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비판 이론을 고안해낸 그리스도인 철학자 ― 크리스토퍼 왓킨 모나시 대학교 교수

[418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3]

2025-08-30     김동규
사진: Christopher Watkin 유튜브 채널 갈무리

영국에서 나고 자란 크리스토퍼 왓킨(Christopher Watkin)은 현재 호주 모나시 대학교 프랑스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 지저스 칼리지에서 근대와 중세 언어를 공부했으며, 학부 재학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1년간 체류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에서 유럽문학&문화연구학 전공으로 데리다와 칼뱅에 관한 논문을 써서 철학석사 학위를 받고, 모리스 메를로퐁티, 폴 리쾨르, 장-뤽 낭시의 존재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또 머리 에드워즈 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주요 저서로 박사논문을 확장한 《현상학인가 해체인가?》, 무신론 연구의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 《어려운 무신론》, 《오늘날의 프랑스 철학: 바디우, 메이야수, 말라부, 세르, 라투르에 나타난 인간의 새로운 모습들》, 《자크 데리다》, 《창조를 통해 생각하기: 문화 비평의 도구로서의 창세기 1장과 2장》, 최근에 번역된 《성경적 비판 이론》 등이 있다. 이 인터뷰에서는 프랑스 철학의 탁월한 전문가이면서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계승·변형한 포괄적 작업인 《성경적 비판 이론》을 쓰게 된 동기와 주요 통찰은 물론이고, 철학자로서의 동기 및 무신론 연구와 관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인터뷰는 7월 15일 온라인에서 이루어졌으며, 서강대 철학연구소 강지하 선생이 대화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선생님의 신앙 형성과 종교적 배경이 궁금합니다.

제 첫 신앙 형성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13-14살까지 매우 행복한 무신론자로 자랐죠. 종교와 영성에 대한 깊은 욕구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속상하거나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벨기에의 제1차 세계대전 전적지를 처음 견학했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현장에는 작은 흰 십자가들로 가득 찬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져있었죠. 엄청난 규모의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을 실감 나게 합니다. 삶에 대해, 그 사람들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거대한 계획 속에서 제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했어요. 그 시점에서 엄청난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의문들에 제가 완전히 마비되지는 않았지만, 알아가고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여행에서 만난 기독교인 친구가 저를 자기 교회로 초대했습니다. 당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열려있어서 교회로 갔지요.

그 교회에서 성서를 통해 설명하는 예수님이 실제로 당신이 말씀하신 바로 그분일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서서히 깨달아졌어요. 우주는 제가 그때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를 수 있었죠. 매 주일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지켜보면서,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안 돼.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 아직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잠시나마 그런 상황에 있었죠. 매우 매력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엇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때는 처음 참가한 그리스도교 여름 캠프였다고 생각합니다. 15살쯤,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 방학 동안 영국의 한 기숙학교에서 지내며 운동장과 스포츠 장비를 사용했고, 매일 성서를 공부했죠. 캠프에서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인 것 같다”고 생각한 이유는, 첫째로 제가 성서 공부를 정말, 흔쾌히 즐겼다는 거예요. 누군가 성서를 펴서 예수님에 관해 설명할 때마다 전율을 느꼈고 흥분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네. 왜 예수님에 대해 듣는 것이 이렇게 흥분되는 걸까?’ 둘째로, 평소와 다르게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즐겼다는 겁니다. 저는 꽤 이기적인 소년이었는데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탁자에 물병을 가져다 놓고, 설거지하면서 ‘정말 즐겁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아. 이건 나답지 않아. 나는 보통 나 자신에게만 집착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제 안의 무언가가 저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저 자신이 아니었어요. 더 큰 힘이 작용하고 있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그분이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놀랍습니다.

이것이 제가 매우 행복한 무신론자에서 더욱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된 짧은 이야기입니다.

- 너무 흥미롭습니다. 선생님의 공부 경험에 대해서도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선생님을 철학으로 이끌었는지요? 프랑스 철학에 관심을 두시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 공부를 하셨지요.

