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 이후 16년, 우리 사회 주거권의 민낯 ―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장

[418호 특집]

2025-08-30     이원호
 ⓒ복음과상황 정민호

도시 개발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전제로 시행된다. 국가정책 차원에서 개발이 진행될 때, 과연 그 수혜는 모두에게 돌아갈까? 그렇지 않다. 삶의 터전을 잃고 내몰리는 이들이 언제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우리 사회 주거권 문제의 최전선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왔다. 신학대학 시절 도시빈민선교회에서 빈곤·철거민 운동에 뛰어들었고, 2007년부터 주거권 실현을 위한 단체에서 뉴타운 지역 세입자들을 조직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 참사 소식을 듣는다. 곧바로 현장에 간 그는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유가족들, 피해자들과 함께 치열하게 싸웠다.

현재는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이자, 40여 개 빈곤 운동 단체의 연대체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으로 일한다. 빈곤 문제에 맞서 다양한 의제를 연결하고 투쟁을 모색하고 있다.

희년함께에서 진행하는 ‘정의로운 주거권 세미나’ 강사이기도 한 그를 7월 9일 반빈곤운동공간 아랫마을에서 희년함께 토지정의센터 이철빈 청년활동가와 함께 만났다. 용산 참사 이후 발견한 것들, 한국 도시 개발의 역사, 우리 주거권을 위협하는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본지 이사 이철빈 청년활동가가 진행했다.

- 제가 전세사기대책위 활동을 할 때 거리 투쟁 현장에서 뵙던 모습이 익숙해서, 인터뷰로 만나게 되니 더 반갑습니다. 제가 친밀감을 느꼈던 점은 기독교인으로서 도시 투쟁 현장에서 꾸준히 함께하신다는 건데요. 학부 때는 신학을 공부하셨고, 이후 전도사 활동도 하셨고, 지금은 전업 활동가로 살고 계신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셨는지요.

너무 오래전 얘기네요. 고등학교 때 신앙적 경험을 하면서 감리교신학대학교에 갔어요. 거기서 도시빈민선교회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게 큰 계기였죠. 무슨 동아리인지 잘 모르고 찾아갔어요. 이름에 끌렸고, 자리가 남는 곳이기도 했거든요.

기숙사 선배에게 “도시빈민선교회는 뭐 하는 동아리예요?” 물었더니 “여기저기 달동네 담장 무너지면 담장 쌓아주고, 그런 거 하는 곳”이라고 답하더라고요. 공부방도 운영한다고 해서 ‘그래, 신학대는 예수님처럼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 온 거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 동아리를 찾아갔죠. 가입한 뒤 보니, 운동권 학생이 많이 활동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도시선교 동아리들은 주로 근방에서 활동했는데, 지역들이 모두 재개발 이슈로 철거 투쟁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빈민선교’라는 이름의 ‘빈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주거연합이라는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이전에도 기독교 사회운동 쪽에 몸담고 있었어요. 주거연합은 1990년대 초반, 철거 운동을 기반으로 보편적 주거권 운동도 함께하자는 목표로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제가 활동했을 때는 주민들을 조직하고 주거권 이슈를 제기하는 활동을 했고요. 2000년대 중후반부터 뉴타운 재개발에 지역 주민을 조직해 함께 대응했습니다. 2009년 용산 참사로 이어져 활동을 지속하게 됐죠.

이원호 집행위원장과 희년함께 이철빈 청년활동가. ⓒ복음과상황 정민호

- 활동을 시작하신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용산 참사’라는 거대한 사건을 마주하셨잖아요? 한국이 여러모로 발전했다고 느꼈던 시기에,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강제 철거가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이 컸습니다.

