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ᄋᆞᆯ의소리〉, 공감 그리고 새 꿈

[418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2025-08-30     민대홍

그는 왜 〈씨ᄋᆞᆯ의소리〉를 냈나

해방 후 함석헌은 잡지를 내고자 꿈을 품었다. 무려 주간지로. 장준하의 〈사상계〉에 글을 쓰면서도, 급변하는 시대 상황 가운데 민중의 요구를 때에 맞게 전하기 위해 월간보다 더 잦은 잡지 발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에 알아보니 주간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1)

민중의 숨 쉴 틈이 되었던 〈사상계〉는 1958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첫 필화를 맞이한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에서 남한을 꼭두각시로 묘사한 일이 문제가 되어 함석헌과 장준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 거다. 정부가 문제 삼은 문구는 이렇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 놀음이었다.”2)

〈사상계〉는 계속해서 정권과 갈등했다. 1959년 2월호 권두언에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 실리자, 정부는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백지로 내버렸다. 3·15 부정선거에 반발하며 일어난 4·19 민중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간 자리에는 5·16 군사정변을 거쳐 박정희 독재정권이 들어섰고, 〈사상계〉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권의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국가 차원의 압박이 지속되자 광고가 끊기고, 판매량이 줄어 재정 문제에 시달린다. 인쇄비, 원고료가 없으니 지면도 대폭 줄였다. 소수의 구독자로 제대로 된 운영을 할 수 없었을 터. 장준하는 큰 빚을 지게 된다.

장준하는 강원용 목사를 찾아가 위기에 빠진 〈사상계〉를 인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부완혁이 발행인을 맡았다. 그러다 1970년, 한국 사회의 병폐인 부정부패와 비리를 풍자한 김지하의 시 〈오적〉이 실리자, 정부는 이 일을 빌미로 〈사상계〉를 강제 폐간시켰다. 김지하와 편집진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민중의 입을 막는 집권 세력이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시절, 〈씨ᄋᆞᆯ의소리〉는 바로 그때 탄생했다. 마련해둔 재정이 전무했기에, 주간지는 어림도 없었고, 월간지 등록을 해놓고 한참 만에야 창간호를 선보였다. 함석헌은 말한다. “도둑놈들은 도둑질한 돈이니 물 쓰듯이 하며 생색내겠지만 내게는 그런 돈 없습니다. 등록이 된 후에도 잡지 내기가 늦은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필자들을 섭외할 인력도, 재정도 없었다. 창간호는 표지 포함 60쪽으로 출간했다. 오직 함석헌의 글로만.

발행인 겸 편집인, 두 몫을 해야 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는 이런 글을 실었다. “본지는 여러분께서 짐작하시는 대로 순전히 가난한 씨ᄋᆞᆯ들의 정성을 모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밀어주시는 뜻에서 마음 가지신 분들의 장기 구독을 원합니다.”

한 사람의 글로 구성된 볼품없는 〈씨ᄋᆞᆯ의소리〉 창간호. 지속가능한 미래가 불투명했던 잡지. 그러나 목적만큼은 선명했다.

국민이 누구나, 죄인조차도, 자유로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자랑할 나라지, 누구는 말을 하고 누구는 할 수 없는 나라는 참 인간의 나라가 아닙니다.3)

〈사상계〉 폐간 한 달 전. 민중의 입이 막힌 세상, 인간의 나라 같지 않은 세상에서 할 말을 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나온 〈씨ᄋᆞᆯ의소리〉. 때는 1970년 4월 19일이었다.

씨ᄋᆞᆯ이 뭐길래

씨ᄋᆞᆯ이란 말은 민(民), people의 뜻인데, 우리 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아내기 위해 일부러 새로 만든 말입니다.

ᄋᆞᆯ은 발음을 알과 같이 하는 수밖에 없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깊습니다. ‘ㅇ’은 극대(極大) 혹은 초월적(超越的)인 하늘을 표시하는 것이고, ‘ㆍ’는 극소(極小) 혹은 내재적(內在的)인 하늘 곧 자아(自我)를 표시하는 것이며, ‘ㄹ’은 활동하는 생명의 표시입니다.
우리 자신을 우선 이렇게 표시해 봅시다.4)

1950년대, 함석헌은 YMCA 회관에서 열린 스승 유영모의 강연에 참여했다. 목요일마다 열리는 《대학》(大學) 강좌였다. 청중 한 사람이 ‘민(民)’을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겠냐고 질문했고, 유영모는 ‘씨알’이라고 답했다. 함석헌은 이를 퍽 좋게 여겼다. 언젠가 잡지를 내면 ‘이름에 씨알을 넣으리라’는 생각도 갈무리해 두었다. 이후 함석헌의 내면에서 숙성된 씨알은 씨ᄋᆞᆯ이 되었다. 아래아(ㆍ)는 본디 한글에서 매우 중요한, 없어서는 안 되는 글자였으나, 지금은 쓰지 않으니 빼앗기고 잃어버린 민중의 역사와 닮은꼴이라 여겼다.