저는 항상 큰 질문들을 좋아했습니다. 무엇이 어떤 것을 좋음으로 만드는가? 우리가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이런 질문들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살펴보는 일은 항상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초기에 읽은 책 중 하나가 《소피의 세계》였던 것 같아요. 그때 독일에 있었는데, 우연히 그 책을 독일어로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지요. 삶에 대해 매우 열렬하게 생각한 많은 사람이 과거에 있었고, 그들이 정말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근현대 언어학, 곧 프랑스어와 독일어 학위 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 공부의 많은 부분은 철학적이면서 문학적이었습니다. 문학과 철학 사이의 모호한 영역에 있었던 셈이지요. 제가 읽던 책들을 쓴 사람들도 역시 이런 거대한 질문들을 던지고 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프랑스 전통에서 철학적 문제를 탐구하는 데 제 인생의 3년을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어요. 저는 충분한 특권을 누렸고,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저를 철학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박사학위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죠. 그 시점에서 저는 말하자면 ‘안에’ 있게 되었고, 다양한 토론에 기여하고 더 넓은 대화 속에서 여러 입장을 들어볼 수 있었어요. 이후로 뒤를 돌아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 선생님의 첫 번째 책은 《현상학인가 해체인가?: 메를로-퐁티, 폴 리쾨르, 장-뤽 낭시에 있어서 존재론의 문제》이지요. 처음 보기에는 이 사상가들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메를로-퐁티와 리쾨르는 현상학적 전통에 속하지만, 낭시는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이니까요.

당시부터 이미 제 사고를 움직이게 했던 것이었으면서 지금 더 강해진 생각은, 우리는 다양한 사상가들과 접근 방식을 서로 구분 지어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현상학적 접근에는 메를로-퐁티라는 20세기 위대한 사상가가 있고, 데리다와 낭시를 중심으로 한 ‘해체’라는 것도 있죠. 리쾨르에 이르면 현상학적 해석학이 등장하지요. 우리가 이러한 이름표들을 도구가 아니라 지배자로 다루기 시작하면,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서로를 구분하려고 하게 됩니다. 철학적 접근법을 서열화하고 ‘나는 현상학자니까 해체를 거부해’ 또는 ‘나는 데리다를 따르니까 현상학을 얕보지’라는 식으로 자신을 식별한다면, 우리는 큰 것을 잃게 되지요.

그럴 때 놓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이들 접근 방식이 상호 간에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절충해서는 안 되지만, 각각이 환원 불가능한 물음에 고유한 시각과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모두 거부하는 것도,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도 문제죠. 차이를 더 정교하게 탐색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책의 제목은 말장난이기도 해요. 의미 중 하나는 ‘무엇이 옳은가 - 현상학인가 해체인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고요. 또 다른 의미는 우리가 정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가, 또는 이 둘이 공유하는 흐름이 둘의 차이만큼이나 흥미롭게 탐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조를 단순히 통합해서는 안 되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죠. 이들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과 일관성이 있으며, 차이만큼이나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 2011년경에 출간한 또 하나의 단독 저서 《어려운 무신론》(Difficult Atheism)은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 퀑탱 메이야수 같은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 이후의 사유’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흥미로운 개념인 탈신학(post-theological)이라는 용어를 제안하셨어요. 이 사유는 선생님이 제시한 표현 곧, 전통적인 무신론이라는 기생주의(parasitism)나 금욕주의(asceticism)와는 구별되는 방식의 사유처럼 보입니다. 선생님의 관점에 따르면, 기생성과 금욕성만으로는 ‘신의 죽음’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제안하는 탈신학적 사유란 무엇인가요?

