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선

[419호 예술, 구원을 묻다]

2025-09-30     백지윤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왕상 19:11-12, 새번역)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레스 이스 모어’(less is more), 적을수록 좋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습니다. 건축에서 모든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기능에 따른 최소한의 요소만 남겨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가 설계한 수많은 마천루로 둘러싸인 현대사회는 역설적으로 ‘모어 이스 모어’, 즉 많을수록 좋다는 사고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극대화된 효율성을 추구하는 규모의 경제가 사회 기본 원리로 작동하고, 끝없는 소비가 인간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한 대기업 광고에서 처음 들었던 ‘무한경쟁’이라는 생경한 개념은 어느새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모두를 속도와 경쟁으로 몰아가는 신자본주의 체제가 일상의 질서로 자리 잡았습니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빠른 것을 숭배하는 사회는 이제 인간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슈퍼 휴먼, 초인간의 세상을 꿈꿉니다. 마블 무비의 히어로처럼 말이지요.

‘모어 이스 모어’ 원리는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더 크고 많은 것을 선호하고, 강한 힘과 능력에 열광하는 모습은 사회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에서조차 경쟁 사회의 기준을 따르면서 사람보다 효율성과 성과를 앞세우는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요. 더 높은 곳에 올라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자는 ‘고지론’은 무한경쟁 사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 대신 거기에 최적화된 인재를 키우는 데 급급했습니다. 오래전, 장애를 가진 친구에게서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무한경쟁이라는 말을 듣고 허를 찔린 것처럼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출발선에 설 수 없는 이들에겐, 무한경쟁이라는 언뜻 공정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원칙이 최소한의 인간됨마저 위협하는 잔인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탓이었습니다. 사회의 현실과 내 이웃의 삶을 이해하는 눈은 조금도 갖추지 못한 채 예수님의 생명 운운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비대해진 대형교회의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시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먼 단절과 소외, 차별로 사람들을 내모는 거대한 빌딩과 쇼핑몰로 채워진, 참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사회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화려하고 전문화된 무대 세팅과 세션은 이제 ‘은혜로운’ 예배의 필수 요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어’ 정신으로 움직이는 교회에서 작고 소박한 것의 가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 허름한 마구간 구유에 놓인 아기였고, 거친 두 손으로 평범하고 투박한 가구와 집기를 만드는 목수였던 아름다우신 주님, 열렬히 환호하는 대중 앞에 보잘것없는 당나귀를 타고 나타나신 기이하고 겸손한 왕은 전부 잊힌 것만 같습니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하나님의 어린양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거창하고 장엄한 의식 대신, 먹고 마시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를 택하셨지요. 어디에나 있는 가장 평범한 물질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유한한 땅의 존재가 영원한 하늘의 실재에 참예하는 신비를 담아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치고 보여주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가치와 신성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회복해야 합니다.

현대미술의 세계에도 화려하고 거대한 것의 논리를 거슬러 작고 소박한 것에 주목해온 예술가들이 존재합니다. 크고 빠르고 화려한 것에 눌려 잘 보이지 않던 작고 느리고 평범한 것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이들이 보여주는 ‘사소함의 미학’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어떨까요.

작고 소박한 것의 예술

“늘 예술가로 살아온”1) 리처드 터틀이 평생 자신의 예술에서 몰두해온 것은 종이, 끈, 천, 못, 철사, 스티로폼, 나무조각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고 평범한 재료입니다. 웅장한 규모도, 화려한 기교도 버린 그의 작품은 예술의 모든 장중함과 무게를 훨훨 털어버린 깃털처럼 가볍고 시적인 시각언어를 구사합니다. 뉴욕에 거주하는 예술 에세이스트 박상미는 리처드 터틀을 “가장 가난한 재료를 가장 겸손하게 사용해 뭔가 다른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작가로 소개하지요.2)

잘 알려진 그의 〈3rd Rope Piece(세 번째 로프 피스)〉(1974)는 못 세 개로 짧은 밧줄을 벽 중앙에 고정해놓은 작품입니다. 비대칭 팔각형의 얇은 종잇조각을 흰 벽에 핀으로 고정해놓은 〈1st Paper Octagonal(첫 번째 종이 팔각형)〉(1970), 얇은 철사와 그림자를 이용해 전시장 벽에 희미한 선을 그려놓은 철사 작업(Wire Pieces, 1972)은 모두 극도로 단순한 작업 방식을 보여줍니다. 터틀은 자신의 작업에서 “어떤 것을 일상의 경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림이나 사물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는 무엇인가” 혹은 “어떤 것을 예술로 부르기 위해 그것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개념적 압력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3)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미미한 존재감은 단순히 예술성이나 기교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지요.

