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 한국인, 무국적자? 언제까지 증명해야 하나

[417호 법의 길, 신앙의 길]

2025-07-28     이희숙

살면서 극한의 두려움에 휩싸인 순간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윈난성 리장의 깎아지른 협곡을 오르며, 또 한 번은 첫 해외여행 당시 연길공항에서다. 사법시험을 막 마치고 연변 조선족 학생들에게 학습 봉사를 하는 교회 단기선교팀에 합류했다. 급하게 공연 준비도 하고, 선교가 금지되는 중국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도 익혀두었다. 연길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출국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표정에서 긴장감이 읽힌 걸까. 입국장을 오가던 공안 한 명이 다가왔다. 설마 했지만, 그의 발걸음은 수백 명 중 정확히 나를 향했고, 어둑한 방으로 혼자 끌려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캐리어에 성경책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뒤지던 공안은 《헌법의 풍경》이라는 에세이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당시 〈복음과상황〉에 연재하던 김두식 교수가 쓴 책이었는데 내용이 무엇인지, 왜 가지고 왔는지 등 질문이 이어졌다. 법과대학 학생이고 여행길에 읽으려 가져온 것이라며, 전혀 위험한 책이 아니라고 통역관을 통해 한참 설명한 끝에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정치범이 되는 건 아닌지, 한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타국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 공포는 아직도 생생하다.

여권을 빼앗긴 후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중국 입국 심사대에 선 탈북민 A의 눈빛에도 두려움이 가득했을까. 탈북민으로서 한국 국적을 얻었지만, 중국 공안을 피해 숨어 지내던 과거의 기억, 잡히면 북송된다는 트라우마가 A를 압도하고 있었다. 공안이 움츠러든 A를 순순히 내보낼 리 없었다. 입국 심사 과정에서 집중 추궁했고, 과거 탈북자 신분이 탄로 나면 북송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A는 ‘중국 국적자이고, 위조 여권으로 한국에서 왔다’라며 허위 진술을 했다.

과거 A는 북한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중국에서 북한으로 이주했다. 당시에는 접경지역에서 이주하기가 어렵지 않았고, 북한이 중국보다 좀 더 형편이 나았다. A는 북한인의 자녀이므로 쉽게 북한 국적을 취득했고,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법에 따라 중국 국적은 상실됐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말했고, 북한 국적 취득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공안은 A를 중국인으로 판단하여 한국 여권을 압수하고 석방했다.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안도의 한숨도 잠시. 빼앗긴 여권이 문제였다. A는 곧바로 한국 영사관으로 달려가 여권을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기댈 곳이 있어 다행이었다. 영사관 담당자가 공안청에 연락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중국 공안청은 A가 북한이탈주민으로 한국 국적자가 맞다면 중국 국적은 상실되니, A의 북한인 신분 증명 서류 등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국정원 등 관계 부처로부터 자료를 받아 중국 공안청에 전달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우리 정부가 자료를 제공하는 대신 A를 위장 탈북자라고 하면서 수사를 의뢰하고, 북한이탈주민 결정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졸지에 무국적 신세가 되어버렸다. A는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지만 다툴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기다리는 가족의 탈출이 더 시급했다. 오래 준비한 계획이 다 틀어졌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 숨어 지내며 가족의 탈북을 시도했고,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겨 가족들은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북한이탈주민 신분이 취소된 A만 홀로 중국에 남겨졌다.

시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입국한 A는 가족들과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이미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북한이탈주민 취소 처분을 다투어 지위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승산이 없다는 말에 소송을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과거 정착지원금 수령이 부정 수급이라며 북한이탈주민법 위반으로 수사가 개시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유죄판결을 받으면 강제 추방되어 가족들과 또 생이별하게 될 터였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이탈주민법률지원단, 동천, 태평양 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았다. A는 탈북 후 만주 일대에서 숨어 지내다 한국에 오기 위해 탈북 브로커에게 중국 여권과 비자 발급을 의뢰했고, 북한으로 이주하기 전에 중국 호구부(우리나라의 가족관계등록부)가 있었으므로, 브로커는 이를 이용해 중국 국적을 회복하여 여권을 만들어 주었다고 진술하고 있었다. 법률상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아니한 사람’만이 ‘북한이탈주민’인데, 공소사실은 A가 탈북 후 중국 국적을 회복하였으므로 외국 국적 취득에 따라 북한이탈주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탈북 후 ‘중국 국적 회복’이라면, 외국 국적 취득에 해당하고 그때부터 중국인이 된다. ‘중국 국적 회복’이 관건이었다. 기록을 한참 살펴보던 후배 변호사가 질문을 던졌다. “중국 국적을 회복한 게 맞을까요?” “A가 국적 회복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요?” 검찰도, A도 중국 국적을 회복했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호구부 회복이었다. 호구부 회복은 국적 회복과는 달랐다. 국적을 회복하려면 국적을 상실한 것을 설명해야 하고, 그렇다면 자신이 탈북민임을 말해야 하는데, 잡히면 북송되는 상황에서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신고할 리가 만무했다.

