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계〉와 함석헌, 숨 쉴 틈을 만들다

[417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2025-07-28     민대홍

시, 뒤틀린 해방 공간에서 숨쉬기

해방1)

 

큰 연장 황소 메고 종자망태 내놓아라
삼동이 다 지나고 새봄 다시 돌아온다

일천년 묵은 동산을 갈아볼까 하노라
압록강 메인목이 밤동안에 열렸고나

피눈물에 울든밤은 어이 그리 길었던고
동천에 붉은해 솟아 우리 행진 하리라

금수강산 자랑마라 잔작관전 보기싫다
갈래어찌 그리 많고 줄기 무슨 그리 여럿
삼천리 한마당 닦고 달려보면 어떠리

1945년 8월 15일. 함석헌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그는 해방 공간(1945-1948)에서 시를 여러 편 쓴다. 〈해방〉은 1945년 11월에 쓴 시다. 같은 달, 그는 신의주 학생 사건2)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되고 50일간 구금된다. 해방 공간에서 함석헌은 오직 시만 쓴다. 〈거지〉·〈너나〉·〈사람〉·〈잃어진 진주〉 등 70여 편을 생산한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그대는 골방을 가졌는가〉와 같은 함석헌 시그니처 시가 나온 것도 이때다.

시에는 해방을 맞았지만 독립하지 못한 민족의 설움이 녹아있다. 혹독한 겨울, 피눈물을 흘렸던 시간을 이겨내고 붉은 해가 솟는 새 시대를 맞이했건만, 우리 민족은 갈래갈래 찢기었다. 민족의 현실을 해방 공간에서 성찰한 셈이다. 한 역사학자는 “1920년대부터 좌우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던 역사가 해방 공간에서도 그대로 펼쳐졌으며, 6·25전쟁을 거쳐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하며 “뒤틀린 해방 공간”을 설명한다.3) 함석헌이 바로 그 시대를 살았다.

해방의 기쁨과 나뉨의 아픔이 혼재한 상황을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을 거다. 마냥 기뻐할 수도, 한없이 우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되어 감정의 숨을 쉬었나 보다. 폭압적인 일제가 물러간 일은 기쁘지만, 외세에 의존한 온당하지 않은 해방과 좌우로 나뉜 민족의 현실이 남아있었다. 하여 쟁취하지 못한 독립의 갑갑함 속 숨 쉴 틈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를 쓰지 않았을까. 그는 시 속에서 오롯이 자기 숨을 쉬었다.

숨 막히는 세상

골목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른 것도 잠시. 남한은 3년간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며 이승만 체제가 시작된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와 관련된 것을 모두 지우고자 했다. 하여 제주 4·3과 여순 사건과 같은 뼈아픈 기억을 우리 역사에 새겼다.

한편, 그는 정부 수립 초창기부터 여러 조치를 통해 언론을 통제했다.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좌익 언론 축출’을 목표로, 1948년 9월, ‘기사 게재 금지 항목’을 발표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한민국의 국시 국책을 위반하는 기사
2.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3. 공산당과 이북 괴뢰정권을 인정 내지 보하는 기사
4. 허위의 사실을 날조 선동하는 기사
5. 우방과의 국교를 저해하고 국위를 손상하는 기사
6. 자극적 논조나 보도로서 민심을 격앙, 소란케 하는 외에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사
7.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1948년 7월 17일에 공포된 제헌 헌법에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되었음에도, 정부는 이 같은 발표를 강행했다. 중요한 것은 금지 항목에 담긴 내용이 모호하여 주관적 해석과 처벌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정부의 비위를 거스르는 기사는 일곱 개의 금지 항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정부가 하는 일은 칭찬 일색으로, 북한은 ‘북괴’로, 미국은 철저한 우방국으로 보도해야 했다. 모든 언론의 어용화가 목표였는지도 모르겠다.

언론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1950년부터 3년간 이어진 6·25전쟁은 이승만 정권이 언론을 더욱더 강하게 통제하는 기회가 되었다. 전쟁 상황이니, 언론뿐 아니라 일상의 자유까지도 제한했다.

전쟁 기간에는 국방부 정훈국이 언론 사전 검열을 맡았다.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며, 이와 관련한 반민족·비인도적 범죄를 엄중히 처단하겠다는 대통령 긴급명령이 발표되기도 했다. 1952년 5월에는 부산을 비롯한 경남, 전라도 일대에 또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은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간선제’로는 대통령 연임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한 결과, ‘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기 위한 조치였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국회의원을 압박하고, 비판적 언론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게 이승만은 전쟁 중 2대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라디오방송도 소수만 들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매체는 신문이 거의 유일했다. 6·25전쟁 이전까지 국내에서 발행된 신문은 일간 44종, 주간 66종, 총 45만여 부였다. 전쟁 중에는 이마저도 발행하기 어려웠으니, 한 조각 종이에 인쇄된 소식에 목마른 때였다.

