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과 그 피는”

[418호 봄봄]

2025-08-30     김영준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아스팔트 위에선 앉아쏴, 고층 빌딩에선 조준 사격으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총 맞아 쓰러진 사람을 부축한 이를 향해서도 조준 사격을 했다. 당시 발포에 대해 전두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 변명했다. 국제법상 자위권(自衛權, self-defence in international law)이란 외국 군대가 불법 침입했을 때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전두환은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불법 침입한 외국 군대로 다룬 것이다. 휴전선에서 가장 먼 반도의 남쪽, 남해와 서해로 둘러싸인 남도의 거점 도시로 외국 군대가 침입해 쳐들어왔다는 말인가.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군대가 자위권을 행사했다면, 광주 75만 시민들이 외국 군대라는 게 전두환의 주장인 셈이다.

전두환이 말하는 자위권이란 국제법상 자위권이 아니라, 그냥 군인 각자를 지키기 위한 자위권이었을까. 광주시민들이 대단히 폭력적이어서 소수 군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위권을 발동해 어쩔 수 없이 발포한 것일까. 아니다. 계엄군이 발포하기 직전 느닷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시민들은 계엄군을 공격하지 않았다. 애국가가 끝나자마자 대열을 갖춘 군인들이 앉아쏴 자세로 대치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했다. 군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고자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 아니라, 비무장 시민들을 ‘양학’하려는 발포였다.

1988년 5·18 청문회가 열리고 5·18에 대한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전두환은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이 사태가 계엄군의 강경 진압과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1) 발포 책임을 ‘강경 진압한 계엄군’에게 돌린 것이다. 발포 명령이 없었지만,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시민들의 과격 시위’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계엄군들이 강경하게 진압하다가 발포했을 것이라 둘러댄 것이다.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 외벽과 내부에는 270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2) 계엄군이 5월 27일 새벽 도청을 공격하기 전 배후를 확보하기 위해 헬리콥터에서 전일빌딩 10층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5·18 당시 시민군들은 공중에 떠있는 헬리콥터를 떨어뜨릴 만한 화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공 능력이 없는 시민군들을 향해,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했다면, 헌혈하다가 돌아가는 시민을 향해, 기총소사를 했다면, 군의 자위권 발동이 아니다. 헬리콥터에서 땅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쓸어버리듯 발포했으면서, 자위권 발동이라 변명할 순 없는 것이다.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던 조비오 신부는 사제들과 함께 계엄군과 시민 사이를 평화적으로 중재할 방안을 모색하던 중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

그때 나는 우선 도청 앞 분위기를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왔다. 사제관을 나와 성당 앞 철문에 막 이르렀을 때다. 헬기가 기수를 광주공원 쪽으로 향해 가면서 광주천 불로동 다리쯤의 상공에서 불빛이 50센티미터에서 거의 1미터 정도로 쭉 뻗으면서 ‘드드득 드드득 드드득’ 세 번이나 갈기는 기총사격 소리가 들렸다. 혼비백산한 나는 반사적으로 담벽에 바싹 붙어서서 헬기를 응시하였다.3)

미국 침례교회 파송으로 광주 양림동에서 거주하던 피터슨 목사(Arnold A. Peterson)는 “발포는 5월 20일 오후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집 지붕에 있는 발코니에서 … 도시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거리의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4) 피터슨 목사가 찍은 사진엔 총구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찍혀있다. 발포 행위가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전두환의 변명은 거짓말이다. 조비오 신부 증언과 피터슨 목사 사진으로 사탄 전두환의 갈라진 혀를 확인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 김성룡 신부 등을 5·18 현장을 목격하고 수습위에 참여시키면서 시민들의 희생을 막으려 했다. 특히 조비오 신부는 광주 천주교회를 대표해 시민들과 계엄군 사이를 중재하며, 시민들의 죽음을 막으려 애썼다. 시민군들을 직접 만나며 총기를 회수해 계엄군들에게 과도한 진압 작전을 펼칠 명분을 주지 않으려 했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목숨 걸고 항쟁하는 시민군들을 향한 존경과 애정, 미안함을 잃지 않았다. 조비오 신부는 5월 26일 밤 계림동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신도들에게 이렇게 강론했다.

오늘 밤 광주 시민들이 또다시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지 모른다. 아벨의 무고한 피로 인하여 죄인은 하느님의 징벌을 받고 광야를 헤매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양성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을 죽인 동족상잔의 비극은 비참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문을 모르고 죽어간 시민들의 목숨과 불의에 항거한 젊은이들의 피는 광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도탄에서 구할 수 있는 의로운 피가 될 것이다. 의인의 억울하고 애통한 죽음과 그 피는 하늘에 사무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염원을 꼭 들어주실 것이다.5)

하ᄂᆞ님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은 자에 관하여 물으신다. 하ᄂᆞ님은 죽은 자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살아있는 우리에게 죽은 자에 관하여 물으신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살아있는 사람이 외면과 무지로 듣지 못하는 소리를, 하ᄂᆞ님은 들으신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억울하게 죽은 자 아벨의 음성을 들으시고, 가인과 가인의 후예인 우리들에게 물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5·18 당시 신앙인으로서 시민군이 되거나, 목회자 개인 자격으로 수습위에 참여한 목사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개신교회는 당시 상황을 해석하지 못했지 싶다.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의 자리에 선 목회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기계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지 싶다.

