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418호 예술, 구원을 묻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막 9:24, 이하 새번역)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1)
작년 이맘때였을 겁니다. 책상 위에 한동안 놓여있던 《따름, 그 회복의 여정》을 ‘집어 들고 읽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경험한 ‘톨레 레게’의 은혜가 밴쿠버의 방황하는 영혼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난 구절은 공교롭게도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갔다”(눅 22:54)였습니다. 멀찍이. 헬라어로 ‘마크로덴’, 시간적·공간적 길이를 뜻하는 ‘메코스’에서 파생된 부사라 했습니다. 헬라어에 능통한 저자는 이 ‘멀찍이’라는 공간 부사에 “베드로의 두려움, 불안, 의심 그리고 형용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담겨”있다고 설명하더군요(143쪽). 그 조곤조곤한 음성이 한순간 마음을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마음에 들끓는 의심과 씨름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멀찍이 거리를 둔 채로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두려움, 불안, 의심, 그리고 형용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꼈을 베드로의 모습은 영락없이 저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는 구레네 시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자는 이번엔 ‘뒤에서’라는 뜻을 가진 부사 ‘오피스덴’에 주목했습니다. 비록 로마 군병들에 의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분 ‘뒤에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던 시몬의 위치를 눈여겨본 겁니다(눅 23:26). 그토록 결정적인 순간, ‘멀찍이’ 거리를 둔 수제자 시몬 베드로 대신 “예수님 바로 ‘뒤에서 친밀히 따르는 제자의 위치’”를 지킨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던 또 한 명의 시몬이었습니다(168쪽). 그날 책을 읽던 저에게 4세기 성인이 경험했던 일과 같은 즉각적인 회심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제 안에는 시몬 베드로의 ‘마크로덴’과 또 다른 시몬의 ‘오피스덴’이 여전히 엎치락뒤치락 요란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실과 절망, 의심과 회의의 벽에 맞닥뜨려 헤맬 때가 있습니다. ‘오피스덴’의 자리로 나아가야 함을 알면서도 ‘마크로덴’에서 머뭇거리면서, 그런 자기 모습에 실망하는 순간들 말입니다. 못내 부끄러워 내 안의 ‘마크로덴’을 숨기고 ‘오피스덴’을 위장한 순간도 적지 않지요. 어쩌면 복음서가 베드로의 의심과 실패를 유독 자주 다루는 이유도, 그런 순간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온다고 말해주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열혈 제자도 그랬다면, 누가 예외가 될 수 있겠냐고 말이지요. 심지어 수천 년 전, 경건한 믿음의 삶을 갈구했던 시편 기자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던가요.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시 73:1-2)
‘의심’이 아닌 의심을 통해 확인되는 ‘믿음’
의심과 회의는 실로 시대를 막론하고 신앙하는 이들을 스토킹하는 문제인가 봅니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는 믿음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이 의심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합니다. 바로 〈의심하는 도마〉(1602)라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카라바조 특유의 강렬한 음영 대비, 즉 키아로스쿠로2) 기법을 기가 막히게 보여주고 있지요. 무대조명처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빛의 효과뿐 아니라,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순간 정지한 듯 보이는 동작, 다이내믹한 구도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카라바조가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문제의 이 장면은 그동안 우리가 이해하던 방식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도마의 일화를 바라보게 합니다. 도마의 ‘의심’이 아닌, 그 의심을 통해 확인되는 ‘믿음’에 빛을 비추는 겁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도마는 베드로마저 능가하는 의심의 아이콘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 소식을 알렸을 때, 도마는 이렇게 반응하지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 20:25)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믿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설교 시간마다 언제나 큰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들에게 익숙한 21세기 한국의 목사님들이 들으면 기함할 반응이 분명합니다.
이런 도마의 반응에는 단순한 의심을 넘어선 격한 감정의 동요가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극악한 죄수처럼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그들 곁을 떠나신 뒤 깊은 혼란과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겁니다. 어떤 이유로든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마음 깊이 상처를 입어본 사람이라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 사람과 연관된 어떤 이야기에도 소중한 기억과 상실의 깊은 상처가 불쑥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평소답지 않은 격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지요.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예수님은 그런 도마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자기 옆구리로 이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럽습니다. 마치 상실의 깊은 상처에 괴로워하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친구들의 말에 혼란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도마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손길 같습니다. 성경은 이 순간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 20:27) 우리는 그동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책망의 어조를 대입했을 겁니다. 그런데 카라바조의 그림 속 예수님이라면, 오히려 도마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독이는 부드럽고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책망은 믿음과 의심의 관계에 대한 선입견이 투사된 읽기였는지도 모릅니다.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저자인 신약학자 김학철도 카라바조의 이 그림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상처를 향해 내민 도마의 손가락을 오히려 “믿음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손가락”이라고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해석합니다(78쪽). 보고 나서야 믿은 도마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이 책망하셨다는 통상적 해석과 달리, 요한 공동체의 전통이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관계를 오히려 긴밀하고 긍정적으로 연결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에 정말로 손을 넣어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보아야만 믿겠다는 도마를 향해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대신, 자기 몸에 난 못 자국을 ‘보고’ 의심에 대한 답을 찾아 참된 ‘믿음’으로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계셨던 겁니다.
