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 개는 특별할까
[418호 구선우의 동물기]
“자신의 반려동물과 낯선 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작년 봄,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한 윤리 칼럼이 화제였다. 뉴욕대 철학 교수 콰메 앤서니 아피아는 “우리 고양이와 낯선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남자친구는 고양이를 구하겠다고 말했다”라는 독자의 말을 제목으로 삼은 칼럼을 통해 인간의 생명과 반려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 우선순위를 둘러싼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반려동물을 우선해서 생각하는 감정이 매우 인간적인 충동이라고 인정했다. 동시에, 반려동물을 구하는 일이 “잘못된 선택”임을 분명히 하며, 낯선 이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자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1)
이 질문은 단지 가상의 딜레마가 아니었다. 교회 청년 모임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자,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자기 강아지의 수영 실력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원래 질문은 고양이었다!) 낯선 이가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말로 논쟁을 마무리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댓글 창이 뜨거웠다. 반려동물을 우선하겠다는 주장과 인간 생명에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주장이 맞섰고, 심리학자·윤리학자들도 이 질문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선택의 문제를 다룬 2013년 연구가 다시 소환되기도 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 중 40퍼센트가 반려동물을 구하겠다고 답했고, 구조 대상이 친밀한 인간일수록 동물을 선택하는 비율은 점점 낮아졌다.2) 존재가 아닌 관계 중심 윤리가 중요해지고 있는 셈이다. ‘반려’동물도 가족으로 여겨지는 등, 인간과 동물의 생명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에게 ‘개냐 사람이냐’ 묻는다면, 즉답을 피할 것이다. 내 인생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살았던 경험은 극히 적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 아내가 키우던 개와 1년간 짧게 동거한 것이 전부였다. 흰색 몰티즈, 열다섯 살 노견. 심장병으로, 약을 먹고 있었다. 이름은 초롱이. 어쩌다 아내의 동생으로 불리던 초롱이의 매형이 된 나는 초롱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진 못했다. 더운 여름날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했지만, 비싼 병원비를 아낌없이 쓰는 아내를 보며 치기 어린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개는 얼마나 특별해질 수 있을까. 인간의 지위마저 넘본다면,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까. 동물에 대한 애정이 인간 영역으로 침투할 때, 어떤 답을 내릴 수 있을까.
도시 개의 하루
지난 7월 한 달간, 산책 나온 반려견들을 관찰했다. 동네 골목, 인근 산책로, 대형 쇼핑몰까지 곳곳에서 사람과 함께하는 개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귀엽거나 멋진 강아지를 향해 미소 지으며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 때론 사진을 찍는 이도 있었지만, 견주와의 미묘한 눈치 싸움이 이어졌다. 품종·외모에 대한 사회적 선호가 개들의 삶과 인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개는 모두 서로 다 친할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낯선 개를 경계하는 모습도 많았다. 외향형·내향형이라는 말은 개에게도 적용되었다.
개들은 모두 목줄이나 가슴줄(하네스)을 착용했다. 사람에게 안겼거나 유아차에 탄 개도 자주 만났다. 입마개를 한 개는 딱 한 번 봤는데,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땡볕에 달궈진 아스팔트가 위험 요소이지만, 도시에서 집에만 머무는 개들의 스트레스·분리불안 등 다양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산책은 필수라고 한다. 많은 보호자가 한 손엔 목줄, 다른 손엔 무언가를 들고 걷고 있었는데, 스마트폰이 아닌 배변 봉투였다. 개와 산책하는 중엔 스마트폰을 만지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걷던 길 곳곳에서 이전엔 보지 못하던 안내문과 시설을 발견했다. 목줄 미착용 금지 및 배설물 방치 금지 안내문, 반려견 산책 대행 서비스 홍보물이 있었다. 반려견 출입이 가능한 가게들, 드라이브 스루형 주문 시스템이 갖춰진 곳도 있었다. 주차장 한쪽에는 반려견 대기 존이 있었는데, 이름은 ‘기다려 댕댕’이었다. 대형 쇼핑몰에서는 올바른 반려 문화를 위해 에티켓을 지켜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배변 봉투를 곳곳에 비치하고 반려견 전용 유아차를 대여해주기도 했다. 개가 주인과 함께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개들을 관찰하다 보니, 예전엔 드물던 서비스와 공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3)