민중이 비상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 그들에게는 숨 쉴 틈이 필요했다. 그때, 혜성과 같이 〈사상계〉가 등장했다. 장준하를 중심으로 6·25전쟁 중인 1953년 4월에 창간호를 2천 부 이상 발행한다. 정전협정 이후 12월호부터는 서울에서 발행하며 발간 부수를 늘려갔고, 1955년에는 1만 부 이상을 발행하기에 이른다. ‘민주주의’ ‘통일’ ‘경제’ ‘문화’ ‘민족’을 주요 주제로 다룬 인문교양지 〈사상계〉는 민중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1956년에는 함석헌이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게재하며 데뷔하는데, 시 쓰고 성서 연구에만 몰두했던 그가 세상에 소개되는 계기였다.

함석헌이 내놓은 첫 글은 교회를 향한 혹독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교회만을 향한 비판은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생각도, 행동도 없는 상황, 친정부 여론에 휩쓸려 비판적 사고가 정지된 모든 상황을 겨냥한 외침이었다.

교회당에 피난민이 오면 신자를 먼저 들이고 불신자를 막고, 구호물자가 오면 그 때문에 싸움이 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미끼로 전도를 하려 하고, 그리고 선거를 하면 누구를 대통령으로 써라, 누구를 부통령으로 써라 하고, 기독교 연합을 하여 추천을 하는지 매수(買收)를 하는지 하고, 교회를 지반으로 정당운동이나 하고, 기독교 학교라는 학교도 다 남보다 못지않게, 누구보다 더 학생을 착취하고 있을 뿐이지, 이 역사를 세우려 기독적인 입장에서 높은 입장을 주장하는 커다란 사상적인 노력도, 기울어져 가는 집을 한 손으로 당해 보려는 비장한 실천적인 분투가 힘있게 나오는 것도 없다.4)

이승만 정권의 통제에 굴복한 언론과 이승만을 추앙하는 기독교는 닮은꼴이다. 교회와 언론은 민중의 눈과 귀를 가리었다. 오로지 반공, 오로지 이승만 정부 찬양을 일삼으며 숨 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 〈사상계〉의 등장은 당시 지식 사회와 일반 민중 사이에서 숨 쉴 틈이 되었다.

할 말을 해야 숨 쉰다

함석헌은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민중에 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사상계〉 제44호(1957.3.)에 ‘할 말이 있다’를 게재했다. 이 글에 그의 첫 언론관이 드러난다.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無言劇)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만, 있고도 말을 아니 하고 자라 온 민중이다. 사람인 담에야 속이 없으리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고 온 사람들이다. 할 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민중계급이 발달 못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데 그 발달 못한 원인은 무어냐 하면 민중이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은 울어야 더 설어지는 것이요, 정의(正義)는 내 놓고 부르짖어야 높아 가는 법이다. … 그런데, 우리나라 민중은 그저 구겨박힘 그저 숙으러짐 한길로만 내려왔다. 아파도 아프단 말도 아니 하고 매만 맞아 왔다.

탈식민 사상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그린비)에서 식민주의와 권력 구조 속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의 대답은 “말할 수 없다”이다. 서발턴(하위주체)은 자기 목소리를 내더라도, 지배 권력의 언어와 제도 안에서 왜곡되거나 무시된다는 것. 말할 수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식민지 조선인의 상황, 뒤틀린 해방 공간과 6·25전쟁,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숨이 막힌 민중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할 말 많은 민중이 입이 막혀 숨도 못 쉰 채 무언극만 하는 세상. 함석헌은 민중의 언로가 막힌 현실을 성찰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하나의 민중(민초)임을 이야기한다. 민초인 자신의 소리가 곧 민중의 말이라고 믿었다. 이는 훗날 그가 〈씨ᄋᆞᆯ의소리〉를 창간하는 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검열 때문에 상당 부분 삭제되었다. 삭제된 내용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군인에 관한 언급이었다.

