수적인 양반가 자제였던 그가 신식 공립학교에 다니게 된 계기는 ‘상대적으로’ 개화했던 모친 덕분이었다. 그는 함흥보통학교를 1916년에 졸업하는데,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평생에 영향을 끼칠 세 가지 배움과 결정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입학 후 처음 만난 1학년 담임교사로부터 배운 교사의 모범이었다. 그는 1936년 12월 8일 자 일기에서 꿈에 나타난 이 선생님이 일평생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단일의 선생님이라고, 이분이 자신에게 참 용기를 알려주신 분이라고 고백한다(《전집 6》, 139쪽). 그는 이후 교사로서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근무한 김교신이, 우치무라 간조와 함께 스승의 표상으로 삼았던 모범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열 살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 지식인의 전통에서 기인한 자기 수양 방식으로, 1945년 사망할 때까지 일평생 일기를 썼다. 김교신의 일기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개인 일기’(《김교신 일보(日步)》)로, 전체 30권 분량 중 현재 두 권만 남아있다. 다른 하나는 ‘공개 일기’로, 〈성서조선〉에 ‘성서통신’(城西通信)과 ‘성조통신’(聖朝通信)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글이다. 후자는 모두 《김교신 전집》에 수록되어있다(전인수, 100쪽). 아마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내내 일기를 써서 당시 사회상과 교회상, 한국인 지식인의 세계관을 후세에 증언한 대표적인 두 기독교 지식인이 윤치호와 김교신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또 다른 김교신 전문가 중 한 명인 양현혜 이화여대 교수도 《윤치호와 김교신: 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한울, 1994)라는 역작을 남길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12살 되던 1912년에 남편이 된 일이다. 당시 조혼 풍습대로, 그는 네 살 연상인 함흥 주북면 흥덕리 출신의 한매(1897-1989)와 결혼했다. 어리고 몸 약한 꼬마 신랑을 사실상 어른으로 키웠던 한매는 처음에는 한글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남편이 19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에는 한글을 배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유교적 가부장적 시대였던 만큼, 또 김교신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유교식 생활 전통을 고수한 만큼, 부부는 마음이 애틋해도 입 밖으로는 거의 표현하지 않고 평생 내외(內外)하는 관계로 지냈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김교신은 함흥농업학교에 입학한 후 1920년 초에 졸업했다. 이 학교 2학년 재학 중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에 김교신도 참여한다. 함흥지방법원 이사카와 검사가 작성한 관련 기록에 김교신을 “농 2년생, 독립운동에 찬성·가맹함” “주모자는 몰랐지만 독립운동 행위에 찬성·가맹함”이라는 내용, 이어서 기소유예로 처분했다는 내용이 있다. 김교신은 1942년에 발생한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일이 확인되어 2010년에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학생 시절에 3·1운동에 가담한 일도 독립운동 공적의 일환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대전환: 일본 유학, 개종,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함흥농업학교 졸업 후 김교신은 어머니의 오빠인 외숙부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약 7년간의 유학 생활은 김교신 생애를 완전히 뒤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세 가지 만남이 주요 변곡점이라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근대 학문과의 만남이다. 1920년 3월에 도쿄에 도착한 김교신은 우선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들어가 진학 준비를 했다. 여기서 만난 영어학자 사이토 히데사부로는 그에게 영어 전반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김교신의 일평생 생활 태도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어 단어 punctual, 즉 ‘시간 엄수’의 의미와 태도를 모범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시절 만난 후 김교신의 평생 친구가 된 함석헌에 의하면, 히데사부로는 가족과의 대화 시간도 10분을 넘겨본 일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하며 영문학 공부에만 몰두했다. 이런 태도는 귀국 후 조선에서 김교신이 유지했던 진중하고 철저한 생활 방식과도 유사하다(37쪽).