때로 우리에겐 마음속 의심과 회의를 꾹꾹 누르고 감추기보다, 도마처럼 날 것 그대로 꺼내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우리 안의 위장된 ‘믿음’과 대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런 고민 없이 쉽고 당연하게만 받아들인 우리의 안온하고 안정된 믿음이, 사실은 그저 익숙하고 안전한 것에 머무르고자 하는 안일함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이었다면요? 거짓 평온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진정 새롭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이 건네시는 참된 평화의 인사에 “아멘”이라 답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도마처럼 혼란과 의심의 순간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고자 의심하는 현대 예술가들
믿음과 의심의 문제가 17세기 바로크 화가만 관심을 보인 주제는 아닙니다. 우리 시대 예술가들도 도마의 일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는데요. 동일한 주제를 현대적 예술 언어와 시각으로 다루는 이들의 작품은 믿음과 의심의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생각의 폭을 넓혀줍니다. ‘현대적 이콘’ 화가 스캇 에릭슨은 〈부활하신 분이 의심하는 자의 믿음을 북돋워주시다(The Risen one Strengthens the Faith of the Doubter)〉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의 부활절 묵상 시리즈 〈부활의 길(The Stations of Resurrection)〉 여덟 번째 그림인데요. 〈의심하는 도마〉의 현대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도마의 ‘의심’이 아닌 (의심하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작품 제목이 ‘부활하신 분이 의심하는 자를 꾸짖으시다’가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에릭슨의 작품들은 전통적 성화처럼, 시각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신앙과 영성의 깊은 실재를 묵상하고 탐색하게 하는데요. 그의 단순한 이미지는 깊이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지요. 도마의 의심을 다루는 이 작품 역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믿는 것에 관한 직관적 이미지를 통해 믿음과 의심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에릭슨은 작품과 연결된 묵상의 글에서 이렇게 씁니다.
의심은 이 [신앙의] 여정에서 당신을 늘 따라다닐 친구입니다. 무한한 신비이신 분을 뒤쫓는 당신은 의심이라는 이해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겁니다. 의심은 모든 새로운 앎의 길로, 모든 새로운 시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의심은 사랑의 품을 넓히기 위해 당신이 겪는 마음의 감정입니다.3)
철학적이고 시적인 회화 언어를 구사하는 포스트모던 화가 엔리케 마르티네스 셀라야도 도마의 일화에 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셀라야의 초기 설치 작업 〈성녀 카트리나가 나를 지켜주신다(Saint Catherine Watches Over Me)〉 일부인 〈증언(The Account)〉(1997)인데요. 그는 도마 이야기를 카라바조나 스캇 에릭슨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성경 내러티브나 재현적 요소는 모두 생략한 채 예수님 몸에 난 상처에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셀라야는 캔버스 화면 위에 어떤 형상도 없이, 한가운데 추상적 절개만 남겨놓습니다. 재료는 일반적인 캔버스가 아닌, 감상적이라고 (그래서 진지한 예술과는 멀다고) 여겨지는 벨벳을 사용했지요. 거친 붓질의 흔적이 남아있는 비균질적인 어두운 자줏빛 배경에는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 죽음과 연결되는 핏빛이 어른거립니다.
카라바조 그림처럼 재현적 미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이런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작품이 조금 난해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어렵고 낯설 때가 많은 현대미술은 고유의 어휘와 문법, 역사와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합니다. ‘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때, 예술뿐 아니라 인간과 삶, 더 나아가 신앙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새로운 눈과 지평이 열리기도 합니다.
《God in the Gallery(미술관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쓴 대니얼 시델은 마르티네스 셀라야 작품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의 성스러운 맥락에서 [예수님의] 그 상처를 떼어내서, 신앙심과 믿음의 대상이 훨씬 덜 분명한 … 설치 작업의 문맥 안에 재배치한다”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 이 작품에서 상처의 의미가 불명확한 것은, 믿음과 의심 사이의 관계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56쪽). 셀라야는 성경적 모티브 도마의 일화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품는 모호한 태도, 자신 안의 믿음과 의심의 불명확한 관계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면했던 믿음과 의심의 문제를 작가 자신에게로 가지고 온 셈이지요. 어떤 쉬운 답도 내놓지 않고, 불명확함 속으로 관객들 역시 초대합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낯선 상처를 드러내는 이 작품 앞에서, 모든 것이 언제나 분명하고 명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믿음으로 위장했던 우리 안의 의심과 회의를 들여다보라고 말이지요.