계엄군이 행군하는 금남로 건물 사이에 ‘침례교 한미전도대회’를 알리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사진: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헬리콥터 사격을 사진으로 찍어 계엄군의 무도함을 증언한 피터슨 목사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침례교회는 한국 침례교회와 미국 플로리다 침례교 협의회가 공동 주관하는 전도 대회를 1980년 5월 18일부터 4일간 개최할 예정이었다. 피터슨 목사는 선교사로서 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도 대회가 열리기 전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이어졌지만, 광주 시위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피터슨 목사는 5월 14일부터 사흘간 광주에서 일어난 시위를 관찰하면서 “모든 면에서 평화스러워 보였다(It was peaceful in every respect)”고 전한다. 경찰들은 “교통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렸으며 주의 깊게 지켜봤으나 시위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모인 시위대는 폭력적이지 않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은 민주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마그마가 도시 아래를 흐르는 것 같은 뜨거운 시절이었지만, 피터슨 목사는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랬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414호)을 중심으로 시위대는 전남도경국장 안병하(406호)의 지휘를 받는 경찰과 협력하며 평화롭게 집회와 시위를 진행했다. 경찰의 보호를 받는 시위대 행렬은 찬송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읊조리게 했다. 이를 확인한 피터슨 목사와 침례교회는 전도 대회를 미루거나 취소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5월 18일 새벽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구내에 공수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했고,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면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곤봉에 맞고 대검에 찔렸다. 비상한 상황을 맞았지만, 전도대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시간은 단축되었고, 인원은 적었다. 전도집회의 개회 예배는 (5월 18일) 7시 30분에 열렸다. 그 날 밤 참석 인원은 약 200명이었다. 몇 명의 결신자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예배는 오후 8시에 끝났다.6)

5월 19일, 공수부대의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후 3시엔 사망자가 확인됐다. 사망자가 확인되기 직전 2시 30분에 광주시민회관에서 침례교 전도 대회는 이어졌다.

우리는 전도대회 예배를 시민회관에서 (5월 19일) 오후 2시 30분에 갖기로 계획했다. 광주의 침례교 목사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여든 사람은 적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약 300명이 참가했다. 드윗 매튜스는 설교를 했으며 25명에서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예수를 새로이 믿기로 했음을 공표했다.7)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죽도록 폭행하던 때, 교회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예배를 드리며 구원을 선포했다. 시민들의 모든 모임이 계엄 포고령에 저촉될 수 있던 때, 개신교인들의 예배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고, 모인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겠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던 시간에 교회는 피 흘리며 죽은 예수를 구원자로 선포하며, 예수를 믿기로 결신하는 이에게 영생을 선포했다. 하ᄂᆞ님 자리가 저 위에 있어, 광주에서 일어나는 참극과 감격을 동시에 본다면, 하ᄂᆞ님은 어떻게 평가하실까. 기괴하다. 우리는, 인간은, 때로 우리 예배는 기괴하다.

계획대로 전도 대회는 진행되었고, 성과도 있었지만 전도 대회를 준비하는 이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0일) 오전 10시에 전도대회 팀과 목사들은 한 곳에 모였다. 기도를 한 후에 우리는 전도대회를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토론했다. 우리는 목사들 각자가 현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 그들은 교인들이 전화를 해서 자신들의 공포를 전해 주었다고 했다. 부모들은 청년 나이와 고등학생 나이의 그들의 자녀들이 성가대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 목사들과 전도대회 팀원들의 공통된 의견은,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진 자로서는 전도집회를 개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팀장인 드윗 매튜스는 비록 우리가 여러 달 동안 전도집회를 준비했고 수천 킬로의 거리와 수천 달러의 돈을 광주의 전도대회를 준비하면서 썼지만, 만일 한 사람이라도 전도집회를 참여하고자 오가면서 그런 혼돈에 휩싸여 다치거나 더욱이 죽는다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8)

전도 대회는 중단되었다. 대회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을 수 있어서다. 전도 대회만 중단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을 ‘교회 신자’들은 안전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교회 신자들과 전도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투쟁에 가담했거나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목사들의 판단이었다. 투쟁에 가담하지 않는 게 교회의 길인가, 어떤 상황에도 중립적이면 되는 것인가.

곤봉에 두개골이 깨지고, 대검에 찔리고 베이며, 총에 맞아 쓰러져가자, 광주시민들이 금남로로 쏟아져나왔다. 그중엔 예비군 무기고에서 가져온 총기로 무장한 이도 있었다. 버스·택시기사들이 열을 지어 도청을 향해 차량을 몰고 왔다. 금남로에서 시민들은 앉아쏴 자세로 발포하는 군대의 총을 맞았고, 고층 건물에서 조준 사격하는 총을 맞았고, 헬리콥터에서 난사되는 총에 맞았다. 공포가 시민들을 지배했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린아이들과 교복 입은 여학생마저 죽어나가는 마당에 그저 숨어있을 수 없어, 광주시민 3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왔다. 그때 교회는 예배를 드리거나, 출입을 자제하며,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투쟁에 가담하지 않는 게 교회의 길인가, 어떤 상황에도 중립적이면 되는 것인가.

선교사로서 피터슨 목사는 외신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 존 언더우드와 대화하며 정치적 중립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선교사로서 정치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현 상황은 정치적 이슈 이상이라 … 잔혹 행위가 저질러졌으므로, 현 상황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9)라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기계적인 정치적 중립에 불편함을 느끼고, 불편함을 동료 선교사에게 털어놓으며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시 기회가 온다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더 이상 인터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신, 피터슨 목사는 끝까지 광주에 남기로 한다. 미 공군 중사 데이브 힐로부터 광주에 폭격 가능성이 있으므로, 속히 빠져나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광주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건을 목격하기로 한다. 피터슨 목사 등 선교사들이 광주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광주 폭격이 취소된 건 아닐까.

신학적 인식의 오류와 인간적 양심의 작동 사이, 교회는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