이제 중국 국적법 법리와 절차를 재판부에 설명하는 일이 남았다. 다행히 태평양 북경사무소 중국 변호사들이 나서주었고, 중국 국적법 이론과 판례, 중국의 국적 회복 절차와 호구부 회복의 의미, 관련 절차를 분석하고 자료를 제출했다. A는 태어나면서부터 중국 국적을 보유했지만, 북한 국적을 취득함에 따라 법리적으로 중국 국적을 상실했고, 형식상 호구부를 회복했다고 해서 국적이 회복된 것은 아니라고 피력했다. 이 사건에서 지면 A는 한국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A가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마다 한국은 등을 돌렸지만, 마지막으로 법원을 향해 지켜달라 호소했고, 재판부는 A의 손을 들어주었다. 검사는 이에 불복했지만, 대법원까지 3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진 끝에 A의 무죄가 확정되고 북한이탈주민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늦게나마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받고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국 여권을 빼앗기고 북한이탈주민에서 취소되어 타국을 떠돌아야 했던 세월에 대해서는, 정부로부터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정부의 태도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1심 재판장도 같은 마음으로 판결문을 써 내려간 것 같다. 판결문에서 국정원·통일부·외교부 등이 A의 북한인 신분에 관한 자료를 중국 공안청에 제공해줄 충분한 능력과 책임이 있었고, 중국과 북한의 국적법상 조항을 면밀히 검토했더라면 A가 탈북 후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충분히 결론 내릴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무국적의 탈북민 자녀들

북한이탈주민 보호에 있어 우리 정부의 소극적 태도는 이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가 북송되거나 탈북 과정에서 사망해 혼자 입국한 탈북민 자녀의 경우 한국인임을 입증하기가 너무 어렵다. 법무부 담당자를 붙들고 아무리 호소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를 어머니와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가져오라’는 기계적 답변만 돌아올 뿐이다.

의뢰인 B는 어릴 때 어머니가 남한행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게 잡혀 북송되었다. B는 계모인 탈북 여성과 함께 한국에 정착했지만, 힘든 한국 생활과 가정불화로 계모의 학대가 점점 더 심해졌다. 성인이 되자마자 계모에게서 벗어나려고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 소송을 해서 승소했지만, 계모와의 법적 관계가 끊기자 한국 국적도 함께 사라졌다. 불법 체류를 했다며 범칙금이 날아오고, 대학 입학도 취소될 위기였다. 의료보험도 없어 코로나에 걸려도 혼자 버텨야 했다. B의 어머니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호소했지만, 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국적 확인 신청서를 내도 ‘가능성이 없다’며 그 자리에서 반려되었다.

지원단 변호사들에게 또다시 어려운 임무가 주어졌다. 우선 수소문해 북에서 온 B의 먼 친척을 찾아냈다. 친척을 만난 기쁨과, 이제 국적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다 같이 들떠있었다. 그러나 현재 기술로는 유전자 검사가 불가능한 친족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먼 친척에 대해서도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중인 회사를 찾아내 도움을 청했고, 새로운 기법의 유전자 검사를 하니, 친족임이 확인되었다. 탈북 여성이 B를 출산하는 순간에도 함께 했던 탈북민의 증언, B의 친족인 탈북민의 증언과 유전자 검사 결과 등,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증거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법원은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특정되지 않는다며 어머니와의 친생자관계확인 소송을 각하했고, 정부는 ‘범용되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제출하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며 국적 판정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법무부 담당자와 전화기를 붙잡고 한 시간씩 매달려보고, 해외 논문을 통해 우리가 제출한 유전자 검사의 기술적 우수성을 설명하며 설득을 지속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정부는 B의 한국 국적을 인정했다. 항소심 법원도 원심을 파기하고 친생자 관계를 인정했다. 국내 최초로 북한에 있는 주민을 상대로 한 친생자관계확인 소송이 인용된 셈이다.