그 책은 제안(proposal)이라기보다 기술(description)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집필 시기에 새로운 무신론(New Atheism)이 한창이었거든요.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 같은 인물들이 활발히 활동했고, 무신론이 문화적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저는 프랑스 철학 및 대륙철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의 무신론이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의 무신론과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죠. 무신론도 나름의 ‘교파’들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무신론이라는 명칭 아래에,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몇 가지 관점이 있죠. 책에서 세 가지 유형을 제시했는데요. 첫 번째 금욕적(ascetic) 무신론은 종교적 전제를 의심스럽게 여길 법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해요. 니체가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가 말한 ‘광인의 우화’를 보면, 우리는 지구를 태양에서 끊어냈고, 이제는 위아래가 어디인지조차 모릅니다. 즉, 신을 없애면 신과 함께 작동하던 선, 인간 등 여러 방향감각과 개념들 역시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입니다. 그것들은 신과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히 엮여있어서,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의 ‘인간’도 신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다른 유형의 무신론은 리처드 도킨스와 가깝지만, 도킨스보다 정교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신에 대한 믿음만 단순히 중단하면, 이전에 믿던 다른 모든 것은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의미도, 선함도, 인간성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고, 단지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초월적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는 믿지 않을 뿐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퀑탱 메이아수(Quentin Meillassoux)의 사상에서 표명됩니다. 제가 쓴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의 앞마당에 전차를 몰고 들어가 그리스도교가 서양 전통에서 쌓아온 모든 전리품과 부를 차지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철저히 비종교적 관점에 서면서도, 그리스도교가 제공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어, 메이야수는 ‘부활’에 가까운 무언가, “죽은 자에 대한 심판과 정의”에 가까운 무언가를 인정해요. 그리스도교적 신 없이도 그리스도교가 제공해온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저는 이런 접근을 점령(occupation) 혹은 “종교의 영토를 점유한다”고 표현했죠. 그가 이 작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해내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일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 방식은 니체와도, 도킨스와 같은 이들과도 달라요. 니체와 마찬가지로, 메이야수도 신을 빼고 나머지는 다 남길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리를 받치는 쐐기돌을 제거하면서 다리가 계속 그대로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격이죠. 니체 무신론의 금욕적 접근으로 결론 내지 않고, 그리스도교가 주는 모든 혜택을 신 없이도 얻으려 합니다.

저는 이 세 가지가 오늘날 사회에 유통되고 있는 무신론의 유형이라고 생각해요. 첫째는 금욕적 무신론, 둘째는 신에 대한 믿음만 멈추면 나머지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유형, 셋째는 둘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지만 도킨스식 무신론보다 훨씬 정교한 유형입니다.

- 선생님의 또 다른 책 《오늘날의 프랑스 철학: 바디우, 메이야수, 말라부, 세르, 라투르에 나타난 인간의 새로운 모습들》도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에서 초점이 ‘신’에서 ‘인류’로 옮겨졌다고 주장하시면서, 서로 다른 현대 사상가들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호스트’(host)에 의존한다고 설명하셨죠. 그 호스트는 능력, 실체, 혹은 내러티브일 수도 있습니다. 이 ‘호스트’ 개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인간 개념과는 무엇이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이 주제가 오늘날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 책을 2016년에 집필해 출판했는데, 최근 AI의 부상과 함께 이러한 질문들이 다시 대두되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답해야만 하는 문제들이 되었지요.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AI는 우리가 ‘대학이란 무엇을 위한 기관인가? 우리는 학생들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게 만듭니다. 예술과 인문학 분야를 보았을 때, 학생들이 이제는 스스로 쓰지 않고도 우수한 에세이를 제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존재합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매우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교육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AI가 지금 우리에게 답하도록 요구하는 질문 중 하나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해요. 답을 미루고 싶더라도, 현실 속에서 어쨌든 답을 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저는 이 질문에 —아직 AI 시대가 오기 전에 쓴 책에서— 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은데요. 전통적으로 주요한 답변 중 하나이면서도, 실제로는 매우 문제가 많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접근이 곧 인간다움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어떤 능력 또는 역량이라는 주장입니다. 바로 여기서 ‘호스트 속성’(host property) 개념이 등장하죠.