용산 참사는 2009년 1월 19일, 용산4구역(국제빌딩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재개발은 재개발인데, 상가 비율이 높은 지역은 ‘도시환경정비사업’이라고 해요. 지금은 ‘도시형 재개발’이라고 부르고요. 당시 그 지역 상가 세입자들이 강제 철거에 저항하며 철거 이주 및 대책을 요구했습니다. 빈 건물을 점거하고 망루 농성을 시작했는데요. 농성을 개시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어 강제 진압이 진행되었죠. 그 과정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 한 분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용산 참사 이전부터 말씀드리면, 한국 사회에서 이런 도시 개발의 역사는 오래됐어요. 1960-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지금의 재개발 방식이 본격화되었죠. 1983년 도입된 ‘합동 재개발’이 이어져 오는데요. 개발, 특히 재개발은 단순히 집 하나 부수고 짓는 게 아닙니다. 도시계획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여러 도시 기반 시설을 새롭게 확충하는 일이므로 국가가 해야 할 공익사업 영역에 속합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시 정부가 해야 할 사업이지만, 1980년대 주택공급 정책의 하나로, 주택을 이른 시일 내에 대량 공급하고자 민간에 참여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합동 재개발이 도입되었죠. 민간에서 주택과 토지 소유주들이 조합을 결성해 민간 건설사와 함께 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이에요. 여기에 국가만 가질 수 있었던 강력한 공권력인 ‘강제 수용권’이 부여됩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재산권(주택·토지)도 공공복리 실현이라는 명목하에 강제로 수용할 수 있는 권한, 곧 국가 공권력이 조합에 위임되어 진행되는 방식이었죠.

이 구조는 다소 모순적이에요. 애초에 공익적 성격이 강한 사업이라 권한을 행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개발 수익과 사업성 중심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는 민간 조합에 이 권한을 주다 보니, 1980년대에 아주 극심한 강제 철거와 개발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 3저(저금리·저유가·저달러) 호황이나 군사독재 정권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도시 개발을 밀어붙였던 일이 맞물리고, 1970년대 중동 건설 분야에 있다가 돌아온 건설 자본이 활동할 국내 무대도 필요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엄청난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민간 개발이다 보니 공간·시간 제약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개발 이익이 목적이니까 더 많은 이익을 내려면 빠르게 개발해야 했죠. 그러려면 사람들을 빨리 내보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폭력적 수단이 동원됩니다. 소위 ‘용역 깡패’라 불리는 철거 전문 업체가 생긴 것은 1986년이 최초입니다. ‘입산개발’이라고 지방의 조직폭력배들이 올라와 만든 철거 용역 회사였죠. 폭력 조직이 만든 회사답게 매우 폭력적이었어요. 조직폭력배 행동대장들이 모두 입산개발 이사였는데, 그들이 나와서 또 다른 철거 용역 회사들을 차렸죠. 지금 존재하는 회사 대부분이 그 후예입니다.

폭력적 상황은 세계주거연맹이 1987년 한국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철거를 하는 나라’로 지목할 정도로 극심했어요. 이 상황이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면서, 철거민들의 저항과 희생을 통해 제도가 점차 바뀌어 왔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로 접어들어, 서울 내에서 대규모로 개발할 곳이 줄어들었고, 신도시 개발이 많아졌죠.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서울 외곽에서 서울 대체지, 곧 강남 대체지를 만드는 신도시 개발이 일어났어요. 1990년대 중반까지는 서울 곳곳의 달동네·산동네를 철거해서 아파트 건물을 짓는 일이 사회문제였어요. 시민들도 관심을 두고 연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신도시 개발은 서울에서 떨어진 곳, 주로 미개발 지역이 대상이라, 거기서도 땅과 집을 빼앗겨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범위에 비해 이해 당사자가 많지 않았어요. 철거민들 투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는데도, 옛날처럼 사회에서 사람들이 직접 관심을 갖고 연대하던 일들이 다소 단절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 용산 참사 직전에는 도시 개발 상황과 운동 진영 인식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개발이 뜸했는데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부터 뉴타운 재개발 정책이 발표되어 다시 활성화됐죠. 산동네·달동네를 철거하는 과거 방식이 아닌, 서울 도심 상권을 중심으로 광역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부터 상가 세입자 문제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문제는 저를 포함해 당시 주거권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상가 세입자 문제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주거를 잃고 쫓겨나는 사람들 권리는 오랜 투쟁을 통해 운동화하고 요구했지만, 상가 세입자 문제는 어떻게 접근할지 파악하지 못했어요. 상가 세입자들은 보상이 중요했고, ‘손실 보상’이 문제 해결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요. 시민운동에서 개입하기 쉽지 않았죠. 중심 이슈로 다루지 못하던 중, 현장에서 계속 문제가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용산 참사가 발생했어요. 많이 반성했습니다.

- 참사 발생 당시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농성이 시작된 사실은 알았지만, 망루까지 지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며칠 후에 연대 방문을 해야겠다’ 정도로 생각했어요. 그전부터 용산4구역 세입자분들을 여러 번 만나 교육도 진행했거든요. 다음 날인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사고 소식을 들었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곧바로 대책위 상황실에 합류해 유가족들과 진상 규명을 요구했죠. 355일 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고 현장을 지키며 싸웠어요.

