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와 폭력의 근원을 성찰하며 평화를 기도하는 무신론자 ― 자콥 로고진스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과 명예교수

[417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3]

2025-07-28     김동규
사진: 인터뷰이 제공

자콥 로고진스키(Jacob Rogozinski, 1953-)는 프랑스 루베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클로드 르포르에게 지도받아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파리8대학교에서 가르치다 2002년에 장-뤽 낭시 후임으로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철학과 형이상학 담당 교수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은퇴했다. 칸트와 법, 정치의 문제에 관심을 두다가 현상학으로 선회했고, 자아 살해에 맞서 자아의 재구성과 갱신을 논하는 훌륭한 철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적대·테러·희생·공포정치 등 다양한 정치적 현상의 의미를 밝히는 데 공을 들였다. 전통 유대주의와 메시아주의의 갱신을 시도하는 여러 연구를 남겼으며, 최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학살에 끊임없이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저서로는 《법의 선물: 칸트와 윤리의 수수께끼》·《데리다의 비밀 무덤》·《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했다: 마녀사냥에서 공포정치까지》·《반역자 모세》·《비환대》 등이 있다. 인터뷰는 올해 3월 6일에 화상회의로 이루어졌으며, 서강대 철학연구소 강지하 선생이 추가 질문 등 도움을 주었다. 로고진스키 명예교수의 이력과 철학 여정, 정치와 종교에 관한 통찰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 선생님의 신앙 형성과 종교적 배경, 삶의 이력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모님은 유대교 신앙으로 교육하셨습니다. 모든 의례를 지키지는 않으셨지만요. 예를 들어, 집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식이었지요. 부모님은 쇼아(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셨고, 전쟁 후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하셨죠. 부모님 스스로 유대인으로서 강렬한 삶을 살아가셨는데, 이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렇게 제 유대인 정체성을 물려받게 되었어요.

제가 유대교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렸을 때 랍비와 함께 히브리어를 공부했지만요. 그 교육이 성서 텍스트를 연구하고 《반역자 모세》를 쓸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가 아니지만, 자유주의적 유대 공동체에 속해있고, 중요한 의식이 있을 때 다른 이들과 기도하러 가기도 해요. 유대교는 순수한 믿음보다 실천과 의례를 중시하죠. 한나 아렌트의 일화가 기억나네요. 그녀가 스무 살 때 독일의 랍비를 만나 “신앙을 잃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이런 답을 들었다지요. “누가 당신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했습니까?”

유대교가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첫째, 의례적 실천입니다. 둘째, 구약성서를 읽는 방식입니다. 이는 우선 탈무드 독법으로 불리지요. 탈무드는 고대에 쓰였고, 그 후 2천 년 동안 유대 학자들이 계속 재독해해 왔어요. 유대교가 독서의 방식이라면, 정신분석학과 데리다의 해체론도 ‘유대적’이라 말할 수 있겠죠.

아버지는 자신을 ‘무신론자’라 하셨지만,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칸토르’1)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기도로 노래하며 우시던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해요. 어렸을 때, 무신론자인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답하셨어요.

저는 성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본보기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그 타자가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그분이 제 목소리를 들으실지 모르면서도 타자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가 “호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타자를 향한 부름이죠. 이 호명에 실제 수신자가 있는지는 문제 되지 않아요. 저는 현상학자이므로 에포케(판단을 중지하고 현상 자체에 집중하는 것)를 실행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존재를 “게임에서 제외시키는” 거죠. 이 타자 —“신”이든 아니면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여하든 간에— 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종교현상학의 과제는 호명 현상 자체와 그것이 수신자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기술하는 거니까요.

- 선생님은 칸트에 오랫동안 관심이 있으셨죠. 칸트에 대한 선생님의 독창적 독해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칸트를 법칙의 입법자나 부여자인 자아를 상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발견은, 법의 부여가 오직 법 자체에만 속한다는 거죠.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한가요?