예비영어학교에서 공부하며 사범학교 입학을 준비한 김교신은 1922년 4월에 드디어 목표한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 진학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박물과로 전과하는데, 동물학·식물학·광물학·지질학·지리학 등을 통합한 전공이었다. 농업학교 출신인 그는 추상적 지식보다는 과학에 더 관심을 보였다.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이 단명한 이유로 고향에서 자주 언급한 풍수지리설의 미신성을 증명하고도 싶었다. 1921년부터 만난 우치무라 간조가 삿포로 농학교를 나온 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은 사례를 따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치무라는 기독교 신앙과 성서를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자연과학적 궁구(窮究)의 대상으로 보았는데, 이런 스승의 사고가 김교신이 성서와 신앙, 세상을 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38쪽). 도쿄에서 김교신은 학문뿐 아니라 운동에도 열중하여, 정구·유도·농구·마라톤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그가 농구부를 지도하고, 손기정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 배경이었다.
두 번째는 기독교 신앙과의 만남과 개종이다. 김교신이 처음부터 무교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896년 이후 미국 북장로회, 캐나다 장로회가 함흥에서 이미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20년가량 함흥에서 살며 학교에 다닌 그는 이미 한국인 기독교인과 선교사와 접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학 이전까지 그는 기독교에 관심이 없었다. 함께 일본으로 유학하여 같이 살았던 기독교인 친구 한림의 전도에도 시큰둥했다.
그러나 도일(渡日) 한 달가량이 지난 4월 16일 저녁에 도쿄의 한 거리에서 동양선교회 신학생의 전도를 받고 이틀 뒤에 처음으로 우시고메 야라이초 홀리네스(성결) 교회에 출석했다. 두 달 뒤 6월 27일에는 그 교회의 시미즈 슌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결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교신이 성결교인으로 생활한 기간은 길지 않았다.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 목사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김교신도 성결교회를 떠났다(41-43쪽).
세 번째이자 결정적인 만남이 우치무라 간조와 그의 무교회주의와의 만남이었다. 이것이 김교신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김교신은 성결교회에 다니던 시기에 이미 우치무라의 글에 발분망식(發憤忘食), 즉 끼니를 잊을 정도로 열중한 일이 있었다. 그는 1921년 1월부터 우치무라의 문하생이 되어 그가 주최한 성서 강연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연이 60회로 끝난 1922년 11월에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받아먹는 개의 심정으로(마 15:26-28) 우치무라의 강연에 열광하고 감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연구하는 방법, 교회보다 성서와 신앙을 강조하는 사상, 직분과 제도 없이 모든 신자가 평등하게 모이는 강독 및 연구 중심의 신앙 모임, 성서만이 민족과 국가(우치무라에게는 일본, 김교신에게는 조선)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확신,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의 성직자·교리·교파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은 순전한 기독교를 건설해야 한다는 믿음, 전쟁과 폭력을 배격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산상수훈적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전수한 신앙이라는 이해 등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우치무라 간조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 사실상 거의 유일한 선생이 되었다. 이렇게 김교신은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양현혜, 31-64쪽; 전인수, 44-47쪽).
우치무라의 제자로서 무교회주의자가 된 김교신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일본 유학생 기독교인 정상훈·함석헌·양인성·류석동·송두용과 함께 1926년에 도쿄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여 매주 모여 성서를 연구했다. 이 모임이 한국에서 결성되는 〈성서조선〉 동인의 출발점이었다.
조선 무교회주의 운동: 〈성서조선〉, 생(生)의 기독교, 조선산 기독교
7년간의 유학 기간 중 과학(박물학) 교사, 기독교인, 무교회주의자라는 새로운 삼중 정체성을 확보하고 1927년 봄에 귀국한 김교신은 고향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선교사들이 세운 이곳에서 그는 약 1년밖에 가르치지 못했는데, 이유는 그의 생애에 오점을 남긴 일본인 여교사와의 연애 사건 때문이었다. 기독교인, 유학파 교사, 유부남인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불명예스러운 추문이었다(전인수, 64-66쪽).
영생여고보에 재직 중이던 1927년 7월에는 일본에서부터 함께했던 6인 동지가 모여, 이후 언제나 김교신의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창간 당시 대표자는 김교신이 아니라 정상훈이었다. 처음에는 계간지로 발행되다가, 1928년 8월의 제8호부터는 월간지로 바뀌었다. 정상훈은 제15호까지 주도했지만, 그가 서울을 떠난 후 1930년 5월의 제16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교정·인쇄·발송·연락 등의 거의 모든 일을 혼자 떠맡았다. 이 무렵부터 김교신이 한국 무교회주의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68쪽).