씨ᄋᆞᆯ은 민(民)을 번역한 말이니 민(중)이라 불러도 뜻은 같다. 그러나 말과 글에는 역사가 담겨있다. 오랜 시간 이 땅에서 민으로 살았던 이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민을 계속해서 쓰기보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말을 쓰고자 했다.

함석헌은 ‘ᄋᆞᆯ’에 종교적 의미도 부여했다. ‘ㅇ’는 하나님/하늘/뜻이다. ‘ㆍ’는 사람이다. ‘ㄹ’은 하나님/하늘/뜻과 사람이 어우러져 세상에서 춤추는 형세다. 그러니 ‘ᄋᆞᆯ’은 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뜻을 받들며 사는 사람, 곧 씨ᄋᆞᆯ이다.

함석헌은 씨ᄋᆞᆯ이 역사의 주체라고 믿었다. 그러나 씨ᄋᆞᆯ은 주체성을 박탈당했다. 국가권력이 입을 틀어막고 기득권자의 목소리만 유통하고 있으니 씨ᄋᆞᆯ은 제소리를 낼 수 없었다. 특히 당시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극한으로 작동한 사회였기에,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이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때였다. 옳은 소리, 속소리, 제소리를 못 낼 뿐 아니라 힘센 이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 씨ᄋᆞᆯ. 혹시나 반공의 칼날에 다치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해야만 했던 씨ᄋᆞᆯ. ‘ㆍ’가 잊힌 것처럼 씨ᄋᆞᆯ은 역사의 무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인격의 기초를 닦는 초등 중등 교육을 반공 일색으로 해서는 병신 인간을 만들어 내게 되고 나라의 백년대계를 그르치는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감옥 갈 각오를 하면서 외쳤으니 못 들었다고는 못할 것이다. 못 들었다면 그것은 국민에게 너무 외면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요, 언론을 탄압해서 멍청이를 만든 것을 증거하는 말이다. 천고청비(天高聽卑)라 높을수록 낮추 듣도록 힘써야 한다.5)

옥쇄를 각오하고 제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한들, 함석헌이 그렇게 살고 외친다 한들, 그 소리가 씨ᄋᆞᆯ에게 닿지 않으면 공허한 울림만 될 뿐이다. 하여 함석헌은 씨ᄋᆞᆯ이 자기 존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으로 언론을 택했다. 씨ᄋᆞᆯ이 응당 냈어야 하는 소리를 그가 대신 외쳤다. 그래서 잡지 이름을 〈씨ᄋᆞᆯ의소리〉라고 지었다. 이 잡지를 통해 씨ᄋᆞᆯ과 새로운 꿈을 꾸고자 했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언론인의 길로

1970년. 함석헌의 나이 70세. 모든 일에 손을 떼고 은퇴할 나이에 새로운 일을 벌였다. 그리고 80세가 될 때까지 열렬히 잡지를 발간했다. 함석헌이 〈씨ᄋᆞᆯ의소리〉에 노년을 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씨ᄋᆞᆯ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근대화가 결코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민족도 나라도 모르고 일본의 종노릇 미국 독일의 종노릇을 해서라도 살아만 가면 그만이라는 동족을 죽여서라도 부귀를 하면 그만이라는 것들에게는 근대화가 살길이겠지만 씨ᄋᆞᆯ에게는 아니 그렇습니다. 사실을 보십시오. 근대화를 부르짖어서 농민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노동자는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 역사의 달리는 방향을 볼 때 이것은 멸망으로 우리만 아니라 전 인류가 멸망으로 놓여 있습니다.6)

동시대 씨ᄋᆞᆯ들이 처한 삶의 문제는 세상 풍조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군부독재 정권은 반공을 내세워 언론과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고, 경제개발을 위해 다른 모든 과제를 뒤로하고 내달렸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자주국방과 군대 현대화 등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했다. 씨ᄋᆞᆯ의 고통은 여기에서 온다.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가난했던 농부가 도시 빈민이 된다. 최저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이들이 급속히 늘었다. 함석헌이 작은 예수로 여긴 전태일은 노동자들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생명까지 바쳤다. 그럼에도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함석헌은 이러한 시대에 〈씨ᄋᆞᆯ의소리〉가 할 일을 고민했다. 씨ᄋᆞᆯ의 정신이 반공 이데올로기에 억눌리지 않기를, 경제 제일주의에 함몰되지 않기를 바랐다. 고통을 유발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사람으로서, 씨ᄋᆞᆯ로서 온당한 권리를 누리는 일이 마땅한 세상을 꿈꾸었다. 이 바람을 씨ᄋᆞᆯ과 더불어 이루고자 했기에 “본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밑바닥 씨ᄋᆞᆯ의 자리에서 씨ᄋᆞᆯ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라는 편집후기(2호, 1970.5.)를 남기기도 한다.

〈씨ᄋᆞᆯ의소리〉는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탄생했다. 고난은 함석헌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만큼, 고통스러운 씨ᄋᆞᆯ의 삶이 70세 노인을 언론인의 길로 이끌었다.