개 2백여 마리와 그 가족들을 관찰하며, 개를 ‘위한다’지만 결국 개의 하루는 인간의 시간표와 라이프스타일에 맞춰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낮에는 주로 한 사람이, 저녁에는 가족 단위로 개와 산책하는 장면이 많았다. 그러나 정작 쇼핑몰을 제외하고는 어린아이와 개가 함께 나온 경우를 보지 못했다. 산책 시간과 장소가 보호자의 삶에 좌우되는 셈이다. 목줄은 개와 인간 모두를 지키는 장치이지만, 아무래도 인간의 편의에 맞춰져있는 것 같다. 물론 개와 함께하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헌신하는 부분도 크다. 사람들은 이제 ‘키운다’보다는 ‘함께 산다’는 말을 쓰고자 하나, 여전히 ‘보호자’라는 단어가 인간과 개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 구조를 확실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 관찰하고 묵상해온 많은 동물과는 다른, 개의 묵직한 존재감을 엿볼 수 있었다. 개들 역시 인간의 삶에 맞춰 길들여져 살아가기에 관계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경계와 위계,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변화의 흔적을 생생하게 마주했다.
가축에서 가족으로
개와 인간의 관계는 최근에 우연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왜 개만 특별히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개들의 관점에서는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해온 ‘역사’를 말할 것이다. 비록 모습은 달라졌지만, 깊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개는 앞서 다뤘던 말(409호)이나 고양이(411호)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한 동물로 여겨진다. 늑대의 후손이라는 진화사를 따로 다루지 않아도, 이미 1만5천 년도 더 전에 가축화된 동물이다.4)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는 8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개 뼈가 인간 유골 및 생활 유적과 함께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 개와 인간이 함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성경에서 개는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동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라고 하실 정도로, 거리를 떠돌며 “토한 것을 도로 먹는”(잠 26:11) 하찮은 존재였다. 당시 유목·농경 사회에서 재산과 집을 지키는 경비견 역할도 감당했으나, 위상이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파수꾼을 ‘짓지 못하고 탐욕이 심한 개’(사 56:10-11)에 비유한다. 욥은 고난을 겪는 자신을 쓸모없고 천한 존재로 비하하면서,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하다고 한다(욥 30:1-2). 개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 세계 문을 지키는 신성하고 위엄 있는 동물(케르베로스)로 그려졌지만, 성경에서는 이방인처럼 천대받는 존재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개가 기독교 문화의 상징체계에서 늘 천대받지는 않았다. 중세로 넘어오면서 점차 충성스럽고, 신실하고,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 작품이 귀도 다 시에나의 〈예수 탄생(The Nativity)〉(c.1275-1280)이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 곁을 부모와 천사와 양치기가 지키는 장면을 그린 고전적 종교화로, 아래쪽에 ‘개’가 보인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인간 가족을 비롯해 다른 가축들과 어울리면서 충성스럽고 동반자적인 이미지를 암시한다. 이후에 그려진 성화 등을 통해 문화사를 살펴보면, 성인이나 가족과 함께 있거나, 신성한 순간에 곁을 지키는 동반자로 더 자주 등장한다.
애견 문화는 오래전부터 상류사회의 취미로서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중후반 영국에서 견종 표준화와 브리더(breeder) 시스템이 갖추어지고, 최초의 도그쇼와 혈통견 등록이 이루어지면서부터는 중산층 사이에도 이 문화가 퍼져나갔다. 물론 서민에게는 여전히 실용적 동반자였다.
개는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상실과 혼란의 시간을 사람들과 함께 보내면서 심리적 위안을 주는 존재로, 가족으로 인식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반려견 문화가 세계로 확산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마리 개 보비(Bobby)를 만나 회복하면서 철학적 깨달음을 얻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오직 보비만이 자신과 동료들을 ‘인간으로서’ 대했다는 경험을 기록했다. 매일 아침 수용소 입구로 달려와 반가운 몸짓으로 맞아준 보비는 치욕과 소외를 겪는 레비나스와 동료들에게 인간이라는 이름과 기본적 존엄을 지켜준 유일한 존재였다.5) 오늘날 품종견 선호 등 차별 문제는 여전하지만, 지금도 개는 곁에서 우리를 위로한다.