내가 말 한다면 먼저 이 대통령을 뵙고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을 만날 길이 없다. … 또 ‘각하’ 소리 할 걱정에 못 가겠다. 나는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말인 ‘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각하’란 말 쓰기 싫다. … (이승만 대통령이) 〈민중의 심부름꾼〉이라니, 5천 년 역사에 처음 듣는 소리 아닌가? 시대가 참 좋기는 좋다. 그런 대통령을 각하라고 하며 둘러싸고 민중이 가까이 갈 수 없게 하는 건 대체 누구들일까?5)

“민중의 공복”을 자처했던 이승만 정부는 말과 행동이 달랐다. 반공을 내세우고 언론을 통제하며 이승만 자신은 ‘각하’로 군림했다. 제소리를 내지 못하는 민중의 답답한 마음을 탄압받는 언론이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함석헌은 〈사상계〉가 민중의 공론장이 되기를 꿈꿨다. 민중이 해야 할 말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들이 자기 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민중이 주인 되는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다.

이 여론 없는 역사에, 공론(公論) 없는 사회에 말 못하는 민중에 밟으면 버러지 풀 같이 밟는 대로 밟히는 백성에 글쎄 그런 진탕 속에 음냉한 구렁에, 어쩌면 그런 연꽃 같은, 붙는 불길 같은 혼(魂)이 왔더란 말인가?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떨어졌던가? 하늘이 무심치 않아 특별히 보냈던가? 이 벙어리 민중더러 입을 열라고 입을 열어 중얼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타죽겠으므로.

그는 민중에게 입을 열자고 촉구한다. 입을 열어야 숨을 쉰다고, 그래야 죽지 않는다고 말이다.

할 말 하는 세상, 그 너머

1950년대 함석헌과 〈사상계〉가 막힌 언론의 길을 뚫고 민중에게 숨 쉴 틈을 제공했다면,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제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누구나 SNS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대중이 정치-사회 상황을 인식하는 방식도 레거시 미디어에서 대안 언론으로 상당 부분 옮겨갔다. 누구나 뉴스를 생산할 수 있는 세상, 지상파 뉴스보다 유튜브 뉴스를 시청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세상이 된 거다.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 1만 명이 넘는 시민이 국회로 향했다. 계엄군의 활동 하나하나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 중계되었고, 만인이 내란 극복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너도나도 시대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할 말을 한다. 문명의 이기에 감탄해야 하는 것일까? 민중의 입이 봉인 해제되어 할 말 하는 세상, 여기에도 위험은 있다.

모든 이가 말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 ‘숨 쉬고’ 있는가? 무수한 목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진실은 묻히고 감정적 선동과 가짜뉴스가 여론에 영향을 주는 현실을 보면, 새로운 형태의 ‘무언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과거에는 민중이 직접 소리를 낼 수 없으니 각성된 목소리가 민중의 말을 대변했다. 함석헌이 〈씨ᄋᆞᆯ의소리〉 영문 제목을 ‘Voice of the People’로 정한 이유도 이런 뜻에서다. 민중이 직접 하지 못하는 말을, 무언극으로 표현하는 소리 없는 외침을 〈씨ᄋᆞᆯ의소리〉가 대신 전하고자 했다. 오늘날은 민중의 말을 하나의 목소리가 대변하지 않는다. ‘Voices of the People’의 시대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목소리가 아니라 깊은 성찰이다. 함석헌이 모두가 말하는 세상을 꿈꿨다면, 지금은 제대로 말하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

지금, 무한에 가까운 표현의 자유 속에서도 여전히 억압받고 소외되는 목소리를 찾아 듣고, 진실을 분별하며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책임 있게 말하는 일.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며 공론을 형성해가는 성숙한 소통. 이것이 함석헌이 〈사상계〉를 통해 만들고자 했던 숨 쉴 틈의 재현이 아닐까. 모두가 할 말 하는 세상, 그 너머를 꿈꾼다.

■ 주

1) 1945년 11월, 함석헌의 첫 육필 원고에는 ‘해방’ ‘학생사건’ ‘해방 후 유감’이라는 세 개의 제목으로 되어있고, 1946년 7월 〈영단〉(靈斷)에 발표할 때는 ‘새조선’으로 제목을 고쳤다. 여기 실린 시는 육필 원고 〈해방〉 부분이다.
2) 1945년 1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읍에서 열린 기독교사회민주당의 지부 결성 대회에서 평북자치대 용암포 대표가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 이를 지지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 시위대를 향해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이 무차별 사격하여 학생 23명이 죽었고, 7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학생과 시민 2천여 명이 투옥되었다.
3) 박정신, ‘뒤틀린 해방체제, 그 너머’, 〈현상과인식〉 통권 127호(2015.12.)
4)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상계〉 통권 30호(1956.1.)
5) 이 내용은 〈사상계〉 발표 당시에는 삭제된 부분이다. 1959년 3월 단행본 《새 시대의 전망》(백죽문학사)으로 출판될 때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을 첨가했다.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