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간, 복간, 검열 삭제, 그리고 씨ᄋᆞᆯ 저널리즘
[419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제때 못 나오는 잡지
1970년 4월 〈씨ᄋᆞᆯ의소리〉가 세상에 나왔다. “신문이 씨ᄋᆞᆯ에게 씨ᄋᆞᆯ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씨ᄋᆞᆯ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한다”는 이유가 창간 동력이었다. 매월 발간을 목표로 삼았다. 잡지는 두 호를 내고 폐간된다. 정부가 잡은 트집은 ‘인쇄소 문제’였다.
벌써 신문으로 알겠지만 잡지 발행 등록 취소 통지가 나와서 싸우고 있는 중이요. 본래 헌법에 정기 간행물을 내려면 일정한 인쇄소와 계약을 해서 그 서류를 첨부하게 되어 있소. 그래서 어떤 인쇄소와 계약을 했는데 1호 낸 후 그 주인이 압력을 받고 인쇄를 못하겠다는 거요. 그러면서 자기명의는 그대로 사용하고 자기가 소개하는 타 업자에게서 하라 해서 했는데 그것을 구실로 갑자기 취소 통지를 보냈소. 무법무리(無法無理),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놈들이지. (서형선에게 보낸 서신, 1970.06.17.)1)
시민의 알 권리가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세상. 〈씨ᄋᆞᆯ의소리〉도 칼날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 후 약 1년 3개월간 싸움을 벌인 끝에 복간되었다. 복간에는 무료 변론을 자청한 이병린(1911-1986) 변호사 공이 컸다. 그는 1969년 3선 개헌으로 공화당 정권이 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하자, 1971년부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조직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민주주의 수호와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인물이다.
어렵게 법정에서 승소하여 〈씨ᄋᆞᆯ의소리〉는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러나 나오는 모든 과정이 힘겨웠다. 인쇄하겠다고 나서는 업자를 찾기 어려워서였다. 복간호에 함석헌이 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인쇄계약 하러 인쇄소를 모조리 찾았는데 하나도 찍어주려는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도 비겁합니까? 돈은 이렇게도 소중합니까? 듣는 말에 어느 인쇄소는 그 주인이 5.16 사변 때에 소위 혁명 공약이라는 것을 찍어주었고 그래서 지금 부자 인쇄소가 됐다기에, 그는 아마 의협심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해서 찾아갔더니 “그런 잡지를 어찌 찍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라는 소회가 실려있다.
어렵사리 인쇄소를 찾았지만 앞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첫 발행은 선일인쇄소(서대문). 두 호를 채 못 내고 해약, 이후 복간호 때는 삼명인쇄소(중림동)에서 일을 맡았는데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다음 전광산업신보사(용산)가 인쇄했지만, 2개월 후 해약을 통보해왔다. 인쇄소가 돈 내고 책 만든다는 데 거절할 이유가 뭐였을까? 정부는 이 잡지를 인쇄하는 곳에 압력을 넣어 해약하도록 했다.
〈씨ᄋᆞᆯ의소리〉는 제때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보통 월간 잡지는 전(前)달에 편집이 완성되고 배본한다. 〈씨ᄋᆞᆯ의소리〉는 날짜를 맞추어 낼 수 없었다. 오랜 기간 편집을 맡았던 박선균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함석헌의 글 때문이었다. “함 선생님은 글을 위한 글을 쓰지 않으셨다. 뭔가 마음에 확신이 오고 영감이 오지 않으면 못쓰시는 이였다”2)라는 박선균의 회고는 늘 마감에 쫓기는 편집인이 겪는 고초를 느끼게 한다. 둘째, 사전 검열 때문이었다. 1-2주 걸리는 엄혹한 검열로 발행일을 넘기기 일쑤였다. 발간이 너무 늦어지면 두 호를 묶어 합본호를 내기도 했다.3)
이외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정부는 독자들도 탄압했다. 정보기관원과 형사들이 독자 명부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씨ᄋᆞᆯ의소리〉는 공식적으로 독자 명부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우체국에 압력을 넣어 발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한편, 일부 독자들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충청도 금산 지역 독자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형사들이 자신들을 찾아다니며 〈씨ᄋᆞᆯ의소리〉를 보지 말라고 압력을 가한 일도 있었다.4)
작가와 잡지를 만드는 이들뿐 아니라, 독자까지도 용기를 내야 했던 시절. 1970년대, 〈씨ᄋᆞᆯ의소리〉는 제때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제소리를 내고자 했다.