이런 작품을 미술관에서 만나면, 이게 무슨 예술이냐며 단박에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가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얼핏 보면 너무 단조롭고 시시하기 그지없는 터틀의 작품은, 과도한 자극에 둔감해진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단순하고 소박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연습하게 합니다. “사소해 보이고 아름답지 않아 때로 간과되지만, 끊임없이 속삭이고 끊임없이 벗어나면서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나의 사적인 도시》, 14쪽) 그의 작품 앞에 멈추어 서서 시선을 집중할 때, 재료에 담긴 솔직한 사물성이 드러내는 소박한 형태와 질감, 공간과의 상호작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크고 빠르고 화려한 것들이 주는 강렬한 자극에 익숙해진 우리의 감각을 디톡스해주는 셈이지요. 박상미의 말처럼, 예술가의 겸손하고 진중한 손끝에서 이 가난한 재료들은 사물의 언어로 노래하는 시로 다시 태어납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고 가벼운 사물이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몸짓은,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크고 빠른 것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작고 소박한 것의 가치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아방가르드의 파격에 익숙한 현대미술 세계에서조차, 터틀의 작품이 보여주는 ‘사소함’에는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1975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신보수주의 미술비평가 힐튼 크레이머를 중심으로 한 언론의 혹평에 시달렸고, 결국 전시를 기획한 마샤 터커는 휘트니 미술관 큐레이터 자리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인터뷰 영상에서 터틀은 덤덤히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관습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더군요.”4) 세상이든 예술이든 이미 학습된 것에서 벗어나(unlearn) 편견 없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란 그만큼 어려운 일 같습니다.

터틀은 예술계가 부정적으로 반응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작업을 이어갔고, 포스트미니멀리즘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현대미술사에서 터틀이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박상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이 미국의 거대한 공간과의 대결이었다면, 터틀의 (포스트) 미니멀리즘은 그 공간에서 햇빛을 받고 물을 먹고 숨 쉬고 있음이다. 자신의 미미한 물질성을 잊지 않음이다.”(《나의 사적인 도시》, 16쪽)

아그네스 마틴의 〈우정〉(1963)

정말로 잭슨 폴록이 보여주는 대담한 제스처와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 리처드 세라가 내놓은 육중한 강철 구조물이 드러내는 미국 모더니즘의 강렬함과 압도적 스케일에 비해, 터틀의 작은 종잇조각과 끈 작업은 작고 연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작고 연약함은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잃어가는 인간적인 것의 가치를 일깨워주지요. 그의 소박한 작품이 드러내는 가볍고 경쾌한 감성은 도널드 저드나 솔 르윗이 추구하던 미니멀리즘의 차갑고 기계적인 환원성과도 구별됩니다. 형식주의적 엄격함과 포스트모던의 냉소적 비판성 가운데서도 특유의 인간적이고 유기적인 감성을 유지했던 아그네스 마틴, 에바 헤세 같은 예술가들과 닮아있습니다. 예술의 일상성, 가난하고 소박한 재료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는 유럽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운동과도 친연성을 보여줍니다.

에바 헤세의 〈19번 반복 3〉(1968)

단순함과 반복의 수행

보잘것없는 재료를 자유롭게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리처드 터틀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사소함의 미학’을 가르쳐주는 작가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고요한 사물의 영성을 탐색한 이탈리아 화가이자 판화가 조르조 모란디입니다. 터틀이 표현하는 소박함이 작고 느린 것에 무뎌진 우리의 감각을 세밀하게 일깨워준다면, 모란디가 드러내는 고요함은 그 감각을 더 깊어지게 해줍니다. 모란디는 병·항아리·컵과 같은 일상적 사물을 반복해서 그린 작업으로 유명한데요.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계속된 〈Natura Morta(정물화)〉 시리즈에서, 같은 사물을 미묘하게 다른 구도로 수십 차례 반복적으로 그렸습니다. 제한된 색채와 절제된 형태의 차분한 변주는 수도원에서 보내는 일상처럼 단조로워 보이지만, 단순한 반복이 가져다주는 깊은 묵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감도는 화면은 일상적 사물이 지닌 고유한 존재의 무게,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실재의 깊이를 엿보게 하지요. 〈뉴요커〉의 미술비평가 피터 셸달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집마다 모란디의 회화를 걸어놓고 “눈과 정신, 영혼이 매일 훈련하는 수련장”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5)