제가 칸트로부터 배운 것은 바로 데카르트와 후설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줌, 자기 부여의 원초적 가능성 말이지요. 칸트에서는 그것이 법 자체의 스스로 주어짐으로 나타나죠. 데카르트와 후설에서는 이런 자기 부여가 자아에 속하고요.

어떤 의미에서 법의 부여가 오직 법 자체에만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칸트가 《도덕형이상학 정초》에서 말하듯이, 윤리학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그 어떤 곳에 특정한 지지점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신이 최고선이자 모든 도덕의 토대로서 기반이 되는 신학적 도덕에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인간학적 탐구에서도 그런 지지점이 발견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런 이유로 법 외부에는 법의 주체가 없어요. 신도, 인간도 법의 주체가 아닙니다. 도덕법이 그 자신의 주체예요. 법의 수신자, 정언명령의 수령자가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에게, 저에게로 향해있죠.

이 명령은 항상 이인칭 단수로, 성서의 십계명처럼 표현되지요. 물론 수신자가 있어요. 법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부여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인 모든 인간 수신자에게 자신을 부여합니다.

제 첫 번째 학술 작업은 칸트의 프랑스혁명 개념에 관해 다룬 거예요. 테러에 관한 칸트의 흥미로운 비판이 있어서 그 주제를 다뤘지요. 그다음, 법의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칸트에게 도덕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근본악이 무엇인지, 근본악으로서 테러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런 이유로 《법의 선물(Le Don de la loi)》(1999)을 쓰기로 결심했어요. 물론 이것은 캄보디아, 마오주의 중국, 스탈린주의 러시아에서 발견되는 전체주의적 테러와 밀접하고, 이 근본악의 문제는 명백히 제 가족의 나치 홀로코스트 경험과 관련되어 있었죠.

저는 왜 그 후 칸트에서 데카르트와 현상학으로 이행했을까요? 악의 기원 문제를 심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칸트의 근본악 사유에 내재한 어떤 결함들의 결과였죠. 그의 사유가 악의 기원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악과는 다른 무언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원은 감정의 문제죠. 근본악의 기원은 증오예요. 칸트적 사유의 장 안에 머물러있다면 증오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상학으로 이행했어요. 당시 미셸 앙리와 메를로-퐁티도 읽고 있었거든요. 정감성의 현상학에 포함된 증오의 현상학을 정교화하려 시도했죠. 정감성은 항상 우리 살에서 비롯하는 육체적 효과들, 인상들과 관련해요. 이 살은 살아있는 누군가의, 독자적으로 살아있는 개별자의 살이에요. 바로 나, 나 자신인 살 말입니다. 증오, 사랑, 질투, 혐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 모두가 나 자신의, 살아있는 자아의 경험 일부예요.

- 레비나스도 강조하듯이, 데카르트는 한편 코기토로서 사유하는 자아를 내세우지만 동시에 무한자로서의 신에 의존하는 주체를 제시하지요. 선생님은 그런 신에 대한 의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더 급진적인 에포케를 실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에포케를 통해 촉각과 살의 차원으로 나아가시는 듯하고요. 독자들은 이런 감각적 차원이 너무 취약하고 자아를 구성하기에 불충분해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와는 여러 점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그는 위대한 사상가예요.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와 달리] 무한자로서의 신에 의존하는 윤리적 주체를 제시하지 않았죠.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의, 프랑스어로 autrui, 타인의 얼굴이에요. 신의 얼굴이 아니고요. 레비나스는 매우 흥미로운 《탈무드 강해》에서조차 신에 대해 그리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전체성과 무한》의 첫 페이지에서 전적 타자, 절대 타자인 타인, 다른 인간을 말하지요. 즉, 신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전혀 데카르트적이지 않아요. 데카르트가 〈셋째 성찰〉에서 말하는 무한한 타자는 명백히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분이죠.