이기거나 지거나
1970년 5월 29일. 정부는 일방적으로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통보서를 보내왔다. 같은 해 6월 6일, 발행인 함석헌은 사실을 왜곡한 정부 문서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고, 이듬해 7월 6일, 대법원은 ‘정기간행물 등록취소처분 취소’ 최종 판결을 내렸다. 이후 등록증 재교부까지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약 1년 3개월간 강제로 침묵당해야 했던 〈씨ᄋᆞᆯ의소리〉. 그러나 그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늘이 우리의 재판 날인데 오늘 결과가 어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어찌 됐나 그것 때문에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지거나 이기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이겨도 우리 할 일은 할 것이요. 져도 우리 할 일은 할 것입니다.5)
당시 함석헌은 외국 순방 중이었다. 퀘이커 11차 세계대회 참여차 스웨덴 시그투나로 출국. 이후 영국·미국·캐나다 등지를 다니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같은 기간 한국에서는 이병린 변호사가 대리인으로 법적 싸움을 이어갔고, 함석헌은 독자들에게 서신으로 할 말을 전했다. 당초 함석헌이 잡지를 낸 이유는 씨ᄋᆞᆯ이 할 말을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잡지를 통한 언로가 막혔다면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내면 된다고 생각한 거다. 법적으로 이기거나 지거나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권력의 편만 드는 법이 설령 ‘입틀막’에 정당성을 부여하더라도, 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함석헌이 할 일은 글쓰기, 씨ᄋᆞᆯ이 할 일은 말하기. 말과 글이 남아있는 한 씨ᄋᆞᆯ은 지지 않는다.
1차 폐간 시기(1970.6.-1971.8.)에 그는 공적 서한을 독자들에게 16회 전달했고, 개별 독자들에게도 여러 편지를 썼다.6) 정식 간행물로 허가받은 매체를 통해 나온 글이 아니었을지라도, 씨ᄋᆞᆯ의 소리를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한국)을 떠나 여기서(스웨덴) 인간 같은 인간들을 보니 참 좋습니다. 부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러워도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저앉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가야지요. 가서 역시 욕을 먹어도 같이 먹어야지요.7)
함석헌은 세계의 씨ᄋᆞᆯ들이 처한 삶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 머무르지 않았다. 입을 막고, 삶을 억누르는 현장의 씨ᄋᆞᆯ, 한국의 씨ᄋᆞᆯ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 그는 한국의 씨ᄋᆞᆯ들에게 유럽과 미국 소식을 날랐다. 본받을 만한 것, 자본이 넘쳐나 잘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더러운 것, 베트남전쟁에 대한 평가, 온 세상이 하나의 ‘전체’라는 인식,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독서 후기, 종교와 정치에 대한 단상, 서양과 동양의 차이와 한국인이 받은 것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으니, 함석헌은 잡지를 내지 못하는 동안에도 말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외국에서 승소 판결 소식을 들은 이후 서형선에게 “잡지의 승소란 건 형식뿐이고 내용으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8)라는 편지를 썼다. 〈씨ᄋᆞᆯ의소리〉가 승소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본 거다. 이성과 합리가 통하지 않는 나라. 권력자가 제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판도가 바뀌지 않는 한, 작은 잡지사 하나가 법정에서 이겼다고 씨ᄋᆞᆯ의 승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함석헌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기거나 지느냐에 전부를 걸기보다, 할 수 있는 한 제소리를 내는 법을 택했다.
제소리의 까닭
함석헌은 어떻게 씨ᄋᆞᆯ의 소리, 제소리를 지속해서 낼 수 있었을까?