- 용산 참사가 우리 사회에 남긴 의미가 있다면요.

첫째, 경찰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인 만큼 과도한 공권력 남용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공권력에 의해 다수 시민이 사망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꼽을 정도니까요.

둘째,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개발 문제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당시 운동 진영에서 개발 철거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은 많지 않았죠. 빈곤사회연대와 주거연합이 용산범대위에서 주거·개발 문제를 최대한 부각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참사 발생에 영향을 준 시대·정치 배경도 있었을까요.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8년 2월 ‘광우병 촛불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났어요. 이 시위가 연말쯤 대통령 사과로 일단락되면서, 이명박 정권은 두 가지 핵심 기조를 내세웠어요. 하나는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상황에서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 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정권 입장에서는 2009년 1월 도심 한가운데서 철거민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행위가 두 정책 기조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비쳤겠죠. 특히 정부가 경제 위기 극복 방향으로 내세운 개발이, 사실은 사람들을 대책 없이 쫓아내는 일임을 폭로하는 농성으로요.

 ⓒ복음과상황 정민호

- 용산 참사로부터 벌써 16년이 지났는데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문재인 정부에 와서야 경찰청인권침해사건조사위원회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꾸려져 조사가 이루어졌어요. 경찰 자체 조사 방식이라 한계가 많았죠. 그럼에도 당시 상황이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진압할 만큼 성급하고 위급하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은 과도한 진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검찰 수사가 편파적이었고, 경찰의 무리한 진압을 밝히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다는 점도 드러났습니다.

사건 이후, 용산 참사가 촛불 시위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청와대·국정원 차원에서 대규모 여론 조작이 있었음도 밝혀졌습니다. 일부 혐의는 수사 권고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공소시효가 지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련 경찰청장이나 검찰총장의 사과 및 재발 방지 권고 수준에서 종결됐습니다. 제대로 책임을 묻지 못했어요. 진압 작전을 지휘한 당시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현재 3선 국회의원이고, 무리한 개발에 책임이 있던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은 지금도 서울시장이죠.

- 진압 문제와 더불어, 개발 과정 자체의 문제도 중요하게 보시는 것 같아요. 용산구청 등, 당시 인허가 기관들의 태도는 어땠나요?

구청처럼 당시 인허가권을 가진 기관들 태도가 중요한데요. 뉴타운 재개발이 많아지면서 개발 지역에서 철거민들이 구청에 민원을 제기할 때, 담당자들은 ‘집과 땅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사업’으로만 인식했습니다. 재개발은 도시계획 차원에서 국가 공익사업을 민간에 위임한 일인데도, 구청은 철거민들에게 ‘자기 땅과 집을 가진 사람들 사업이니 조합에 가서 얘기하고, 구청에 와서 생떼 쓰지 말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어요. 당시 용산에 재개발 지역이 많아 용산구청에는 민원, 철거민들 집회, 기자회견이 잦았습니다. 구청 담벼락에는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자제해달라’라는 경고판이 붙어있었죠.

용산 참사 당일, 당시 박장규 용산구청장은 외부 강연 중 사고 소식을 듣고 “(이 사람들은) 세입자들이 아니에요.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개발하는 데마다 돈 내놓으라고…. 그래서 떼잡이들이에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망루 농성에 참여한 최고령자, 72세 이상림 어르신도 아들과 함께 농성에 나섰다가 돌아가셨습니다.

- 고 이상림 어르신은 어떤 상황에서 농성에 참여하신 건가요?

막내아들 이충연 씨와 함께 망루 농성에 참여하셨어요. 어르신만 돌아가셨고, 아들은 부상을 당했어요. 유품 중 용산구청 공문이 있었습니다. 고인이 품고 올라가신 건데요. 고인은 관리 처분 인가(철거 직전 마지막 인허가 단계) 직전에 ‘법적 보상협의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으니 협의회를 열 때까지 관리 처분을 내주지 말라’고 민원을 넣으신 것 같았어요. 불에 타다 남은 공문에는 ‘보상협의회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관리 처분을 미룰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죠. 고인은 망루 농성에 들어가기 전, 구청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셨지만 결국 거절당했고, 공문을 품고 올라가셨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고 이상림 씨의 배우자 전재숙 집사의 인터뷰가 본지 2012년 12월호에 실렸다. ‘거기, 예수 믿는 철거민이 있었다’[제265호] 참고. - 편집자 주)

- 이후 해당 구역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안타까운 점은 참사 발생 1년 9개월 후인 2010년 10월에 법원이 용산4구역 관리 처분 무효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법원은 소유주 동의 과정에 불법이 있었다고 판단했죠. 하지만 이미 사람은 사망하고 건물은 모두 철거된 상태였습니다. 고인은 관리 처분 전 협의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가셨는데, 한참 뒤에야 무효 판결이 내려졌죠. 판결에는 해당 행정절차를 다시 밟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제재는 없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시 1년 정도 지연되었습니다.