따라서 신이라는 이름에 대한 언급 없이도 레비나스를 읽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레비나스의 《관념에 도래하는 신에 관하여》에서 매우 흥미로운 언급을 찾을 수 있어요. 인용하자면 “타자들과는 다른 타자, 이 타자와는 달리, 타자들의 타자성에 앞선” 것을 말하지요. 매우 이상하죠. 그는 주석을 답니다. “이 타자와는 달리(cet autrement qu‘Autre)라는 것은 타자의 얼굴(visage de l‘Autre)과는 다르다. 이 타자와는 달리라는 것은 부재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초월적이다.”

이 근원-타자성(arch-alterity), 이 타자와는 다른 것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이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것”이에요. 신은 무한한 타자가 아니라 또 다른 타자, 더 초월적인 타자인 셈이죠.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데카르트와 결별합니다. 신은 그에게 “부재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초월적인”, 항상 사라지기 직전에 있는 분이에요.

질문의 두 번째 부분은 촉각의 우위에 관한 것이네요. 이런 감각적 차원이 자아를 구성하기에 너무 취약하고 불충분한 것은 아닌지 물으셨지요. 먼저, 고대 철학 가운데 가장 현상학적인 저작 중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다른 모든 감각이 촉각의 다른 양태들이라 말해요. 촉각이 다른 모든 감각의 토대라는 거죠. 그는 살아있는 존재가 촉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도 말했어요. 말을 못 하고, 앞을 못 보는 사람들도 여전히 살아가지만, 촉각을 억제하면 살아있는 존재는 즉시 죽는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지지하고 보존하는 감각이에요.

촉각의 우위는 후설에게도 결정적이죠. 이 점에서 그의 모든 후예와 달라요. 후설이 쓰듯이 현상학적 자아는 Ichleib, 자아-살이라 말할 수 있어요. 자아가 자기 살에 대한 경험을 갖는 주요한 방식도 촉각이지요. 특히 “내가 만지고 있는 나를 만지는” 매우 특별한 경험에서, “내 오른손이 내 왼손을 만지고 있을” 때 말이죠.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키아스마’라 부르는데, 교차, 얽힘(entrelacs)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그것이 우리 경험의 뿌리예요. 한국어로 번역된 제 주저 《자아와 살》(도서출판b)에서 이런 문제들을 발전시키려고 했지요.

프로이트도 촉각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부여하죠. 《자아와 이드》라는 논고에서 자아가 촉각적 기원을 갖는다고 말해요. 곧 “표면의 투사”인데, 내가 스스로를 만질 때 그것은 나 자신의 피부 표면의 투사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몸을 만질 때, 촉각적 표면을 발견하고 정신적 차원으로 투사하는데, 그것이 자아의 기원이죠.

저는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프로이트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감각적 차원은 전혀 취약하지 않아요. 살아있는 존재가 삶/생명에 머물고 자기 자신의 몸에, 타자의 존재에, 세계에 자신을 열어가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에요. 우리 시대의 드라마 중 하나는 촉각에 대한 시각의 점증하는 우위, 기 드보르 같은 사람들이 스펙터클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해야겠어요. 스크린 기술들은 스펙터클에 대한 우리의 소외를 점점 더 증가시키고 있죠.

- 이제 종교적 쟁점들로 넘어가겠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신-담론일 것입니다. 선생님은 《반역자 모세》에서 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진술을 하셨어요. 많은 신자가 자신들의 신을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구성한 신과 동일시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 모든 것을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 전지전능한 하느님 말이지요. 실제로 한국의 대다수 신자들과 교회들이 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도 이와 같고, 이는 거의 존재신학(onto-theology)과 같아요. 선생님은 이것이 토라가 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 같은데요.

전능하고 무소불위한 신으로서의 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한 신으로서의 신이 모든 것을 아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제 친구인 아일랜드 철학자 리처드 카니가 말하는 바와 같이, 신은 ‘전-신’(Omni-God)일까요?