이 용어는 다른 저자들에게서 차용한 것이지만, 매우 유용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결정적인 무언가이기 때문이에요. 서양 전통에서는 이성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주장해온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임을 입증한다는 것이죠. 또 다른 많은 사상가가 언어, 특히 문법을 갖춘 언어(syntactic language)의 사용이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봐요. 그 외 공감(empathy) 등 다양한 후보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호스트 속성’으로 택하든지 그 속성을 갖지 않은 인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이죠. 그 이유는 잠재적으로만 갖고 있는 경우(아주 어린 아기들), 한때 그 속성이 있었지만 더는 없는 경우(노인들), 평생 가질 수 없는 경우(심각한 지적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난 사람들) 등 다양해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다면, ‘이성’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딜레마에 봉착하지요. 여기엔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여러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아예 인간이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죠. 실제로 사회 안에는 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그런 방향으로 기우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저는 중증 장애인이나 노인을 비인간 또는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결코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비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단순히 특정 속성만으로 인간을 결정짓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하죠. 저는 초월적 신에 호소하지 않고도, 가장 약하거나 취약한 이들도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자원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여러 가능성을 검토합니다.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것은 ‘다원적 접근’(multifaceted approach)인데요. 그중 하나가 이야기 동일성(narrative identity) 개념이지요.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story)를 통해 얻습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문화도 우리가 누구인지 이야기를 들려주고요. 국가·지역·집단별 이야기 등 집단적 차원에서도 이야기를 공유하죠. 우리 자신을 근본적으로 이야기, 즉 담론을 통해 이해한다는 점은 방대한 문헌에서 입증됩니다. 저는 책에서 “이야기가 사람을 지탱해줄 수 있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어요. 예컨대 심각한 지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있다고 해도, 그 아이가 철학자가 생각하는 인간 고유의 이성이나 언어 능력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인간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 자리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듯,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 또는 동일성을 찾게 되지요. 이것은 특정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주변의 이야기 그물망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며, 장애가 있는 아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죠. 우리 각자의 이야기도, 우리가 어른이기 때문에 비로소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기 때 이미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짜여 들어간다는 점도 중요한 사실이지요.

인간됨을 결정짓는 그 어떤 ‘호스트 속성’이 없다 해도, 누구도 예외적이거나 특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야기에 의해, 혼자 힘으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서 품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가장 약하고 취약한 자들까지도, 이미 존재하는 ‘정체성의 담론(frame)’ 안에서 자연스럽게 품을 방법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지만, 인간다움을 한 가지 특정 속성에만 걸리게 하지 않고 다면적으로 접근할 때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중요한 원리임을 강조합니다. ‘이 속성이 있으면 인간, 없으면 비인간’이라는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누가 인간이고 아닌지를 단정 짓지 않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 이제 《성경적 비판 이론》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먼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동기는 한마디로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세속적인 대학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죠. 정말로 알고 싶었고, 반드시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내가 공부하는 이 수많은 철학자와 어떻게 연결되지?’ 이 철학자들이 지적이고, 철저하며, 깊이 고민한 이들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들이 단지 흥미로운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뭔가 틀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짚어낼 수가 없었죠.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통찰력 있고, 엄밀하더라도, 어떻게 그들의 사상에 제가 충분히 감명받지 못하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어 애를 먹었는데요. 책을 읽고, 팟캐스트를 듣고,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치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는 것처럼 조금씩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가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을, 즉 구별이 있으면서도 관계성이 존재하고, 사랑이 본질적인 의미를 갖고, 인간이 고립된 원자가 아니라 항상 관계 속에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온 우주를 설명하는 근본적인 틀임을 보여주는 글을 읽었어요. 이런 식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얻은 다양한 통찰을 모으고,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 정리해보고자 했습니다. 그 틀 안에 제가 세속적 세계에서 접하는 다양한 사유 방식을 위치시키려 했죠.

이 과정은 매우 오래 걸렸고요. 처음 ‘성경 전체를 조망하는 책을 문화적인 시선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때부터, 《성경적 비판 이론》을 써내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한국 독자들을 위한 간단한 인사 말씀과 함께, 더 효과적으로 읽고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조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가 조언을 드릴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정말이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한국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죠. 이 책은 저의 한계, 배경, 훈련에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저는 주로 서구, 특히 프랑스 철학을 공부했고, 영국에서 자라 지금은 호주에 살고 있어요. 그렇기에 어떤 것은 잘 쓸 수 있지만, 모르는 것과 오해하는 것도 많겠지요.