한편, 영생여고보를 떠난 김교신은 1928년 봄에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지리박물과 교사로 취직했다. 이 학교에서 1940년까지 12년간 일한 김교신은 차차 양정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양정에서 김교신은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어투로 지리·박물·농업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과 교사였음에도, 그는 인물·역사 중심의 지리학, 즉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과학을 가르쳤다. 그의 수업에는 예수·공자·간디·조선·조선어·민족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만큼, 학생들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시행했다. 따라서 과도하게 엄격한 기준, 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격 교육, 비기독교 학교에서 너무 자주 기독교를 언급한 점 등이 일부 학생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더 많은 학생이 김교신을 참 스승의 사표로 자주 언급했다. 예컨대, 경성제국대학 입학 면접시험에서 낙방했던 제자 조성빈은 면접관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경위를 묻자, “우리 학교 담임선생 김모가 예수를 믿는 고로 나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예배하고 기도·묵상하는 것을 즐겼던 김교신은 ‘물에산에’라는 이름의 등산 및 자연 산책 모임을 운영했다. 주일에 자주 모였던 것으로 보아 교회당에서 공예배를 드리지 않는 무교회주의자로서 이 주일 자연 모임을 예배의 일부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101-107쪽).
김교신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양칼’ ‘뺀빼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양칼은 ‘서양 칼’이라는 의미로, 매사에 맺고 끊음이 칼같이 분명하고 냉정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뺀빼니’라는 별명은 그가 늘 머리를 대머리로 밀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 별명은 희화화되어 불리기도 했지만, 그를 존경한 학생들은 머리에서 빛이 나는 숭고한 고승이나 다이아몬드를 연상하기도 했다(115-118쪽).
거의 단독 주필이자 발행인이 된 1930년 5월호부터 ‘성서조선 사건’으로 폐간되기 직전인 1942년 3월호까지 김교신이 실은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전인수에 따르면, 크게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생(生)의 기독교’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산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두 사상을 포괄하는 핵심 요소는 교회론이다.
교회사에서 나타난 교회론(교회 정치)의 유형을 크게 주교제(감독제), 장로제(대의제), 회중제로 구분한다면,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회중제, 그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회중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정점에 둔 주교제, 성공회와 일부 루터교는 교황이 없는 주교제, 감리교는 주교 대신 감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주교제로 구분된다. 계급적 상하 권위 체계가 강조되고, 평신도와 성직자 차이, 성직자 간의 차이, 교회와 치리회의 상하 계층적 차이를 강조하는 권위적 체제이다. 장로회는 성직자 간의 계급 차를 거부하므로 주교라는 직위가 없지만, 평신도와 구분된 이들, 즉 ‘말씀을 맡은 자’로서 설교자와 목사, 장로의 존재와 권위를 인정한다. 지역교회를 관할하는 상위 기관인 노회와 총회의 존재도 인정하는데, 지역교회에 속한 공동의회, 당회가 선출한 총대를 상위 조직인 노회에 파견하고, 노회의 총대를 상위 조직인 총회에 파견하는 대의정치제를 채택한다. 회중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장 강조하므로, 상위 조직인 노회나 총회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회의 조직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회중교회제를 지지하는 교회 중에서도, 평신도와 구분된 목사의 존재를 인정하는 (청교도)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회가 있는 반면에, 모든 신자의 절대 평등을 강조하는 만인제사장주의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따라, 구별된 목회자를 인정하지 않는 퀘이커나 일부 재세례파 계열의 교회들이 있다.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같은 재세례파 계열 교회 중에도 구별된 목회자의 지위를 인정하는 교회도 있다. 아무리 급진적인 회중교회주의라 해도 대부분 교회는 세례와 성찬 같은 성례는 인정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이 모든 교회론의 유형 중에 회중제에 부응하는 교회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목회자와 교회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례와 성찬 등 성례도 따로 갖지 않고, 공예배를 주일에 따로 드려야 한다는 분명한 규정도 없으므로, 모든 회중교회주의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회중교회론이 무교회주의일 것이다.