전-신은 신학자들의 신, 즉 존재신학의 신이에요. 고대 후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같은 일부 유대 사상가들이 유대 신앙과 그리스 존재론을 결합하려 시도했을 때 구축되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과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이 선택한 길이었으며, 이슬람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요. 서구의 존재신학은 그리스 존재론의 유산이죠. 그리스 사상가들은 자기들이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지는 않았음에도 말이지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보면, 세계를 형성한 신 데미우르고스가 전능한 신은 아닙니다. 플라톤이 코라(Khora), 즉 신의 체계화 계획에 저항하는 ‘질료’라고 부르는 것의 저항에 제한받지요. 인간의 창조조차 신의 작업이 아니에요. 그는 그것을 자신의 우둔한 조력자들에게 맡기지요.

저는 신자들이 신을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건설한 이 우상, 즉 모든 것을 안다고 여겨지는 주체인 전-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실수이자 오해라고 봐요. 출애굽기에 유의미한 구절이 있죠. 떨기나무 사건과 모세의 소명 에피소드 앞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출 2:23-25, 새번역)

이 구절은, 노예들의 호소와 부르짖음이 신에게 올라가고, 신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전까지는 이 언약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어요. 만약 신이 그들의 불평을 들어야 하고, 그들의 고통과 비참함을 보아야 한다면, 신이 아직 그런 고통과 비참함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죠. 제 해석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전-신의 형이상학적·존재신학적 개념을 피하는 신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성서의 신은 모르는 부분, 망각의 부분으로 특징지어져요. 고통받는 인간으로부터 들려오는 부르짖음에 의존하여, 기억하시고, 보시고, 들으시고, 비로소 아시는 바로 그 신이 되는 셈이지요. 따라서 그분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으신 분입니다.

이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텍스트가 있어요. 셸링의 《슈투트가르트 강의》에 ‘신 안의 무의식’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 있죠. 다른 텍스트에서 그는 그것을 그룬트(Grund), 즉 신 내부의 ‘어두운 근거’라고 부르지요. 신은 자신의 무의식의 어두운 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아남네시스(anamnesis), 즉 상기예요. 그러고 나서 신은 모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자기 백성을 해방시킵니다.

신의 전능성 문제는, 신적 전능성과 악이라는 것을 화해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함으로써 비극적으로 재점화돼요. 칸트도 모든 신정론의 시도가 실패하는 것과 관련한 짧은 글을 썼지요. 만약 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왜 아우슈비츠를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굴라크(소련의 강제수용소), 캄보디아 대학살, 모든 시대의 대량 학살을요.

악이 있음은, 전능한 신에 관한 신학 전반에서 중요한 문제예요. 처음에 마니교도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플로티노스와 그리스 존재론을 통해 발견한 생각, 곧 악이 ‘무’라는 이상한 생각을 고안하여 마니교에서 벗어났죠. 저는 악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신의 어떤 무능력을 인정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신에 대한 우리의 형이상학적 개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신은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매우 고대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요. 탈무드, 즉 토라에 대한 고대 유대인의 독법에 따르면, 샤다이를 ‘충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 다이(dai)와 연관시켜 해석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위해 충분한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죠. 딱 충분할 만큼. 그러나 너무 많지는 않게요. 모든 능력도, 너무 많은 능력도 아닌. 모든 이를 위해 딱 충분할 만큼만의 능력이 있다는 말이지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가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라는 매우 적절한 개념을 고안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거예요. 정말 좋은 어머니는 덜 좋으면서 나쁘지는 않은 어머니라는 뜻이죠. 어머니는 충분히 좋은 만큼 좋아야 해요. 신은 히브리 성서에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에요. 성별과 아무 관련이 없으시지요. 그러나 그분은 충분히 좋은 신, 충분히 능력이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즉, 성서의 신은 전능하지 않으시지만, 그분을 부르는 자들을 도울 만큼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를 들어 코란에 나오는 신의 자기 정의 중 하나가 있어요. “나는 나를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는 자이다.” 신은 그분을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선생님의 저작 중 종교적 폭력과 증오를 다룬 작업이 오늘날 특히 중요해 보입니다. 최근 한국에는 극우 집회가 널리 진행되고 있는데요. 이 운동을 이끄는 이들 중에는 종교 지도자도 있습니다. 정치적 증오는 어떻게 종교와 연결되는지요? 종교적 폭력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저는 이 현상에 관심이 큽니다. 2015년 지하디스트 공격 이후 짧은 책 《지하디즘: 희생의 귀환(Djihadisme: le retour du sacrifice)》(2017)을 썼는데, ‘이슬람 테러리즘’을 분석하려 시도했죠. 저는 그것을 ‘테러 장치’로 정의합니다. 이 장치(dispositif) 개념은 미셸 푸코에게서 빌려왔는데요. 푸코는 배제·통제·안전 등의 장치들에 대해 말해요. 《그들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했다》(영어판: The Logic of Hatred)에서는 박해와 테러의 장치라 부르는 다른 종류의 장치를 분석했죠.