동반자이자 파트너
미국의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는 《개와 함께한 10만 시간》에서 개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탐구한다. 토머스는 오랜 동반자로서 개가 보여주는 사회성, 그리고 인간-개 관계의 깊이를 섬세하게 기록했다. 인간과 함께하는 모습만이 아닌, 무리 생활을 통한 자연적 습성도 다루어서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내 개의 본성조차 인간과 따로 떨어뜨릴 수 없음을 발견한다. 인간과 개는 공생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둘은 “마치 소라게와 말미잘처럼, 상호 이익을 위해 상시로 딱 붙어서 상부상조하며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설명한다.6)
골드러시 시대의 미국을 배경 삼은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민음사)은 인간 세계에서 야생으로 이끌리는 개 ‘벅’의 심리를 생생하게 그려낸 동물 고전소설이다. 다만, 벅이 야생 늑대 무리의 대장이 되는 이야기는 문학적 상상과 판타지에 가깝다. 토머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관찰하고 연구한 개들의 삶과 사회성은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단순히 야생 본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긴밀하게 관계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판타지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만약 1년간 지구를 탐사하고 돌아가는 외계인이 있다면 보고서에 무엇을 적을까? 개는 생물종 중 가장 눈에 띄는 종으로서 인간의 존재와 함께 기록될 것이다. 개는 인간의 ‘종’이 아니다. 지구 곳곳에서 인간과 공존하는,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파트너이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외계인 슈퍼맨 곁에도 개가 있다. 최근 개봉한 제임스 건 감독의 〈슈퍼맨〉(2025)에는 슈퍼맨의 반려견 크립토(Krypto)가 중심 캐릭터로 등장한다. 크립토는 단순한 마스코트가 아니다. 슈퍼맨의 강함 뒤에 숨겨진 약함과 외로움을 감싸는 파트너로서 인간다움과 연대의 의미를 일깨운다.
“강아지 한 마리 키우시죠.” 얼마 전 내가 “요즘 아들이 동생을 원한다”라고 말하자, 아들 친구의 아버지가 건넨 조언이다. 핵가족 시대, 인간의 빈자리를 개가 채우고 있다. 자연 친화적 동물을 멀리하고 인간 중심적 도시화가 강하게 일어날수록 개는 더 가까이에서 인간 곁을 지킨다. 오랜 시간 곁을 충직히 지켜온 개에게는 인간의 빈자리를 채워줄 자격이 있다.
개는 특별하다
나는 어린 시절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인간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로움을 느낀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인간이 소외를 겪는 문제를 동물로 대처하려는 태도가 옳지 못하다는 인식이 만연한 풍토에서 나온 말이었다. ‘개냐 사람이냐’ 문제가 갑론을박하는 딜레마가 된 현실에서 개의 위상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지위 변화를 개가 일방적으로 어떤 단계로 ‘진화’하거나 인간을 위협하는 현상이라고 여기는 시선은 충분치 않다. 인간과 개가 맺는 관계는 시대와 조건에 따라 서로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결을 달리했다. 오늘날 사회는 존재 본질에 집착하는 ‘존재론적 윤리’에서 만남과 관계의 의미를 중심에 두는 ‘관계론적 윤리’로 나아가고 있다.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돌봄·연대·환대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윤리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
인간은 분명 지구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 자체로 특별하다. 인간의 특별성은 고립된 본질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관계에서 드러난다. 수용소에서 보비를 만나 통찰을 얻은 레비나스는 윤리를 인간 존재 근원(제1철학)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철학을 적용하면, 내 곁의 개가 특별한 이유도 ‘나의 타자’로서 맺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환대와 무한한 책임으로 확장되고, 서로에게 말을 걸며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진리가 생겨난다.