우치무라와 마찬가지로, 김교신은 교회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도들의 회합” “성도의 영적 단체”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어 단어 ‘에클레시아’가 뜻하는바, 회중이 곧 교회라는 회중교회의 주장을 수용한다. 무교회주의의 특징은 이런 전형적인 회중교회론자들의 말에 더하여, 교회라는 교권과 조직, 제도 없이, 오직 성서만으로 예수를 만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을 대표하는 것은 교회나 교단 조직, 병원이나 학교, 선교회 같은 기관이 아니라, 성서 연구의 수단이자 결과인 〈성서조선〉이다. 이런 이유로, 김교신을 비롯한 무교회주의자들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리지 않고, 일상을 사는 생활공간, 숲과 산 등의 자연 공간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고 거기서 예배했다. 류영모·김흥호·이찬갑 등도 ‘오늘살이’ ‘여기주의’ “기독교는 예배가 아니라 사는 것이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김교신의 사상을 공유했다.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자들의 이런 인식을 전인수는 ‘생의 기독교’ 혹은 ‘삶의 기독교’라 지칭했다(123-135쪽).
한편,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조선산 기독교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뿌리내리게 하는 운동이기도 했다. 스승 우치무라 간조가 두 개의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을 양손에 붙들고 무교회주의를 제창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즉, 그는 예수를 사랑한 기독교인인 동시에, 일본을 지극히 사랑한 애국자였다. 김교신도 마찬가지였다.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지식 사회에서는 서양이 이룩한 근대성을 일본에 동화되지 않은 형태로 조선인 스스로 소화해내기 위해 ‘조선혼’(朝鮮魂) ‘조선심’(朝鮮心)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김교신은 이를 기독교식으로 전유하면서, ‘조선산’ 기독교를 1934년부터 외치기 시작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 기독교는 서양의 역사와 정신을 반영한 실재이므로, 이 기독교가 한국인과 한국 토양에 맞을 리가 없다. 그는 이렇게 ‘순수한’ 성서의 기독교 위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오염된 서양 정신과 문화를 벗어버린 기독교를 꿈꾸었다. 성서만이 순수한 기독교를 담보하므로, 오직 철저한 성서 연구만이 순수 기독교를 찾는 길이었다. 그러나 조선산 기독교는 단순히 서양 옷을 벗어던지고 순수한 기독교에 조선 옷을 입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움으로써, 기독교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인데, 이는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조선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한편, 김교신이 구체적으로 사용한 용어는 아니지만, 그가 주창한 조선산 기독교는 현대 선교학이나 역사신학이 활용하는 기독교의 ‘토착화’ 담론과도 연결된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 토착화 신학의 선구자로 불릴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1934-1935년 어간에 조선심과 조선혼을 토착 종교 전통 및 한국인의 심성과 연결하여 설명한 바 있다. 조선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한 유교·불교 같은 종교와 도덕률을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순수하게 간직한 조선의 나다나엘 같은 이들이 간직한 마음이 조선심이다. 이 맑은 조선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마음이다. 조선심을 지닌 이들은 신성을 경외하며, 어질고 간사하지 않으며, 퇴계와 율곡처럼 진실하게 신의를 지키는 이들이다. 춘향전과 심청전에 등장하는 춘향이나 심청처럼, 정열과 효심이 뛰어나기도 하다. 구약 율법이 신약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준비하는 매개체가 되듯, 이런 조선심과 조선혼은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길이 된다. 공맹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과 통하는 면이 많다. 바울이 성령 충만한 기독인의 자세로 든 인자·겸손·온유·관용 등은 조선인이 오래도록 논어나 맹자 등 사서삼경을 읽으며 체득한 수덕(修德)의 이상과도 통한다(143-146쪽; 양현혜, 106-121쪽).
‘토착화’와 마찬가지로, 김교신이 직접 사용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는 구약이 신약을 예비하고 세례요한이 예수를 예비하듯, 불완전하지만 도덕적·문명적으로 높은 수준을 가진 한국의 전통 사상이 완전한 기독교로 가는 길을 예비한다는 일종의 ‘성취론’ 신학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서조선 사건’과 노동 현장
1928년부터 양정고보 교사로 재직한 김교신은 1940년 3월에 그곳을 떠나 그해 9월에 경기중학교로 이직했다. 양정고보 사직은 미국 유학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이 어려워지자 경기중학교에 취직한 것이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을 꿈꾼 수재들이 모인 이 학교에서 김교신은 반년밖에 머물지 못하고, 이번에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1941년 9월에 이직했다. 그러나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기간도 한 학기 남짓이었다. 그가 1942년 3월호 〈성서조선〉에 권두언으로 실은 ‘부활의 봄’과 ‘조와’(弔蛙, 개구리를 애도함)를 전시체제에 독립운동가와 사상범 감시에 골몰하던 총독부가 문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3월 30일에 개성에서 체포되었다.