《성경적 비판 이론》을 ‘더 거대한 벽을 이루는 하나의 벽돌’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가진 도구와 경험으로 이 벽돌을 놓았지만, 그 벽에는 반드시 더 많은 벽돌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적, 아우구스티누스적 관점에서 간호나 스타트업과 같은 다양한 직업 세계를 다룬 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자산을 각기 다른 문화에서 끌어낸 여러 접근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책을 읽으시면서 ‘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왓킨 박사님은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런 불편함이나 의구심 속에 더 한국적인, 더 적합한 응답을 고민할 수 있는 창의적 토양이 있다는 거예요. 블로그 글을 쓸 수도, 팟캐스트를 만들 수도, 책을 써볼 수도 있겠죠. 성경이라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하되, 한국적 맥락에서 펼쳐지는 사회 이론이 있다면, 그런 책이 나온다면 정말 흥미진진할 것 같고, 저 역시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복음이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고 자라나는지를 보는 일은 진정한 기쁨이죠. 같은 복음, 같은 예수, 같은 진리이지만, 각 문화적 토양에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자라날 수 있어요. 저 역시 문화적으로 특정한 관점에서 저술했다는 점을 인식해요. 그러니 제 접근법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꼭 여러분만의, 더 맞춤형이고 적합한 방식으로 발전시켜 가시길 응원합니다.

- 개혁파 전통이나 개혁파 신학자 및 철학자들에게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이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세계관에 대한 이 모든 대안 중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사회적 상상’(social imagenary)이 가장 풍부한 개념일 것이다.”1) 이 표현을 사용하신 의도와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세계관’ 개념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친숙하게 사용되어왔고, 참으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큰 장점과 강점은,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극히 복잡한 질문을 아주 기본적이고 중요한 몇 가지 질문으로 추려내어 명료하게 정리해준다는 데 있지요. ‘궁극적인 실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세상에 무슨 일이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어떻게 바로잡힐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죠. 정말로 날카롭고 유익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쯤부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세계관의 관점만으로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한계와 위험이 있다는 성찰이 등장했습니다. 세계관적 접근은 우리의 ‘세상 속 존재’를 지나치게 지성적으로 환원해버릴 위험이 있지요. 우리 존재 근본을 오직 그런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둔다면 뭔가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리스도교, 비그리스도교 양자 모두의 연구가 보여주듯, 사람들이 말로 내놓는 대답과 실제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는 종종 큰 차이가 존재하니까요. 인간이 세상 안에서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단순한 지적 개념에서만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근본적 지향을 어디에서 얻는 걸까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바로 찰스 테일러의 ‘사회적 상상’ 개념이에요. 테일러는 이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프랑스 사상가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에게서 차용했고요. 테일러가 강조한 것은, 우리 머릿속 관념들보다 훨씬 위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일련의 직감과 본능이 먼저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대화에서 어떤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가, 일대일 관계나 직장 혹은 길거리에서 어떤 행동이 적절한가 같은 것들이죠. 대부분 우리는 이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보거나 언어화해본 적이 없지만, 실제로 우리 삶을 이끌어주는 실질적 원리가 됩니다. ‘무엇을 물어볼 수 있을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직관적으로 답을 내리고 살아요. 이러한 감각은 단순히 의식적 생각이 아니라, 종종 이야기·상징·신화·의례·관습 등에 의해 형성되지요. 사회적 상상이란 곧 이런 사고의 층 아래,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살아가는지에 관한 더욱더 근원적인 지향을 탐구하는 개념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은 매우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테일러 역시 개념이나 생각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유일하거나 본질적인 틀이 아닌 부수적이거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 더 넓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죠.