함석헌의 언론관은 여타 다른 매체와는 결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형태였다. ‘사실 보도’는 저널리즘의 기본이다. 언론인 함석헌은 〈씨ᄋᆞᆯ의소리〉를 사실 보도 매체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시대를 평가하는 언론, 동서양 고전을 해설하며 오늘을 살 지혜를 얻기 위한 글, 동시대 지식인들의 세상 보는 눈을 주요 콘텐츠로 삼았다. 사실을 보도하는 일 역시 해석이 개입된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사회에서 ‘어떤 사실’을 선택하느냐가 바로 해석이요, 그 언론의 저널리즘이다. 대다수 언론이 권력 눈치를 보느라 정부 정책이나 유명 정치인들이 처한 상황을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들이 취사선택한 사실들은 수치화된 경제성장 지표 보도요, 정부가 그 업적을 이루는 데 어떤 기여를 했는지 나열하는 것 따위다. 보도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씨ᄋᆞᆯ의 삶, 씨ᄋᆞᆯ의 실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씨ᄋᆞᆯ들에게 주류 언론 보도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딴 세상 소리였다.

정치권력은 체제의 울타리로 씨ᄋᆞᆯ의 삶을 제한하고, 경제 권력은 씨ᄋᆞᆯ의 등뼈에 빨대를 꽂는다. 언론/지식 권력은 씨ᄋᆞᆯ이 고통의 현실을 온당히 바라볼 수 없도록 딴 세상 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래서 씨ᄋᆞᆯ이 고통받았다. 〈씨ᄋᆞᆯ의소리〉이 추구한 저널리즘은 바로 그 고통을 향해있었다.

오늘, 우리의 저널리즘

〈씨ᄋᆞᆯ의소리〉가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세상에 나온 뜻을 이제-여기에서 되새겨본다. 우리 시대 언론은 무엇에 공감하고 있을까? 그릇된 선택으로 온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정치 지도자가 어떻게 처벌받는지를 8개월째 뉴스 머리기사로 보고 있다. 새 정부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안력을 돋우어 살핀다. 또한 외국과 외교를 어떻게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 주가 동향을 살피며 내 지갑이 얼마나 두꺼워질 수 있는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내가 먹고사는 문제에 무엇이 유리한지에 따라 엇갈린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고 나뉘어 다툰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함석헌이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시대의 관심이 사람의 고통이라면 오늘날은 사람에 의해 고통당하는 자연에까지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 사람만이 씨ᄋᆞᆯ이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포함해 극한의 물질문명 때문에 신음하는 모든 자연 생태계가 씨ᄋᆞᆯ이다. 이른바 신유물론이 조명되는 세상이다. 탐욕이 생태계 파괴를 극한으로 치닫게 하며, 그 영향을 고스란히 사람이 되돌려 받는다. 과거 함석헌이 주목했던 고통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 언론도 새 시대에 새로운 꿈을 꿔야 한다. 70세 노인 함석헌이 언론인이라는 꿈을 품은 것처럼 말이다. 꿈꾸기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유튜브 저널리즘을 표방한 다양한 언론이 각양각색 뉴스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역사학자·철학자·과학자들이 뉴스에 등장해 우리 시대 문제를 다양하게 분석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심지어 스마트폰을 들고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씨ᄋᆞᆯ이 되어 역사를 기록하고 시대를 평가할 수 있다. 레거시 미디어만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저널리즘이 생겨나는 시대에 사람의 문제, 곧 정치적 현안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통의 문제에 대안을 외치는 이들이 공존한다.

함석헌은 〈씨ᄋᆞᆯ의소리〉 발행을 “사상의 유격전”으로 보았다. “직장, 다방, 선술집, 소풍 놀이터”에서 벌어지는 삶의 이야기로 씨ᄋᆞᆯ의 정신을 키우는 것으로 집권자들과 전쟁을 벌이고자 했다. 비록 초반에는 60쪽, 때로는 40쪽, 양이 많으면 100쪽짜리 잡지였지만, 그 작은 목소리가 오늘을 사는 우리를 깨우친다. 그래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거짓 정보가 진실을 덮고, 기후위기가 생태계를 흔들며, 혐오와 차별이 일상의 말과 행동 속에 스며들어 있는 오늘도 씨ᄋᆞᆯ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들의 삶,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지구에서 고통받는 모든 존재를 위해 공감과 책임을 품은 저널리즘이 절실하다. 우리가 바로 그 언론의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기를 꿈꾸어본다.

■ 주

1)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씨ᄋᆞᆯ의소리〉 창간호(1970.4.)
2)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상계〉 통권 61호(1958.8.)
3) ‘나는 왜 이 잡지를 내나?’
4) ‘우리가 내세우는 것’, 〈씨ᄋᆞᆯ의소리〉 통권 50호(1976.1.). 1면에 게재된 후 지금까지 매호 싣고 있는 글이다.
5) ‘민족 통일의 길’, 〈씨ᄋᆞᆯ의소리〉 통권 4호(1971.9.)
6) ‘옛글 고쳐 씹기’, 〈씨ᄋᆞᆯ의소리〉 통권 2호(1970.5.)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