2010년 이후 부동산 장기 침체기가 시작되어 상황은 더 복잡해졌어요. 시공사 삼성물산은 시공비 증액을 요구했지만, 조합은 부동산 상황을 이유로 거부해 1년 가까이 갈등하다 시공 계약이 해지되었죠. 맡겠다고 나서는 시공사가 없어 용산4구역은 철거된 상태로 7년이나 허허벌판으로 방치됐어요. 큰 나무까지 자라나 숲으로 변했을 정도였죠. 2016년에 효성이 시공을 맡아 공사가 재개되었고, 2020년 말에야 준공되어 입주가 시작됐습니다. 7년 동안 방치된 현장을 보면, ‘저럴 걸 왜 그렇게 서둘러 사람까지 죽어야 했나’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2021년 10월 3일, 세계 주거의 날을 하루 앞두고 주거 및 반빈곤 운동 활동가들이 용산정비창 부지를 점거하고 플래카드를 펼쳤다. (이하 사진: 인터뷰이 제공)

- 현재 한국 사회의 재개발·재건축 정책이나 시민 인식이 용산 참사 때와 달라졌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안타깝게도 비자발적 이주를 겪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한 이주 대책 측면에선 달라진 점이 거의 없어요.

과거보다 개발 속도가 줄어든 것은 부동산 경기 침체 영향이 크죠. 재개발은 민간이 사업성을 중심으로 추진하니까 부동산 경기 영향을 받아요. 한동안 침체해 도시재생으로 전환되기도 했지만, 2020년 이후 집값이 폭등하면서 보수 정권에서 도시재생을 폐기하고 재개발 활성화를 추진했죠. 오세훈 시장처럼 새 구역 지정은 많이 하지만, 실제 사업 추진은 부동산 불확실성으로 지연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업성이 충분히 나오지 않아, 과거처럼 갈등이 수면 위로 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 있죠.

긍정적 변화도 있습니다. 서울시가 강제 철거 예방을 위해 노력하면서, 용역 폭력의 정도는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과거에는 법원 집행관이 아닌, 조합이 고용한 용역이 집행을 대리해서 폭력이 극심했죠.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법원도 집행관 제도 등을 개선했습니다.

쫓겨난 사람들을 위한 대책은 바뀌지 않았어요. 상가 세입자의 영업 손실 보상이 3개월 치에서 4개월 치로 늘었을 뿐 본질적 개선은 없었죠. 주거 세입자 대책도 마찬가지고요. 더 나빠진 점은, 미약한 대책 대상마저도 구역 지정 이전부터 거주한 사람이나 상가 세입자뿐이라는 겁니다. 서울 정비 구역 약 90퍼센트가 과거 뉴타운 재개발 때 지정된 곳인데, 사업이 추진돼도 15-20년 전부터 살거나 장사한 사람만 대책 대상이 됩니다.

서울은 재개발보다 재건축이 훨씬 많아질 겁니다. 둘 다 도시정비법상 사업인데요. 재개발은 공익사업으로 수용권이 부여되지만, 재건축은 민간사업으로 분류되어 세입자 대책이 아예 없어요. 과거 강남 재건축 아파트 세입자들은 보증금 규모가 커 대책이 필요 없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 강남뿐 아니라 강북 노후 공동주택·연립주택 등에도 경제적으로 취약한 분이 많습니다. 상가 세입자 역시 재개발 지역이든 재건축 지역이든 개발로 손실을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 재건축 진행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아무 대책이 없을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지금은 사업이 잘 진행되지 않아 갈등이 덜 드러나지만, 다시 진척되면 엄청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죠.

- 제도적 인식은 달라졌다고 보시는지요.