박해 장치와 종교적 전통의 창시에 관한 문서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 속 어떤 구절로도 중세의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장치는 단지 텍스트의 한 부분을 찾아내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뿐이지요. 코란도 마찬가지로, 많은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며, 우리는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기 위해(“종교 문제에는 강제가 없다”), 반대로 최악의 광신주의를 고백하기 위해 그런 구절을 참조할 수 있어요.

마르크스도 《공산당선언》이나 《자본론》에서 스탈린주의나 마오주의 테러를 미리 정당화할 테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어떤 창시적 저작들을 참조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 시도한 것은 박해 장치였지요. 따라서 성서나 코란의 메시지를 존중한다는 것은 메시지를 해체하려 하는 일일 거예요. 즉, 그것들을 다르게 읽어서 이 텍스트들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자 하고, 그것들을 무엇이든 정당화하는 단순한 인용구 저장소로 만드는 대신 모든 복잡성과 모든 의미의 풍부함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폭력 현상의 본질에 대해 바로 이 지점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어요.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에서 공통된 점은 유일신교적 신앙이죠. 이들이 유일신교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종교는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들, 심지어 이집트 종교들도 유일신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힌두교 역시 일종의 유일신교지요. 다양한 종교에 속한 많은 신자와 사상가들에게는 신들의 여러 이름이 단지 하나의 신을 지칭하는 이름들일 뿐입니다. 힌두교에서 어떤 이들은 시바라고 부르고, 다른 이들은 비슈누라고 부르죠. 우리는 그것을 ‘포괄적 유일신교’라 부를 수 있어요.

이것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배타적 유일신교와 달라요. 그들은 오직 하나의 이름 또는 몇 가지 이름만이 신의 참된 이름들이고, 다른 것은 모두 우상들의 이름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일하고 참된 종교와 이교도들, 우상숭배자들, 불신자들의 모든 거짓 신들 사이에 매우 가혹하고 경직된 대립을 설정하죠. 포괄적 유일신교와 배타적 유일신교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얀 아스만(Jan Assmann)에게서 빌려온 것입니다.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 사이의 동일한 경계선들이 그들 자신의 장치 내에서 재등장하여 유혈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을 대립시켰고,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시아파와 수니파를 대립시켜요. 그들이 같은 신을 숭배하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금지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가진 신적인 것의 진리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불관용·광신주의가 유일신교에, 또는 적어도 서구 전통의 배타적 일신교에 내재적이라고 결론지어야 할까요?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먼저 비배타적 유일신교에서도, 예를 들어 오늘날 힌두교에서도, 오늘날 인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폭력·불관용·광신주의의 동일한 현상을 찾을 수 있죠. 한편, 배타적 유일신교에서조차 다른 전통과 신의 다른 이름들에 대한 환대를 찾을 수 있어요. 저는 종교적 광신주의와 폭력의 원인이 진리와 신적 유일성에 관한 제한적 개념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가 다수를 배제한다고 여기는 자들, 참된 신이 거짓 신들, 우상들과 절대적으로 대립한다고 여기는 자들, 이들은 신적인 것에 대해 착각하고 있어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고 다른 것들은 모두 거짓이라 말할 때, 그들은 신의 유일성을 산술적 단위로 생각합니다. 신을 하나의 사물로, 세계의 다른 객체들 사이의 한 객체로 만들죠. 신성에 대한 오해예요. 신적인 것은 세계 내부의 사물이 아니거든요. 신적인 것의 유일성은 산술적 수량으로 환원될 수 없어요. 서구 유일신교 전통에는 신의 단일성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려 시도한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신주의의 뿌리인 신적 형상의 배타적 전유로부터 신적 형상을 보호하려고 시도하죠. 그것이 신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 예를 들어 주신다면요?

