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 ― 거북에게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417호 구선우의 동물기]

2025-07-28     구선우

고모네 집에는 마흔 살에 가까운 거북이가 산다. 사촌 형이 아기였을 때, 어린이날 기저귀 사은 행사로 받아 온 두 마리 중 한 마리다. 1987년부터 고모네 가족과 함께했다. 한 박스에 한 마리를 받을 수 있었고, 한 마리만 데려오면 외로울 것 같아서 두 박스를 사 왔다고 한다. 두 거북 중 한 마리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 남은 한 마리는 여전히 건강하게 가족 곁을 지키고 있다.

사촌 형이 결혼을 앞두고 예비 형수님을 집에 데려왔을 때 일어난 일이다. 형수님은 수조 속 거북을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 “이 거북이 이름이 뭐예요?” 그 순간, 모두가 잠시 말을 잊었다. 30년 넘게 함께 살아온 거북이에게 한 번도 이름을 붙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녀가 모두 결혼하여 출가했으나, 여전히 이름도 없이 고모와 고모부 곁을 지키고 있는 거북이. 고모는 “얘는 나보다 오래 살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민물 거북의 수명은 오래 살면 35-40년이라고 하니, 현실적으로는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듯하지만, 정말 고모 곁에 더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름도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이 존재를 생각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거북에게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수조 속에서 단조롭게 보냈을 40년 가까운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종에 따라 100년, 200년을 사는 거북은 시간을 천천히 누린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기도 하는 이 느린 생명에게 하루는 어떤 무게와 감각으로 다가올까.

거북이 이름 짓기: 수직적 관계 맺음을 넘어서

사이 몽고메리가 쓴 《거북의 시간》(돌고래)에는 미국 뉴잉글랜드 야생 거북 보호 기관에서 2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하며 겪은 일들이 담겨있다. 이곳에는 주로 산란기에 이동하다 차에 치인 거북이 많다. 불법 포획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다 적발된 개체, 기형을 가진 개체 등 다양한 거북이 구조된다. 처음에 거북들은 구조된 순서대로 번호가 붙여질 뿐, 이름을 얻지 못한다. 최소 72시간이 지나야 이름을 얻는다.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부터 치료 과정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되기에, 일찍 떠나보내야 할 때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보호 장치다.

생각해보면, 반려 문화가 자리 잡기 전 1980-1990년대에는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고 키우는 일이 흔했다. 고모네 거북도 ‘거북아’라는 호칭 말고 인간식 이름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물은 가족이면서도 어딘가 ‘동물’로 남아있었다. 특히 파충류나 어류 등, 인간과 계통적으로 멀리 있는 동물일수록 이름을 얻기가 더 어려웠다. 시간이 흘러서 이름을 붙여주는 문화가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요즘은 이름만 들어서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름을 짓는 이와 받는 이, 두 존재 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감정적 몰입과 책임의 시간도 함께 시작된다. 동물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는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된다.

다만, 인간에게 중요한 감정이입의 도구인 이름 짓기가, 진정한 사랑 없이 감정만 소비하는 놀이로 끝나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나가는 개미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주는 다섯 살 아들을 보며, 이름 짓기가 때로는 인간의 일방적 행위일 수 있겠다 싶었다. 1980-1990년대의 이름 없는 돌봄과 오늘날의 이름 짓기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수직적 관계 맺음이 아닌, 함께하는 시간과 곁을 지키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주체의 중심축 이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미 없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동물을 받아들이고 마땅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거북에게 말 걸기: 인간 중심의 지식을 넘어서