정말 안 바뀝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표현만 조금 다를 뿐, 근본적 태도 변화는 크지 않아요. 참사 이후 인권·법률·사회 단체들은 ‘강제퇴거금지법’이라는 대안적 입법을 추진했어요. 개발 관련 법률이 다양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공통으로 적용될 기본법이 필요하다 봤거든요. 이 법에 담긴 기본 정신은 ‘재정착 권리 보장’입니다. 단순히 터전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개발 이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보상하거나 영업 조건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적절한 대책이 수립돼야 한다는 거예요. 대책 없이 이루어지는 퇴거는 강제 퇴거이자 불법이며, 행정적 처분이나 처벌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개발 사업에 ‘인권영향평가’를 도입하는 것도 중요해요. 법적으로 교통영향평가나 환경영향평가는 의무지만, 개발이 지역 주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평가하지 않아요. 미리 평가해서 취약계층 분포와 대안적 대책 등을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이 법안에 담겼지만, 18-20대 국회에서 발의만 됐을 뿐 한 번도 논의되지 않고 회기 종료와 함께 폐기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개발 관련 문제가 특히 정치권에서 다루기엔 매우 높은 문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봐요.

세입자보호법 개정을 촉구하는 세입자 및 단체 활동가들이 국회 앞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 도시 주거 운동의 역사를 관찰해오신 입장에서, 용산 참사와 최근 전세사기 대란 같은 주거 문제를 보면 어떤 특징이 보이시나요?

이런 주거 문제들은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어요. 용산 참사 당시 현장에 오신 분들은 “아직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강제 철거를 하는 줄 몰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다” 말씀하셨죠. “우리가 철거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할 수 있겠나” 질문도 많이 하셨어요.

철거민들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참사 이후 저를 만난 철거민 중, 과거 자신도 TV로 용산 참사를 보고 ‘저 빨갱이들’이라 욕했는데, 직접 당해보니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우리가 철거민 운동에 연대할 수는 있지만, ‘나의 일’이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죠.

한국 사회 도시 개발의 역사는 결국 ‘대책 없는 개발에 나의 주거권을 빼앗겨온 역사’입니다. 정부가 주택공급 부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1990년 이후 매년 신규 주택 45-50만 호를 공급해왔지만, 주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주거권은 더 위협받고 있죠. 세입자로서 우리가 느끼는 주거 문제는 ‘공급 중심 주거 정책’이 만들어온 역사예요. 이 과정에서 누구는 집을 빼앗기고 철거민이 되어 쫓겨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주거 안정을 누리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용산 참사 이전까지 철거민 의제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참사 이후 더 확장된 주거권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도 연결성 때문이에요. 2000년대 이후 다양한 주거 의제, 특히 청년 주거권에 관한 목소리가 나온 것은 또 다른 새로운 피해자들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대표 사례가 전세사기죠. 정부가 주거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나섰지만, 2000년대 전에는 개발을 통한 공급, 이후에는 주택공급과 주택금융 정책이 결합하면서 문제를 키우는 방식으로 작용했고, 전세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범죄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이런 도시 개발과 관련된 문제가 결국 ‘권리의 박탈’, 즉 주거권을 빼앗는 ‘우리들의 문제’라 보고 있습니다.

-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이런 주거권 운동에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 혹은 시민들의 연대를 끌어낼 실마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말 어려운 문제예요. 주택 시장 구도가 점차 바뀌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코로나 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월세 파업’ 같은 세입자 운동이 많이 일어났어요. 소득 감소나 실업 증가 상황에서 월세 인상 등에 저항하는 운동이었죠. 한국은 대규모 운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데, 기본 구조 자체의 차이 때문입니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부동산을 통해 이익을 얻는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한국은 주택 매매 시세 차익을 통한 투기가 성행하는 반면, 외국은 임대 사업 중심으로 부동산 수익을 얻는 구조가 더 많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한국의 부동산 임대는 아직 개인 임대인 중심이지만, 점차 기업형 임대 중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 상황도 서서히 변화한다는 점에서, 향후 세입자들이 더 조직화한 형태로 연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일종의 부동산 투기 구조의 변화인데, 대비가 필요하겠죠.

저는 임대차법 개정으로 획득한 미약한 권한이지만 1회 갱신권을 사용해본 경험에 세입자들의 권리 의식을 조직할 실마리가 있다고 봐요. 여기서부터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거권 운동이나 토지 정의 운동에 대한 연대도, 결국 나의 집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집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의 집 이야기를 하는 자리, 재테크나 집값이 아닌 주거권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많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요. 기독 운동의 여러 장에서도, 집과 땅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이야기로부터 주거권과 토지 정의 운동이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행 이철빈 희년함께 청년활동가
정리 정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