믿음과 의심, 혹은 믿음과 믿음 없음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도,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시인 크리스찬 위만이 “믿기 시작했을 때에야 나는 믿음 없음의 진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지요.4)
위만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뒤, 오래전 떠났던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다시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두 손 들고 눈물 흘리며 돌아오는 탕자처럼 극적 회심을 한 것은 아닙니다. 위만은 스스로를 절대적 확신보다는 불확실성과 의심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모던한” 신자라고 부르면서, 전통적 신앙과 현대적 회의 사이에서 진실한 믿음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믿음의 회의와 분투가 반드시 ‘모던한’ 것의 증표는 아닙니다. 위만의 책 제목 ‘나의 찬란한 심연’(My Bright Abyss)은 4세기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말했던 “빛을 발하는 어둠”(luminous darkness)이나 6세기 초에 활동한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신적 어둠”(the divine darkness)을 되울리니까요. 위만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부정신학의 오랜 전통을 따르는 내면의 여정을 통해, 온전한 믿음이란 고통과 침묵, 어둠과 분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드는 행위임을 발견해갑니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거룩한 빛을 발견하는 신앙의 신비와 역설을 마주하게 된 셈이지요.
셀라야와 위만의 예처럼,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기독교 신앙에 유보적 자세를 취하면서 믿음과 의심의 불명확하고 모호한 관계를 탐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배경에서 자랐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고 교회와 멀어졌을 겁니다. 어떤 이들은 의심이나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교회의 비관용적 분위기에 지치고 절망해서 교회를 등지기도 했을 테고요. 그동안 교회가 이런 예술가들의 다름과 의심을 ‘믿음 없음’으로 쉽게 판단하고 질책하기보다, 그들이 자신의 의심과 회의를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이 믿음을 확인하는 도마의 손가락을 허용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온 마음 다해 믿는 것에 관하여
한때는 온전한 신앙이란 어떤 의심도 없이 언제나 확고한 믿음을 붙드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닌 중요한 한 요소라는 폴 틸리히의 말처럼, 이제는 온 마음을 다해 믿는 건 의심과 회의의 순간까지도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임을 천천히 배워가고 있습니다.5) “의문을 품지 않는 확실성에서 온 마음을 다하는 취약함으로 옮겨가는 길은 넓고 평탄하고 포장된 대로라기보다는 가파른 언덕과 돌덩이 널린 계곡을 지나는 구불구불하고 때로는 거의 알아보기 힘든 좁은 통행로”일 때가 많습니다.6) 그렇지만 험난한 여정에서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수많은 동료 여행자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지요. ‘에쉐트 하일’(용감한 여인) 레이첼 헬드 에반스도 그중 한 명입니다. 레이첼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엉망진창이고 복잡다단하고 갈등하는 우리의 자아 전체로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해주었지요(100쪽).
성공회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는 《The Wound of Knowledge(상처 입은 앎)》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흔들림 없는 확실성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도 유혹과 두려움, 어둠과 분투 가운데서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히 5:7) 순종을 배우셨으니까요. 그는 우리 역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성문 밖으로, 안정되고 질서 잡힌 것을 넘어 예수님이 어둠 가운데 죽으셨던 바로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고통의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기 보호 본능을 깨뜨리고 다른 이들을 위한 긍휼의 공간을 만들게 됩니다(21쪽).
포스트모던 기독교 철학자 메롤드 웨스트폴은 “유한성의 해석학은 인간의 피조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숙고이며, 의심의 해석학은 인간의 타락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숙고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7) 정작 인간의 피조성과 타락성을 가장 강조하는 교회는 마치 절대적 진리를 소유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은데요. 밝고 안정적인 신앙만을 지향하는 경향도 강하지요. 그러나 늘 밝은 햇살만 추구하는 신앙은 더 깊고 견고한 영성의 뿌리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독이 되기도 합니다.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 영혼이 더 깊어지고 성장하는 신비가 있습니다. 오직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이들에게만 찬란하게 새로운 새벽빛의 소망이 주어지는 법입니다.
제 안에서 ‘마크로덴’과 ‘오피스덴’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분투의 끝이 어디일지는 아직 모릅니다. 루터는 “믿음이란 천 번이라도 생명을 걸 수 있을 만큼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담대한 확신”이라고 말했지요.8)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지식이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확실함에 위협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품은 의심하는 이들도 쉼을 얻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렇듯,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은 논리적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원한 신비입니다. 이 완고하고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만나는 곳은 확실성의 안전함에 갇힌 “정신의 요새”가 아닌, 온 마음 다하는 취약한 신앙이 살아가는 “바람 몰아치는 열린 마음의 벌판”이라는 사실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9)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 김기석, ‘레이첼에게’, 《온 마음 다하여》, 265쪽.
2) 이탈리아어로 키아로(chiaro)는 ‘밝다’, 오스쿠로(oscuro)는 ‘어둡다’는 뜻.
3) 필자 소장 전자 포스터
4) 크리스찬 위만, 《My Bright Abyss》, 12쪽.
5) 폴 틸리히, 《Systematic Theology》, 116쪽.
6) 레이첼 헬드 에반스, 《온 마음 다하여》, 186쪽.
7) 메롤드 웨스트폴, 《Overcoming Onto-Theology》
8) 마르틴 루터, 〈Preface to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Romans〉
9) 《온 마음 다하여》, 97쪽.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하나님의 집》 《온 마음 다하여》 《빅 스토리 바이블》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