‘부활의 봄’에서 문제가 된 구절은 “이렇게 확실하게 현저하게 생명으로써 임하는 봄을 어찌하여 영원히 안 올 것으로만 알았던고”였다. 당국은 이 구절을 일제 강점이라는 겨울 고난을 견디면 조선의 독립이라는 봄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더 유명한 글 ‘조와’는 송도에서 그가 새벽기도터로 자주 찾았던 송악산의 작은 연못에서 지난 가을에 겨울잠 들었던 개구리들이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은 장면을 묘사한 글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어 죽은 개구리들을 모아 묻어주다가 연못 아래에서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아 깨어난 개구리 두어 마리를 발견했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1930년대 말 전시체제에 들어간 일제 당국의 감시와 검열이 심해지자, 그는 독자들에게 문자보다는 행간을 읽으라는 주문을 한 바 있었다. 행간을 읽는 능력이 한국인 독자들에게만 있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당국은 저자 김교신과 〈성서조선〉 집필자뿐 아니라, 구독자 전부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보다 더한 최악질이라고 판단하고, 독자 2백여 명도 잡아갔다. 김교신·함석헌·송두용·류달영·박동호·이찬갑·류영모·류의상·손정균·송후용·김헌직·강교안 등 관련자 대부분이 수감되었다. 김교신은 미결수 신분으로 약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평소에 러시아 대문호들의 사례를 들어 말했듯, 감옥은 그에게 “인생대학이요, 최고학부”이기도 했다(전인수, 227-242쪽).
1943년 3월 29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김교신은 여름에 만주 도문으로 갔다. 실직 상태라 가족을 부양할 대책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기도 했고, 농사에도 관심이 있었다. 3개월가량 만주에 체류한 후 귀국한 그는 경남 진영(김해)의 소다공장에서 잠시 일하는 등, 취직하기 위해 1년가량을 소요했다. 그러다 1944년 7월에 찾은 일자리가 흥남 질소연료공업주식회사 용흥공장이었다. 이 비료공장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이 무렵에는 군수공장으로 전환되어 있었는데, 김교신은 근로과 관리계장으로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서본궁 사택촌을 관리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엄격한 관리자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과 불평을 동시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평생 교사와 문필가로 살았던 그는 오히려 이 노동 현장에서 색다른 기쁨을 느끼기도 했고, 자기반성도 했다. 류달영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는 실제 교육계 일보다 이곳 일이 더 생생한 교육의 현장이라고 느꼈으며, 공장노동자들이 교육계 인사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순진한 존재라고 평가한다. “나는 이곳 공장에 들어와서 신세계를 발견한 것일세. 교육계에서는 밀려 나온 것이 웅덩이에서 태평양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일세.”(244-255쪽).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제공한 이 터전은 김교신에게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1945년 4월 18일부터 복부 통증에 시달렸다. 급성 맹장염, 유행성 감기 등 오진이 반복된 끝에 발병 6일째 발진티푸스로 병명이 확정되었다. 전쟁터의 참호나 집단 수용소 등지에서 흔히 발생하는 이 전염병이 4월 8일에 서본궁 사택촌에서 처음 발병했다. 첫 발병 열흘 후 감염된 김교신은 일주일 만인 4월 25일 새벽에 사망한 후 급히 화장되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던 모세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직전에 사망했듯, 부활의 약속을 기다리던 개구리 무리를 이끌던 김교신도 조국의 해방 직전에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갔다(255-261쪽).
일상에서 영원을 일군 세속 성자, 복음적 유자(儒者)
전인수는 김교신을 “일상에서 영원을 일군 세속성자”로 묘사한다.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조선 고무신이나 짚신” 같은 삶을 살았다고도 평가한다. 교회와 기독교인만의 공동체라는 구별된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과 직장 공간, 세상과 자연 모두를 신앙 공간으로 여기며 세속에서 누구보다도 단정하고 정제된 도덕적 삶을 살아낸 세속 성자라는 뜻이다.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특히 그가 어린 시절 천착했던 유교 전통을 긍정하고, 그 전통을 기독교화하려는 시도였다는 전인수와 양현혜의 평가는 이미 언급했다.