볼로냐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았던 모란디는 스스로 수도사 같은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침실 겸 작업실에서 평생 정물화를 그렸고, 벼룩시장에서 사 온 병과 컵, 그릇 등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물건들을 그림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병과 그릇이 잘 어울리도록 몇 주에 걸쳐 테이블 위에 배치하고, 그 사물들에 대해 몇 주에 걸쳐 숙고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그의 삶은 마치 수도사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묵상과 수행을 해가는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그의 고요한 삶(still life)도 그가 그린 정물화(still life)처럼 변화가 거의 없는 정적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자 존 리월드는 모란디의 작업실을 방문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선반이나 탁자 표면은 물론 상자, 깡통, 그와 유사한 용기들의 평평한 윗면에도 먼지가 두텁게 쌓여있었다. … 이 먼지는 무관심이나 지저분함의 결과가 아니라 인내의 산물이었으며, 완전한 평온의 증인이었다. 요동치는 세상의 모든 흥분으로부터 벗어난 이 소박한 은신처의 고요함 속에서, 이 일상적인 사물들은 그들만의 고요한 삶(still life)을 살아가고 있었다.6)

정물화 장르는 인생의 유한함과 무상함을 기억하게 하는 네덜란드의 바니타스(vanitas) 회화처럼 수많은 상징과 의미로 가득 채워진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란디의 ‘스틸 라이프’는 단순함과 비어있음이 특징입니다. 비어있음은 인간과 사물 양쪽 모두를 있는 그 자체로 존재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이지요. 누군가가 모란디의 정물화가 리얼(real)하다고 말하는 이유이지요. 어떤 꾸밈도 없이 원래의 사물 자체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비어있음을 통해 창조세계 안에 깃들어있는 성사적 신비를 엿보기도 합니다. 평범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초월을 매개하는 성찬처럼요. 모란디는 말합니다. “정물화를 그리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방법이다. ‘부동의 오브제’를 대면하고 내재된 미에 대해 명상하고, 고요한 묵상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나의 사적인 도시》, 201쪽) 단순함과 반복의 수행을 통해 사소함의 미학을 추구하는 그의 정물화는, 평범한 일상에서 영원하고 거룩한 것을 마주하고 묵상할 수 있는 고요한 시선을 훈련시켜 줍니다.

다른 방식의 삶을 위한 신학적 통찰

터틀의 예술이 가르쳐주는 작고 소박한 것에 대한 새로운 주의력, 모란디의 예술이 보여주는 단순함과 반복의 고요한 영성은, 경쟁적 구조와 소비주의 경향을 불러온 사회 위기를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신학적 사유와 연결할 때 실천적 파급력이 깊어집니다. “예술의 중요성은 그것이 삶을 위한 도구가 되고, 삶이 우리에게 더 열려있게 만들어주는 데 있다”는 터틀의 말처럼(〈Art21 online magazine〉), 예술이 미적 경험을 넘어 삶과 연결되는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지요. 이 지점에서 신학과의 대화는 풍성하고 의미 있는 울림을 만들죠.

막스 베버 고등문화사회연구소 하르트무트 로자 소장은 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사회의 위기에 대한 그의 사유는 중요한 신학적 성찰과 맞닿아 있습니다. 가톨릭 교구 초청 연설문을 기초로 출간된 최근작 《Demokratie braucht Religion(민주주의는 종교가 필요하다)》7)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근대의 성장 논리가 더 빨라지고 높아지고 많아져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을 낳았고, 이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생존 경쟁을 부추겨 민주주의에 위기를 불러왔다고 분석합니다. 로자는 이전부터 현대사회의 끝없는 가속 압력이 인간을 소외와 무감각으로 몰아넣었다고 꾸준히 지적해 왔는데요. 그는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소외되지 않음’에서 답을 찾습니다.