거북은 파충류(파충강) 아래 거북목에 속하는 동물로, 서식지와 생활 방식에 따라 세 부류로 나뉜다. 육지거북(tortoise)과 바다거북(sea turtle), 반수생 거북(terrapin 또는 freshwater turtle)이다. 육지거북은 숲·초원·사막 등 육상에서 생활한다. 갈라파고스땅거북ㆍ알다브라땅거북 등 일부 대형종은 150-200년 넘게 생존하기도 한다. 한국에는 자연적으로 서식하지 않으나, 최근 반려동물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바다거북은 바다에서 생활하다 알을 낳기 위해 해변으로 올라온다. 바다거북은 다른 거북에 비해 기후변화에 취약하다. 알을 덮고 있는 모래의 온도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특성 탓이다. 극심한 성비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으며, 해수면 상승으로 해변의 산란지를 잃고 있다. 그 결과, 전 세계에 서식하는 7종 모두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하천·늪·저수지 등 담수에서 주로 생활하는 반수생 거북은 육지와 물을 오가며 살아간다. 한국의 대표 토종 반수생 거북으로 남생이와 자라가 있다. 이 중 남생이는 한반도 고유종이자 천연기념물, 멸종위기종으로 보호받고 있다. 대표 외래종은 붉은귀거북. 1990년대 이후 애완용으로 전국에 퍼진 후 방생과 유기 때문에 토종 남생이와 서식지 경쟁을 벌이면서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붉은귀거북이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되어 2001년부터 수입과 사육이 금지되면서, 중대형종 반수생 거북 페닌슐라쿠터가 주로 들어오고 있다. 페닌슐라쿠터는 성체가 됐을 때 길이가 30센티미터 이상이며, 수명도 30-40년에 달한다. 작고 귀여운 모습을 보고 데려왔다가, 긴 수명과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 때문에 키우기가 곤란할 수 있어 분양에 신중해야 한다.

거북은 시대를 넘어 오랜 세월 장수와 느림, 지혜의 상징으로 인간 곁에 존재해왔다. 다양한 민속 문화와 신화에서 세상을 떠받치는 존재, 인내와 보호, 영원을 상징하는 존재로 거듭 등장한다. 특히 인도, 중국, 북미 원주민 등이 전하는 창조 신화에는 세상을 떠받치는 ‘세계 거북’(World Turtle)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 신화에서는 힌두교 주신(主神) 비슈누의 두 번째 화신인 쿠르마(Kurma)가 거대한 거북 모습으로 등장하여, 산과 신들을 떠받치는 역할을 맡는다. 중국 신화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거북 오(鼇)가 나오고, 세상의 창조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제시되기도 한다. 거북은 단순히 느린 동물이 아니었다. 세상의 질서와 생명의 기원을 품고서 신화·예술·종교 가운데 살아 숨 쉬며 꾸준히 존경받아온 특별한 이웃이다.1)

여기까지는 인간 주체 중심으로 거북에 관해 탐구한 최소한의 지식이다. 묵묵히 인간 곁을 지켜온 이 작은 생명을 더 깊이 알려면, 이 앎이 거북을 주체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한 정보 축적을 넘어선 윤리적·철학적 태도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앞으로 인류에게 남은 과제는 피식민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말을 걸고,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타자가 말하도록 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라고 주장한다.2) 동물에 대해 말하는 작업이 아니라, 동물 스스로 말하도록 동물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동물은 말하지 않는다. 동물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동물의 응답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로 나아가자는 뜻이다. 인간 중심이 아닌 비인간 동물 중심으로 전환하자는 말이다. 이는 동물이라는 존재와 동물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하게 응답하면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는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애정을 품고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는 동물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기도 하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보호하는 일, 가정에서 함께하는 동물과 최선을 다해 교감하는 일 모두 이웃 동물에게 책임을 다하는 말 걸기의 실천이다.

거북의 시간: 생명체는 자기 세계를 갖는다

거북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흐를까? 대답의 주체를 거북에게 내어줄 때 비로소 응답이 가능한 물음이다. 에스토니아 출신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1864-1944)은 1934년 ‘움벨트’(Umwelt) 개념을 처음 제안했다. 움벨트는 각 동물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고유한 세계, ‘감각의 우주’를 뜻한다. 생명체를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로 보지 않고, “그 생명체 자신이 중심을 이루는 그런 고유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체”로 보는 데서 출발하는 혁명적 개념이다.3) 각 동물 종, 심지어 개체마다 다른 독특한 감각 세계를 의미한다. ‘환경 세계’ ‘자기중심적 세계’로도 번역하지만, 생태 이론에서는 주로 고유명사 ‘움벨트’를 그대로 사용한다.

