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메모

[417호 내가 매월 기쁘게]

2025-07-28     배한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이 찾아왔네요. 얼마 전에 매주 대구와 고양을 오가는 지인을 만났는데요.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고양 행신역에 내리는 순간, 시원하다 못해 춥다고 하더라고요? 땀을 흘리며 그 이야기를 듣자니 대구의 더위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쪼록 대프리카 생활인들의 무운을 빕니다.

이번 글에서는 오래전 저의 엄마가 여름에 남긴 메모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나름 재밌다며 사진첩에 모아 뒀었거든요.

비트주세요, “습기 차면 모든 게 곰.팡.이.다”. 함께 살던 이 집은 불볕더위로 악명이 높았던 2018년 여름에도 에어컨을 두지 않았었는데요. 무더위와 함께 찾아온 곰팡이의 습격에 바로 에어컨을 설치했습니다. 열기로 가득한 집에 들어설 때면 에어컨 리모컨부터 찾았던 기억이 나네요. 여름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습도나 더위, 둘 중 하나만 하자….

어느 날 식탁에서 발견한 메모입니다. “마른 것 외에는…”을 보며 십계명의 ‘나 외에는…’을 떠올린 건 저뿐일까요. 그리고 ‘마른 것’에는 어떤 상태부터 포함되는지 궁금했습니다. 마른반찬인 멸치볶음이나 진미채는 어디에 보관하면 될까요? 물엿이 촉촉하게 내려앉은 반찬통을 보며 갸웃거리다가, 다른 건 모르겠고 ‘뭐든 냉장보관’에 저부터 포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글씨 색깔을 카드사 이름 색깔과 똑같이 파랗게 맞춘 건 우연이겠지요. 고지서의 빈 페이지를 알뜰하게 활용한 권면이 싱크대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싱크대 배수구의 ‘중간세계’(!)에선 어떤 종류의 액체든 결국 고이게 된다는 사실을요. 무엇이 고이느냐에 따라 냄새도, 곰팡이도, 벌레도 만날 수 있는, 상서롭지 못한 여름을 맞을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엄마만 저런 메시지들을 남길 수 있었나, 왜 다른 가족 구성원은 불편하지 않았던 걸까, 거슬리지 않는 매끄러운 일상이란 게 사실은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많은 노동으로 채워지고 다듬어진 게 아니었나…. 늦게나마 안일한 반성과 주체적인 살림 노동의 실천 다짐으로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더우니까 시원한 사진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짤에 쓰인 말이 더워도 너무 덥네요. 그래도 눈이라도 시원하시라고 넣어봅니다. 부디 복상을 펼친 여러분이 머무는 곳엔 시원한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습기와 곰팡이, 더위와의 싸움도 모두 모두 파이팅!

배한나
웃긴 사람으로 비춰지고픈 반내향인. 기독교 단체를 맴돌며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다. 현재는 청어람ARMC에서 일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