저 역시 제 책에서 이 생각을 한 단계 더 확장하거나, 혹은 자주 간과되는 요소들을 조명하려고 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환경,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도 매우 중요한 형성력을 지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스마트폰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매우 특정하게 유도하지요. 집의 구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살아본 여러 나라에서 대개 자녀는 각자 자기 방을 갖고, 부모도 따로 방을 쓰며, 모두 따로 잠을 잡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나 중립적인 일이 아니고, 한 세트의 전제와 가치가 숨어있어요. 우리는 매일 밤 각자 방에 들어가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모종의 교리문답 교육을 받는 셈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마다 전혀 다르게 가족이 함께 자는 풍습도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지요. 결국, 사회적 상상에 주목한다는 것은, 우리가 매일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수많은 ‘작은 교리문답’ —즉, 습관과 관행— 들이 우리의 신념이나 교리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게 하는 일입니다.

크리스토퍼 왓킨 교수의 저서들

- 한국에서는 성경을 특정 교리나 정치적 입장, 교회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활용하는 일이 매우 흔합니다. 미국의 일부 교회처럼 극우 세력과 연대하는 교회도 있으며, 성경 말씀을 인용해 극우 정치 성향을 옹호하거나, 성소수자나 이주민,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혐오 발언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런 편파적 태도를 피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비판 이론의 형태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편향된 태도를 피할 수 있을까요?

간단하고 다소 경솔해 보일 수도 있으나 결코 경솔하게 말하려는 것은 아닌 답변은 이렇습니다. 성경 전체를 읽으세요. 특정한 정치적 이념에 그리스도교를 끼워 맞추려는 입장들은 결국 성경의 일부 구절이나 사상을 선택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 일부만 믿는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강조하는 성경 진리의 비중은 성경 자체가 전체적으로 배치한 강조점과 다르죠.

다시 말해, 어떤 주제는 성경이 비율적으로 다루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이야기하고, 다른 주제는 훨씬 적게 다루는데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리고 의미를 가지고 성경에 어떤 강조를 두셨다고 신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things of first importance)을 말할 때, 그것이 우리가 성경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지, 임의로 무엇을 가장 많이 말하거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의 진보적 사회사상가 조지 레이코프(제가 알기로는 기독교인은 아닙니다)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문화 전쟁과 정치적 대립이 근본적으로 두 가지 현실 인식 방식에서 비롯된다고 봐요. 하나는 ‘엄격한 아버지 도덕’(strict father morality)으로, 주로 우파와 연관되며, 정의와 개인 책임, 잘못한 사람에 대한 처벌, 능력주의에 중점을 두죠. 다른 하나는 ‘양육하는 부모 도덕’(nurturant parent morality)으로, 주로 진보적 세계관과 연결되며, 연민과 공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돕기, 구조적 장애물 인식, 함께 번영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집중하죠. 레이코프가 흥미롭게 지적하는 점은, 성경의 하나님은 이 두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마땅히 처벌이 필요한 곳에서는 정의롭고 공평한 처벌을 집행하시는 동시에, 깊은 연민과 자비를 보이시기도 합니다. 현대사회는 둘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지요.

성경은 이 두 성품을 아름답게 조화시킵니다. 출애굽기 언어를 빌리자면, 하나님은 분노가 더디며 사랑이 풍성하시지만, 동시에 악인을 결코 무죄로 두지 않으시죠. 반면 현대 문화는 이 특성들을 찢어놓고 서로 반대되는 편으로 만들어, 한쪽에선 정의와 자립, 능력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쪽에선 연민과 체계적 지원을 강조하며, 마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충돌하게 합니다. 레이코프도 이 긴장을 인식하지만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아요. 성경 하나님이 보여주는 더 풍부하고 복합적인 현실 모델을 어느 정도 포착한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과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 이런 단순화된 이념적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해야 해요. 이것은 결코 우유부단해지거나 항상 중도를 찾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현대 문화 스펙트럼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중간 지점이 아니에요. 양쪽을 초월하며, 이 두 정치적 입장이 협소하고 제한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훨씬 넓고 포괄적인 성경적 비전을 제시하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념적 축소를 거부하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와 전 범위를 포용하는 더 풍성하고 온전한 성경적 비전을 충실히 드러내는 거예요. 일부만 부분적으로 떼어내거나 과도하게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온전한 균형을 이루는 길을 가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한말씀 해주십시오.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부르심 받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를 함께 추구합시다. 우리가 이 원칙으로 시작한다면, 그리 큰 잘못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동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