위 사건에서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었지만,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의 혈연관계 입증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의뢰인 C는 탈북한 어머니가 북송되면서 한 남성에게 맡겨졌다. C는 이 남성과 함께 한국으로 왔지만, 한국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무국적 상태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북송된 어머니의 유품도, 정보도, 증거도 부족해 탈북 여성의 자녀임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어 혈연에 근거한 국적 판정이 아닌, 자신을 돌봐준 양아버지의 입양을 입증해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에 어머니가 있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어렸을 때 이웃과 함께 탈북한 D는 국정원 조사를 마쳤지만, 북한 주민으로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D가 남한에서 국적도 없이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D의 어머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남한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여러 기관을 다니며 ‘내 딸이 북한에서 온 것이 맞다’고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제 성인이 다 되었지만, 늦게라도 부정당한 삶을 회복하고 싶어 변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변호사들이 팀을 꾸려서 D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서, D의 어머니는 ‘이렇게 많은 변호사가 내 이야기를 듣고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한이 풀린다. 이제 족하다’며 한참을 울었다.

안식과 환대의 공간

다시 연길공항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입국부터 순탄치 않았던 여행길의 최대 난관은 출국이었다. 시골 봉사를 마치고 연길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학교에 맡겼던 여권을 받으러 갔더니 우리 팀 여권이 없었다. 모두 도난당한 것이다. 한국인 여권은 비싸게 거래되는데, 미국 비자까지 있어 훔친 사람은 횡재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것이 위조 여권이 될 상황인 데다가, 우리는 중국에 발이 묶였다. 여권을 다시 발급받으려면 선양까지 가야 하고, 빠르면 한 달, 늦으면 수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다들 개학을 앞두고 있고, 특히 아픈 팀원이 있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중국에서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쪽에 희망을 걸고 비행기표를 끊어 공항으로 향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여권 없이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고, 한국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기적이자 은혜였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당연히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수 없었고, 별도로 조사를 받아야 했지만, 내 나라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한국 주민등록증이 있고, 이곳에서 나를 증명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더 여권을 분실하면 문제가 될 거라며 주의를 받은 뒤 공항을 빠져나왔다. 신분이 있다는 것, 내 나라가 있다는 것,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가족·친족·친구·나라로부터 겹겹이 보호받으며 자라왔다. 탈북민도 북한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떠나는 순간 오롯이 혼자가 된다.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서 중국의 촘촘한 감시를 피해야 한다. 제3국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이 과정에서 죽거나 북송된다. 제3국 수용소를 거쳐 한국에 성공적으로 들어오더라도,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어려서부터 살던 동네, 먼 친척까지의 이름과 나이, 끔찍했던 탈북의 모든 기억을 탈탈 털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기억에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으면 위장 탈북자로 의심받는다. 증거가 부족하다며 탈북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될 수 있다.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화교 출신 탈북민들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여태껏 무국적자로 지내고 있다.

여권 없이 국경을 넘어 한국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안도와 평안을 느꼈던 것처럼, 탈북민에게도 한국이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탈북 과정은 너무도 위험하고 힘들지만,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시름을 잊는 환대가 있기를 바란다. 최근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을 개정해 늦은 나이에도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연령 제한을 없애고, 탈북민 자녀에 대해서도 교육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확대한 일은 희망적 변화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미비점이 많고, 북한이탈주민 인정과 자녀의 국적 문제 등 곳곳에 높은 벽이 남아있다. 나를 증명해야만 신분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적으로 인정해주고,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에게 국적이 부여되도록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을 들여다보듯, 북한 주민들은 탈북민을 통해 남한을 이해한다. 북·중 접경지역에 철조망이 계속 높아지는 오늘날에도 탈북민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송금하면, 그날 ‘잘 받았다’는 가족의 전화가 걸려오고, 영상 메시지도 SNS로 주고받는다. 한국 사회에서 지내는 탈북민의 고단하고 외로운 삶, 탈북민 보호에 소극적인 정부의 태도가 고스란히 북한 사회에 전해지는데, 그들이 통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남북 교류 단절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회의적 태도로 일관하기보다는, 먼저 와있는 탈북민을 더 존귀하게 여기는 일이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일 수 있음을 되새겨본다.

이희숙
로펌, 사내 변호사를 거쳐 재단법인 동천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법률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을 공부했고,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공익소송과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시민사회, 사회적경제 분야 제도 개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