13세기 이슬람의 뛰어난 사상가 이븐 아라비는 신이 “자신의 계시 형태들로 인해 다수적으로 나타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남는다”고 말했죠. 신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다수예요. 만약 신이 다수가 아니라면, 하나가 될 수 없었을 테지요. 셸링의 작품 《계시 철학》에서도 같은 발언을 찾을 수 있어요.

이븐 아라비는 코란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향하든지, 거기에 신의 얼굴이 있다.” 그는 신이 우리가 숭배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가 숭배하는 그 하나라고 결론짓습니다. 따라서 “모든 숭배에서 사랑받는 것은 참된 신인 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우상 조각상들을 숭배하고 여러 신들의 존재를 믿는 숭배에서조차도 말이다”라고 단언하는 게 가능해져요. 신이 하나의 신이라면, 신성의 모든 얼굴과 모든 이름은 하나의 신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모든 숭배는 같은 신의 참된 숭배로서 존중받을 수 있지요.

그러면 이븐 아라비는 왜 그렇게 많은 신자가 다른 믿음들을 그토록 폭력적으로 거부하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놀라운 답변을 제시해요. “자신의 믿음에 포함된 신성만을 숭배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숭배하는 것이다.” 즉, 광신자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내는 나르시시즘적 주체지요. 만약 이 사람이 분노·시기·증오로 가득 차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가서 모든 불신자들을 죽이라”고 말하는 분노의 신의 이미지를 창조하죠. 자신의 분노, 질투, 증오를 ‘신의 뜻’이라고 거짓으로 부르는 가상의 우상에 투사하여 자신의 모습, 분노, 질투, 증오를 숭배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며, 이는 정신분석학이 편집증 사례에서 분석한 메커니즘이에요. 프로이트에 따르면, 편집증 환자는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의 증오를 그들에게 투사하여, 망상 가운데서 그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다고 상상하죠. 그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파괴하려 한다고 상상하기에 그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치 지도자들이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같은 말이죠. 친위대(SS) 지도자 히믈러(Himmler)는 “우리 독일인들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이 민족, 유대인들을 파괴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다”고 말했지요. 이런 투사가 정치, 종교, 개인의 삶에서 폭력과 광신주의의 모태가 됩니다.

- 선생님이 비교적 최근에 쓰신 글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행한 일에 대한 슬픔을 표현한 것을 읽었습니다. 저도 그렇고, 한국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반전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선생님은 다윗이 골리앗이 되어버린 참상을 말씀하셨죠. 이런 시대에 어떻게 자신의, 자기 민족의, 국가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균형 잡힌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피해자가 범죄자가 되거나 범죄적 정치의 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일이죠. 대다수는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이, 예를 들어 강간, 고문, 대량 박해 등의 피해자가 그것을 반복하면서 고문하는 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피해자가 자신이 이전에 당했던 것과 같은 폭력을 다른 사람에게 반복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역사에서, 심지어 많은 개별적 사례에서도 매우 빈번하게요.