어린이가 보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세상은 어른이 보고 경험하고 이해하는 세상과 다르다. 비인간 동물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살아간다. 이를테면, 개는 인간보다 수천 배 예민한 후각을 가졌으니, 냄새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고래는 소통할 때 초음파를 사용한다. 코끼리는 코와 발을 통해 땅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해서 먼 곳의 소식을 듣는다. 이처럼 자신만의 감각과 신경 체계로 살아가는 비인간 동물은, 인간의 경험 세계와 다른 감각 우주로서 움벨트를 갖는다. 거북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전혀 다른 속도와 리듬, 감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학적으로 신진대사 속도와 신경계 정보 처리량은 시간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 파리처럼 대사 속도가 빠른 소형동물은 시간당 많은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 인간보다 시간을 훨씬 느리게 인지하는 것이다. 마치 슬로모션과 같다. 반면에 신진대사가 느려서 1분에 심장이 몇 번 뛰지 않을 정도로 낮은 활동을 보이는 거북은 신경계에서 처리하는 초당 정보량이 적다. 인간이 느끼는 것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른다고 인식하는 셈이다. 즉, 인간의 24시간은 거북에게 주관적으로 더 짧게 느껴져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북이 겪는 하루의 무게를 인간이 겪는 하루의 무게와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시간을 빠르게 경험하게끔 하는 물리적 신경 메커니즘은 거북의 주관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과학적 토대이다. 시간 인식은 빠르고 삶은 느리게 나타난다.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면서 환경 변화에 장기간 적응하게 만드는, 장수하는 종의 생존 전략이다. 거북은 느린 동물이지만 엄청난 회복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머리가 잘린 후에도 5일간 심장이 멈추지 않은 1957년 악어거북 사례도 있다. 거북에게는 자연사가 없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며, 사이 몽고메리는 “거북은 사실상 시간을 멈출 수 있다”고 표현한다.4)

자신만의 시간 감각으로 살아가는 거북은 느린 움직임을 통해 삶의 깊이와 지속성을 보여준다. 인간 관점에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으나, 인내 그리고 자연과의 공존을 배울 수 있다.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과 미하엘 엔데의 《모모》(비룡소)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과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대표적 이야기다. 《모모》에서 시간 도둑들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훔친다. 주인공 모모는 느림과 인내를 통한 대화와 공감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어른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아가는 회색 신사들에게 쫓기기 시작하는 모모를 도와주는 존재가 ‘카시오페이아’라는 거북이다. 카시오페이아는 자신만의 속도로 느리게 걸으며 모모를 시간의 근원지로 인도한다. 회색 신사들은 조급하게 이들을 쫓는다. 한마디로,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이다.5) 비록 상상 속 이야기지만, 독자는 카시오페이아를 통해 조급함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을 음미하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게 된다.

인간이 거북의 시간과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거북은 같은 시공간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존재를 공유하면서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함께 누리면 좋겠다. 인간이 거북의 세계를 존중하려면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인간의 시간: 기술이 빼앗아 간 세계

그동안 서울동물원, 청주동물원, 반려동물 판매 센터, 파충류 전시관 등 다양한 장소에서 거북을 만났다. 실내동물원 먹이주기 체험 동물로 만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전한 마음이 들었고, 야생 거북을 직접 보고 싶었다. 지역의 생태습지공원을 방문해, 아들과 함께 습지원 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생태 교육을 받은 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거북이연못’을 찾았지만, 직접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햇빛이 강한 날에 바위 위에서 일광욕을 즐긴다고 들었는데, 마침 비가 온 상황이어서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에도 거북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의 끈기는 여기까지였다. 인간의 조급한 마음에, 거북은 끝내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현대사회는 더욱더 빨라지고 있다. 거북이 사진을 보려고 굳이 도서관에서 파충류 도감을 찾아볼 필요도 없다. 누구나 검색 한 번이면 된다. 심지어 거북을 구워 먹는 먹방을 볼 수도 있다. 현대의 미디어는 시간을 단축하고, 더 나아가 시간을 빼앗고 있다. 유튜브 쇼츠,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등 숏폼 콘텐츠는 짧고 강렬한 자극을 통해 이용자의 집중 시간을 분산한다. 뇌가 녹는 것을 뜻하는 ‘브레인롯’(brainrot) 영상 콘텐츠가 넘쳐나는 현실이다. 이제 사람들은 읽고 생각하기보다, 미디어의 빠른 속도에 감각을 맡긴 채 보고 듣는 일에 몰두하게 됐다.