로자는 소외되지 않는 삶을 위해 공명(resonance)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는 “좋은 삶이란 결국 다층적 ‘공명’ 경험이 풍부한 삶, 찰스 테일러가 쓴 표현을 재차 차용한다면 두드러진 ‘공명축들’을 따라 함께 울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이런 공명축들은 “주체가 사회적 세계, 객관적 세계, 자연, 노동 등과 맺는 관계에서 생겨난다. 이런 의미에서의 공명은 ‘소외 아닌 것’이다”라고 하지요.8) 즉, 우리로 소외되지 않은 삶을 살게 하는 공명은, 우리가 사물과 세계, 타인과 맺는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에서, 크고 강한 것의 독백이 아닌 작고 약한 것과의 상호 응답 속에서 발생합니다.

《민주주의는 종교가 필요하다》에서 로자는 공명에 대한 논의에 더욱 초점을 맞춥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상과 공격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공명은, 기존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낯선 목소리를 듣고(자극), 세상을 다른 식으로 보고 듣게 하며(변화), 타자와 연결됨으로써 소외를 벗어나 살아있음을 느끼지만(자기효능감), 한편에서는 내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거나 제어할 수 없다는 것(통제 불가)을 특징으로 삼습니다. 로자는 사회에서 이런 공명을 발생시키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 종교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가능하게 하는 기독교적 가치에서 위기에 봉착한 현대 민주주의의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수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모습,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부끄러운 민낯을 생각할 때, 과연 이 시대 기독교가 그 희망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기독교적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이 시급한 이유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소비주의 경제 질서에 대한 신학적 재고를 강조하는 가톨릭 정치신학자 윌리엄 캐버너는 《Being Consumed(소비된 존재)》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인간의 욕망을 결핍이 전제된 소비의 논리 안에 가두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캐버너는 결핍과 소비에 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독교의 성찬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경제 질서를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성찬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경제와는 달리, 결핍이 아닌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분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나만의 욕망을 좇는 이기적인 소비가 아닌,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음(소비함)으로써 ‘우리’가 한 몸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 또한 들려주지요. 캐버너는 말합니다. “성찬을 소비하는 것은 반(反)소비 행위다. 성찬에서 소비하는 것(to consume)은 소비되는 것(to be consumed)이며, 자신보다 큰 무엇의 일부로 흡수되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은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Being Consumed》, 84쪽) 나만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소비에서 나눔과 하나 됨을 의미하는 소비로의 전환은, 더 크고 빠른 것을 지향하는 세상에서 공존의 가치와 작고 연약한 것의 존재를 존중하는 삶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찬미받으소서: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회칙(Laudato Si’)》에서, 성찬을 “우주적 사랑의 행위”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이 “작은 물질을 통하여 우리 내면 깊은 곳에 가닿고자” 하셨다고 말합니다(167쪽). 교황은 오늘날 생태적 위기를 초래한 소비주의의 ‘버리는 문화’(throwaway culture)를 비판하면서, 특히 그것이 소외된 이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지적하지요(26쪽). 우리는 빵과 포도주라는 일상의 평범한 물질을 통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성찬에서(167쪽), 우리의 욕망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르게 지향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욕망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찰로 연결됩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우리의 심장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쉬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지요. 인간의 욕망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수많은 철학적·신학적 성찰의 주제일 뿐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경험적 진실입니다. 욕망을 끝없이 부추기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의 욕망이 참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더욱 유의미합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우리가 전지전능·무소부재 같은 거창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구체적인 물질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터틀의 작품이 작고 소박한 것의 세상을 열어 보여주듯, 모란디의 단순하고 고요한 사물이 그 안에 깃든 성사적 신비를 엿보게 하듯, 성찬의 평범한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초월의 실재 안으로 끌어올립니다.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것으로 압도하기보다, 늘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을 통해 크고 놀라운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터틀은 “내가 이 보잘것없는 재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나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나의 사적인 도시》, 14쪽). 터틀의 작품에서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모란디의 작품에서 단순함과 반복의 고요한 영성을 훈련할 수 있다면, 우리도 미친 듯이 질주하는 무한경쟁의 위압적 질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작고 사소해서 눈에 잘 띄지 않고 쉽게 잊히는 것들, 느리고 약하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은 크고 빠르고 강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인간됨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표지입니다. 무엇보다 스스로 연약하게 되셔서 세상의 모든 연약한 것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깨워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백지윤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면서 《오늘이라는 예배》 《하나님의 집》 《온 마음 다하여》 《빅 스토리 바이블》 등을 번역했다. 환대와 문화 영성의 공간 모나이 폴라이(Monai Pollai)를 운영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 미주 코스타에서 현대미술 관련 세미나 강사로 섬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