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419호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용서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줌. (표준국어대사전)
생각해보면 일련의 사건으로 끊어진 인연들은 죄다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다. 한때 단짝이었던 친구, 사랑했던 애인…. 반대로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어떤 단절의 순간 없이, 그저 서서히 멀어지기 마련이었다.
왜 가장 가까웠던 이들하고만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을까. 거리 조절에 실패한 탓이리라. 누구에게나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일부 사람들은 내 못난 모습을 감당해줄 수 없었을 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오래오래 잘 지냈다면 좋았을 것을.
내 실수로 그렇게 된 적도 있다(사실 내가 잘못한 경우가 더 많다). 말로 설명 못 할 이유로 멀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을 때, 결국 그에게 연락을 했다. “그때 생각나서 연락했어. 미안해.” 답장은 곧바로 왔다. “난 신경 안 쓰고 지내고 있어.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어디 가서도 내 얘기 하고 다니지 마. 무슨 말인지 알지?”
예상 밖의 답이었다. 아니, 딱히 예상한 답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미련, 미안함, 용서받고 싶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용서받은 것도, 비난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관없이 살자’는, 철벽 같은 단절의 통보랄까. 멀어진 채로 살아가는 것.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저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알았다. 용서의 영역이 이분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릴 적에는 용서받고 싶은 마음에 기어이 용서를 받아내곤 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순수했던 마음이었으리라.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강박처럼 회개 기도를 했다. 주일에 교회에서는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해달라며, 한 주의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내려는 시도를 했다. 물론 “나도 모르게 지은 죄”라는 고백은 겸허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회개 기도가 끝나고 찾아오는 개운하지 않은(?) 느낌을 돌아보면, 이는 분명 내 책임을 온전히 살피지 않고도 용서받으려는 회피적 표현이기도 했다. ‘값싼 은혜’라고 하던가.
이제는 용서를 단순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것에 반감이 든다. 용서는 단순하지 않다. 용서에는 전제되는 것이 있다. 첫 번째는 바로 ‘뉘우침’이다.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분명한 행동과 변화가 필요하다. 두 번째는 적절한 ‘보상’이다. 이미 입은 피해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그들만의 일일지라도, 혹은 더 많은 사람이 얽힌 일일지라도, 진실을 고백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관계가 모호하고 복잡할수록, 이 과정은 더욱 번거로워진다. 이 과정에서 용서받기를 포기할 수도 있겠다. 자기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하기에. 모든 잘못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피해를 본 사람에게도 항상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니 용서받는 것보다, 화해를 추구하는 것보다, 그저 멀어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흘러가는 시간은 관성대로 모든 것을 멀어지게 할 뿐이다. 주고받은 상처와 피해는 시간이 지난다고 그대로 있지 않다. 상처가 커지기도 하고, 곪기도 한다. 화해에도 적절한 때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용서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다. 관계된 이들이 개인적인 용서를 원하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해도, 당사자 마음과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용서하려 해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다. 하나님마저 용서를 그리 쉽게 하시는지는 의문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인 나의 한계다.
언제부터 ‘용서가 삶에 필요하다’고 인식했는지 생각해보면 나와 타인의 이기심을 이성적으로 분간해낼 수 있게 된 때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부정적 마음을 어디까지 품을 수 있는지 알게 된 때. 어림잡아 중학생 즈음, 비로소 용서라는 행위와 언어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
친구와의 갈등에 뒤덮여있던 청소년 때에 용서는 가장 어려운 숙제였지만, 가장 빈번히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매일 들려오는 험담의 늪에서 용서를 숙제처럼 마주했다. 알게 모르게 반복되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험담은 가뜩이나 예민해진 중학생의 마음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용서는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와 타인의 완악함과 연약함을 마주했던 그즈음부터 나는 예수님의 존재가 궁금해졌다.