인간의 움벨트 속 시간이 위기에 처해있다. 인간은 거북의 세계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거북이연못에서 거북을 대신해서 만난 것은 외래종 물살이 배스였다. 연못에서 만나지 못한 거북도 외래종 붉은귀거북이라고 들었다. 배움을 도와줄 거북의 생태계는 이미 신음하고 있다.

기후위기를 막아낼 마지막 기회라는 외침. 10년, 20년 안에 기후재앙이 임계점을 맞이하리라는 경고는 위급한 지구 환경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외침조차도 바쁘게 돌아가는 인간 중심의 세계가 만들어온 조급증을 드러내는 결과인지도 모른다. 차분히 자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길을 찾기보다는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이 해결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술패권주의가 묻어있지는 않은지. 결국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

하나님과 지구의 시간: 공존으로 가는 길

기독교 신앙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벧후 3:8)이라는 초월성에 기대고 있다. 이 때문에 완성될 피안 세계를 바라보며 이세계(異世界)로의 이동을 꿈꾸는 듯한 희망을 품기도 한다. 이 시선은 종종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시간과 공간을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종말론을 잘못 받아들이면, 지구의 멸망을 불가피하게 생각해서 인간이 자연 세계에 끼친 영향에 책임지는 일을 부차적으로 취급하고 만다.

하나님의 시간은 단순히 초월적이지 않다. 미래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에 깊이 스며들어, 역사와 일상의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변화를 일으킨다. 성육신은 영원의 말씀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과 함께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중심이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느니라”(골 1:17)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이 이 세계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단순히 지나치는 무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이 실현되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우리는 피조물과 지구를 향한 책임을 결코 회피할 수 없다. 이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맺는 자연과의 관계, 모든 생명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먼저 이름을 지어주셨고, 동물과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권한을 맡겼다. 이 일은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자격증을 얻은 사건이 아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은 책임과 의무로서 주어졌다. 창세기가 말하는 이름 붙이기는 관계 맺기와 돌봄, 존재를 향한 존중을 담고 있는 행위다. 이름을 붙이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우리와 관계를 맺는 존재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인간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이 태도를 회복한다면, 인간은 지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열린책들)에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을 조명한다. 이 괴물은 독일 잉골슈타트에서 태어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스위스·영국·러시아·북극을 떠돌며 유럽의 찬란하고도 장엄한 자연 가운데 끝없는 고독과 소외를 경험한다. 자신을 창조한 박사를 비롯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존재로 남는다. 괴물이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요구한 것은 한 가지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나누며 함께 살 여자를 만들어 달라는 얘기요.”(190쪽)

괴물이 간절히 원한 것은 감정을 나누면서 함께 살아갈 이웃, 진정한 관계와 인정이었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 존재의 외로움과 고통은, 인간의 조급증과 무관심 때문에 자연과 비인간 동물이 겪는 소외와 닮아있다.

우리는 자연을 단순히 이용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으로부터 경이로움을 느끼며 감탄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 자연을 우리 삶에 끌어들이고, 말을 걸면서 곁을 지키는 마음으로 거북에게 다가가야 한다. 진정한 공존을 시작하기 위하여.

■ 주

1) 거북에 관한 더 자세한 안내서로는, 전 세계 거북 300여 종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가장 권위 있는 도감인 Frank Bonin, Bernard Devaux, Alain Dupre의 《Turtles of the World》(Johns Hopkins Univ Press)을 참고하라. 국내 자료는 국립생물자원관에서 번역·배포한 CITES(국제 멸종위기종 무역 협약)의 《육지 및 민물거북류 식별 안내서: 거래되는 형태를 중심으로》를 추천한다. 문화사를 다룬 책으로는 역사학자 피터 영의 《거북》(가람기획, 2005)이 있다.
2) 가야트리 스피박, 태혜숙·박미선 옮김,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갈무리, 2005), 287쪽. 탈식민주의는 식민 지배의 영향과 잔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론이다. 현대에는 식민주의와 기후위기의 구조적 연관성을 분석하며 생태 담론 영역에서 활발히 적용하고 있다.
3) 야콥 폰 윅스퀼, 정지은 옮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도서출판b, 2012), 15쪽.
4) 사이 몽고메리 글, 맷 패터슨 그림, 조은영 옮김, 《거북의 시간》(돌고래, 2025), 33쪽.
5) 미하엘 엔데, 한미희 옮김, 《모모》(비룡소, 2024), 제10장 제목.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