“진리는 타자로부터 분리된 한 존재가 타자 속에 잠기지 않고 타자에게 말을 거는 곳에서 생겨난다.”7)
개는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 관계 맺는 개에게서 삶의 의미와 진리를 발견한다. 개는 특별하다. ‘나의 개’는 더욱 특별한 존재다. 다른 사람의 개,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생명체 또한 각자 고유하게 특별하다. 이 특별한 존재들이 서로 얽혀 맺는 관계의 고리에서 우리는 풍요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개냐 사람이냐’ 이분법적 선택을 넘어, 서로 다른 모든 존재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묻는 일이 중요하다. 인간이 모두 다르듯, 개를 비롯한 다른 생명체도 각기 다르다. 종차별주의가 지닌 한계를 넘어 모든 생명체가 가진 특별함을 발견하는 넓은 시선을 지향할 때, 우리 사회와 일상에 담긴 의미는 확장될 것이다. 이것이 가장 가까이에서 자신의 고유한 특별성을 내보이는 동물인 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어느 날 찜질방에서 옆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출산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며 “나는 개나 키울래. 사람은 너무 오래 살잖아”라고 말했다.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를 단순히 돌봄 대상으로만 볼 수 있는지 고민에 빠졌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종속적인가? 개와 인간의 관계는 오직 돌봄에만 머무는가?
시간이 갈수록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돌보거나 책임지는 일만이 아니고, 관계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이해하며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일임을 깨닫는다. 나는 현재 개를 키우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내 품을 떠날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초롱이와 함께한 지 고작 1년이 지났을 때, 초롱이는 아내 곁을 떠났다. 다시 찾아온 무더위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서 아내를 불렀다. 초롱이는 누나를 기다렸다. 차를 타고 급히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의 강아지 처남은 세상을 떠났다. 10여 년 세월을 함께한 누나의 품속에서.
“저희가 처리해 드릴까요?”
병원에서는 이미 생명이 없는 내 가족을 고객이 아닌 폐기물로 대했다. 나는 동물병원의 장삿속에 화가 났고, 아내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날 이후 우리 곁에 강아지는 없지만, 어린아이 둘이 있다. 아이들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아직 용기가 안 난다고 했다. 초롱이가 품속에서 죽어갈 때 전해져온 온기와 병원 문을 나오면서 느꼈던 냉기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개와 맺는 관계는 때로 기쁨과 위로를 주지만, 끝에는 슬픔과 상실이 공존한다. 사랑과 책임, 존엄을 품은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게 된다. 돌이켜보면 내게 개는 특별하지 않지만, 초롱이는 참 특별했다.
1) Kwame Anthony Appiah, ‘My Boyfriend Said He’d Save Our Cat but Not a Stranger If Both Were Drowning’, 〈The New York Times Magazine〉(2024.4.17.)
2) Topolski, T. D. 외, 〈Choosing between one’s pet and a human: Who would you save?〉, 《Anthrozoös Vol. 26 No. 2》(2013)
3) 짧은 관찰만으로는 모두 담아내기 어려웠던 대형견 출입 제한과 ‘무섭다’는 인식, 여성 보호자가 야간 산책이나 외부 활동을 하다가 마주하는 불안과 위험, 혈통 중심의 선입견과 편견 등 깊이 있는 성찰들은 정이현 작가의 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심이 있다면, 개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던 작가 본인이 유기견을 입양한 후 겪은 일들을 담은 산문집 《어린 개가 왔다》(한겨레출판, 2025)를 참고하라.
4) 아담 미클로시, 《개 - 그 생태와 문화의 역사》(연암서가, 2019), 1장 참고. 이 책은 개의 진화와 생태, 해부학, 행동, 인지, 사회성 등 과학적 연구뿐 아니라 인간과의 문화사도 다룬다.
5) Emmanuel Levinas, Sean Hand 옮김, ‘The Name of A Dog, or Natural Rights’, 《Difficult Freedom》(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0)
6) 엘리자베스 마셜 토머스, 정영문 옮김, 《개와 함께한 10만 시간》(해나무, 2021), 192쪽. 인류학자인 저자가 30여 년간 개와 함께하며 관찰한 생태·행동·사회성 기록을 담은 책이다. 문화사적 통찰을 제공한다.
7)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전체성과 무한》(그린비, 2018), 77쪽.
구선우
좋은 답을 찾기보다, 좋은 질문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 관계의 얽힘에 관심이 있다. 《배트맨 크리스천》 《다음세대입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