한편, 기독교 개종 이전과 이후 김교신의 삶을 일관되게 관통한 정체성을 유교적 인식과 삶의 기독교적 적용으로 파악한 류대영은 김교신을 ‘복음적 유자(儒者)’로 이해한다. 복음적 유자라는 용어는 이미 김교신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가 사용한 용어였다. 간조는 자신이 존경한 일본 유학자들이 사찰이나 신사 같은 제도 기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경서를 집중 공부하면서 인간·삶·사회·세상을 궁구하고 깨달음을 전한 사람이듯, 복음적 유자는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서에 집중하여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교신은 개종 이전에 자신이 유교적 자기 수양에 힘썼다고 언급했다. 그는 공자를 극도로 경모(敬慕)했다. 공자가 말한 것을 모두 지키고 행할 뿐 아니라, 공자보다 10년 빨리 공자가 도달했던 완성된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또한 공자가 말한 논어의 첫 구절,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悅乎)를 삶의 표어로 삼았다. 그러나 공맹의 교훈을 남김없이 실행하려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완전한 단계에 이르기 어려움을 깨닫고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기독교에 입문하면 70세가 아니라 20세 청년일지라도 ‘입종(入從)하는 동시로부터’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성결교 전도자의 말을 듣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의 도덕률이 유교의 윤리보다 훨씬 심원고대(深遠高大)하고 완미장엄(完美莊嚴)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921년에 만난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와 유교의 관계를 정(正)과 반(反)의 관계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전도나 사업을 하지 말고, 신을 믿으며 ‘무위(無爲)와 유사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신이라고 했다. 김교신은 마치 유교 경전을 읽듯, 성서를 고서 중의 고서로 여겨 매일 읽고 암송하며 읽고 암송한 내용을 일기에 기록했다. 성서 연구 집회를 위해 작은 방을 하나 따로 마련한 후, ‘멀리서 찾아온 벗이 있는 때에 맞아 배우고 수시로 익히며 같이 공부하겠다’는 유학자 같은 포부도 밝혔다. 성서를 열심히 읽고[熱讀] 필사(筆寫)하며 암송(暗誦)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한때 김교신의 동료였지만, 일반 백성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돕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도원은 김교신의 엘리트주의 방식을 ‘서생 유희’로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교신은 이 비난에 동의하지 않았다.
성서를 읽고 공부하거나 기독교인으로 사는 방식뿐 아니라 홀로 된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효심, 가족 구성원, 특히 아내와 딸, 아들을 대하는 가부장적 태도와 가치, 자녀들 이름을 짓는 방식, 교사로서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와 엄한 규율, 철저한 자기 관리 등도 유교적 수양을 이상화한 선비와 비슷했다. 이처럼 유가적 전통과 생활 방식은 그가 성인이 되고, 심지어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삶에 깊이 뿌리내렸다.
류대영은 김교신을, 공자를 만나 유자가 되었고 예수를 만나 ‘거룩하게 된 유자’가 된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철저한 유자인 동시에 철저한 기독교인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정체성의 조화로움이 이론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김교신은 특별하다고 주장한다(류대영, 13-41쪽).
노평구 편, 《김교신 전집》(전 8권)(부키, 2001-2002).
류대영, ‘복음적 유자(儒者): 김교신의 유교적-기독교적 정체성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0호(2019.3.): 5-41쪽.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 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한울, 1994).
양현혜, 《김교신의 철학: 사랑과 여흥》(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
전인수, 《김교신 평전: 세속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서로북스, 2024).
■ 본 연재는 2026년 1월호부터 다시 이어갑니다(수정: 2025년 9월 30일 현재).
이재근
광신대학교 신학과 교회사 교수. 교회사 전반을 연구하지만, 특히 세계기독교와 한국기독교역사, 그리고 두 기독교의 상호 관계에 연구를 집중한다.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종교개혁과 정치》 《20세기, 세계, 기독교》 《전라도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