최근 프랑스에서는 아내에게 약물을 투여하고 많은 사람에게 그녀를 강간하도록 내준 남자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재판 중에 그가 어린 시절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가해자와의 동일시’ 개념으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어요. 프로이트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인 페렌치로부터 나온 개념인데요. 누군가가 공격당했을 때, 특히 성인보다 더 취약한 아이의 경우, 완전한 붕괴, 매우 심각한 우울증,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어요. 붕괴를 피할 수 있는 가능한 방법 중 하나는 (물론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피해자였던 일부 사람들이 가해자의 위치를 취함으로써 공격을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죠. 홀로코스트 이후, 서구 세계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절대 다시는…”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다시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처음엔 세상 누구에게도 절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수 있어요. 즉, 우리가 어디서든 다른 대량 살상을 피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불행하게도 이 “절대로 다시는…”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대로 다시는…”이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예요. 즉, ‘우리는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효율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국가를 건설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다시 공격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적을 분쇄할 수 있어요.’ 저는 이 두 번째 해석 방식이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지배적이며, 민족주의와 우월주의를 부추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잘못된 해석이 아니죠. 홀로코스트 기억에 대한 왜곡이에요.

10월 7일에 일어난 일(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들었을 때, 저는 세계의 모든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뿐 아니라 포그롬(제정러시아의 유대인 박해)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죠. 집에 있는 무고한 민간인들, 남자·여자·아이들이 야만적인 무리에 의해 공격당해 강간당하고, 고문당하고, 절단당하고, 산 채로 불에 타는 일들….

그 후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문제는 우리가 증오에 증오로 응답해야 하는가입니다. 누군가가 타인에 의해 심하게 공격당했을 때, 분노와 복수의 욕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분노는 증오가 아니죠. 이 두 감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있어요. 우리는 불의가 행해졌을 때 분노를 느낍니다. 분노에는 정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요. 성서는 ‘하느님의 분노’에 대해 말하지요. 그러나 증오는 다르며, 성서는 하느님이 “증오하는 분”이라 말한 적이 없어요. 실제로 증오는 정의의 어떤 관념과도 연결되지 않죠.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의 유일한 욕구는 상대가 무엇을 했든 상관없이 그 증오의 대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은 응답할 권리가 있었어요. 어떤 국가든 자국 영토에서 그런 식으로 공격당하면 응답해야 합니다. 이 응답은 표적화되고 받은 공격에 비례해야 하지요. 그다음엔 협상을 시도하고 정치적 해결책을 찾아야 해요. 이스라엘의 경우, 두 민족이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정의롭고 지속적인 정치적 해결책은 이스라엘 옆에 평화로운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하는 ‘두 국가’ 해법이었죠. 불행히도 이 전망은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증오에 증오로 답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증오는 무제한이기 때문이에요. 항상 스스로 증식하죠.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할 때, 결국 당신은 미워하는 사람과 닮아가고, 증오의 대상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가해자와의 동일시 개념을 발견하기에 이르지요.

이스라엘인들이 나치라거나, 그들이 자신들을 나치와 동일시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스라엘이 여전히 네타냐후와 그의 끔찍한 전쟁에 반대할 수 있는 민주주의국가로 남아있는 한,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의 구별이 갖는 중요성이죠. 민주주의 사회에선 최근 한국 사람들이 보여주었듯이 정부의 정치를 바꾸는 일이 여전히 가능합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고요.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고려하면 더 명확하게 드러나죠.

저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무런 제한도 없는 증오와 복수의 욕구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해요. 하마스는 거의 1천2백 명의 이스라엘인을 죽였는데, 지금 이스라엘인들은 가자에서 5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을 죽였죠.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의 손자 중 한 명인 라멕이 떠오릅니다. 그는 “나는 단순한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나는 77배로 복수했다”고 말하잖아요. 이 사람은 대홍수 동안 하느님의 분노로 매우 빠르게 멸망할 악한 인류를 상징하죠. 우리가 라멕의 법칙, 끝없는 복수의 법칙을 절대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증오의 법칙이고, 증오는 근본악이기 때문이에요.

■ 주

1) 유대교 의례에서 중요한 인도자 역할을 맡아 전통적인 기도와 낭송을 통해 회중의 영적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종교음악가를 일컫는다.


김동규
독립연구자.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