기독 대안학교를 다니며 들어본 예수는, 나처럼 자기만 생각하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였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내어주는 자. 따라 하다 보면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별로인 내가 변화될 수 있으리라는 좋은 예감이 드는 신. 마침 그 신은 엄마와 아빠가 믿는 신이었고, 다녔던 학교가 가르치고자 하는 세계관이었다. 내가 처한 환경 때문에 처음으로 예수를 알게 됐고, 어쩌면 나도 용서가 필요한 존재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와는 사뭇 달라 보이는 그 신이 진짜인지 의심할 새 없이, 그가 당연히 세상의 신이라 믿었다. 내게 하나님이란 굳이 전제를 파헤칠 필요 없는 보증수표이자, 주변인들의 신이었기에. 그저 그 신의 넉넉함과 인자함을 닮아 더 많이 용서받고 덜 상처 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해 보이는 신’이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변화되고자 매일 저녁 주어진 20분의 기도 시간을 회개로 꽉 채우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를 떠올려보면 무모하고 맹목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했던 것 같다. 인간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내 바람은 딱 한 가지였다. ‘신이 이런 나의 못난 모습도 용서해주길, 내가 이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길,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는 사람이 되길.’ 기도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성경 읽기로 뻗어갔다. 쉬는 시간에도, 저녁 자습 시간에도 틈틈이 성경을 읽으며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못난 나의 용서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타인에게도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서는 조금씩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20대가 되고 난 후,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용서도 중요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타인을 사랑하기 어렵다는 말처럼 나를 용서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용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숱한 자기검열은 편협한 자기 이해를 낳기도 했다. 타인에게 관대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에 허덕이는 날도 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타인에게 상처받고, 용서하길 반복시키면서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너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하셨다. 용서의 폭은 하나님에서 나, 그리고 타인으로 차근차근 자리를 옮겨 순환하듯이 돈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는 만큼 서로를 용서의 그릇에서 품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관계 안에서 받은 상처로 아픔, 억울함, 분노 같은 감정에 매몰되면 용서를 상상하는 일조차 버거워진다. 어쩌면 용서는 나라는 존재 너머로, 곧 서로에게 상처 주는 상황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시야를 넓혔을 때야 조금은 흔쾌해지는 일 같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 쉬운 인간이 타인의 상황과 상태를 헤아리고, 평화라는 대안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넘어서는 불가항력적 격려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용서는 버겁고 지루하고 지겨운 것인데도 왜 인생에서 여전히 키워드로 존재할까? 내가 찾은 이유는 사랑과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랑하기 위해선 매일의 새로운 용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흔쾌하지 않을지언정 사랑의 비결은 매일 용서의 다짐을 품는 일 같다. 머리,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려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포용하겠다는 소신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먼저 용서하겠다고 선언해도 겸연쩍지 않은 마음이 있어야, 사랑도 있는 힘껏, 누린 만큼 할 수 있다.
해가 갈수록 인류가 용서에 능하지 못한 존재라는 걸 느낀다. 잘못한 사람에게 적절한 인과응보로 ‘복수’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하고, 손해 보는 상황을 무척 싫어하고, 착한 사람은 호구라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소신껏 용서의 마음에 품고 사는 게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내 삶에 이미 빼곡히 쌓인 용서 덕분이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몇 번이나 용서했을까? 하나님이, 친구가, 애인이…. 그렇게 주변 사람들 얼굴과 용서를 조합하다 보면 이기심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이 겸허해진다. 수많은 갈등과 판단, 상처 속에서도 나와 주변 사람들은 용서를 택했고, 이는 내게 자유, 애정, 깊은 관계성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과 용서-감수성을 키워줬다.
나의 아무것도 아님이 다른 이의 빈틈을 용서할 용기가 됐고, 나를 감당하는 신과 주변 사람들 덕분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누군가에게 ‘용서’로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상대에게 내뱉어 말하지 않아도 ‘그 존재를 떠올릴 때 더 이상 부정에 휩싸이지 않고 사고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이유. 내게 용서는 자유와 사랑을 넘보게 한다. 그래서 내게 용서는 ‘존재를 견딜 깜냥’과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사랑에는 용서가 전제된다고 믿는다.
독자님은 ‘용서’에 대해 어떻게 정의하고 계신가요? 독자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상단어집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내향인들의 속마음 토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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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호
본지 기자. 신비로운 일들은 가까운 곳, 익숙한 장소에서 벌어진다고 믿는다. 개신교 월간지를 만들며 조심스레 세상을 알아가는 중이다.
이승은
본지 독자위원. 엄마에 의하면 자아가 건강한, 아빠에 의하면 생각을 잘 묘사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며 길러진 사회성 덕에 E(외향형)냐는 오해를 받곤 하지만, 최측근은 모두 내향인이란 사실을 긍정한다.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서 관찰하기를 습관처럼 하다 보니 자주 글을 쓰게 됐고, 쓰다 보니 주어진 삶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매일 반복되는 자기 검열과 자기 긍정 사이에서 고군분투 중인 4년 차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