〈씨ᄋᆞᆯ의소리〉는 처음부터 편집 전문가 없이 내는 잡지였다. 편집에 기교를 부려 상업적 효과를 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영업부를 두어 수지 타산을 맞춘다든지, 광고 영업을 해서 제작비를 충당한다든지 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광고는 〈씨ᄋᆞᆯ의소리〉 취지에 동의하는 출판사가 내는 책뿐이었다. 그러니 광고비 많이 주는 책이 아니라, 잡지와 결이 맞는 내용의 책을 선정했다. 좋은 책이라면 광고료 없이 싣기도 했다.9)
정기독자 몇백 명의 후원으로 근근이 잡지를 만들었다. 1971년 11월호를 낼 때 정기독자는 약 4백 명. 그러니 다양한 필자를 섭외할 수도 없었다. 함석헌이 쓴 글이 주를 이루었다. 함석헌은 정기독자가 2천-3천 명 정도 된다면 걱정 없이 잡지사를 경영할 수 있겠다고 꿈을 꿨지만 이루어진 적이 없다.
지금 우리 집 한구석을 사무실로 하고 두 사람이 사무 보는데 생활비 충분히 주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하지요. (서형선에게 보낸 서신, 1971.11.21.)
편집자 박선균은 “수지타산을 맞추는 잡지가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특별한 도움의 손길 없이, 오롯이 구독자만으로는 운영하기가 불가능한 잡지였다. 편집과 영업을 위해 몸으로 뛴 씨ᄋᆞᆯ, 정기적으로 잡지가 오든 오지 않든 묵묵히 기다리며 때마다 십시일반 모금에 참여해준 독자들이 〈씨ᄋᆞᆯ의소리〉를 내는 원동력이었다.
이 동력이 추가 ‘자본’으로 옮겨가면 제소리를 낼 수 없었을 거다.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든지, 큰 기업체의 광고를 수주했다면 그들을 향한 비판의 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1976년, 시인 양성우의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가 실렸을 때, 정부는 철저한 검열 끝에 일곱 행을 삭제했다. 삭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 소리 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10)
함석헌이 쓴 글도 전체나 부분이 삭제되기 일쑤였다. 아래는 67호(1977년 9월)에 실린 내용 중 일부다(진한 글씨가 삭제된 부분).
사람이 서기만 하면 곧 지구 중심 위에 앉습니다. 어디서고 언제고 그렇습니다. 그것 말고 또 무슨 자리란 것이 있다면, 지배·피지배에서 붙이는 자리란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거짓,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만든 자리입니다.
당국은 지배-피지배 구도를 만든 존재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표현한 사실이 거슬렸다. 그래서 삭제했다. 삭제하고 보니 “사람이 만든 자리”가 되어버린다. 정치권력, 자본 권력, 지식 권력을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잡지에 정부와 기업이 지원할 리 만무. 어쩌면 가난이 제소리의 까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은 ‘맨씨ᄋᆞᆯ’을 강조했다. 모든 감투를 벗은 인간 그 자체로서의 존재가 씨ᄋᆞᆯ이라고 본 거다. 〈씨ᄋᆞᆯ의소리〉 역시 ‘맨’ 존재였다.
돈의 저널리즘
광고 없는 신문, 광고 없는 뉴스를 찾아보기 힘들다. 광고는 자본력을 표상한다. 돈이 있어야 광고를 싣는다. 언론은 광고의 뒷받침 없이 운영해나갈 힘을 얻지 못한다. 언론과 기업, 정부의 탄탄한 연합을 이루어주는 연료는 다름 아닌 돈. 이 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민중의 힘으로 만든 한 언론사마저 재정적 탈출구를 찾고자 기독교계 이단 종파 광고를 전면에 싣기도 한다. 한 기독교 대형 언론은 최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전광훈과 그 교회가 운영하는 미인가 신학교 광고를 싣기도 했다.
2021년 4월 8일 MBC 보도에 따르면 한국에서 생산된 신문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외국으로 팔려나가고 있단다. 태국 대형 가구점에서 포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신문지를 찾아 취재한 기사다. “왜 이렇게 태국 가구 매장에 한국 신문이 많을까” 질문했고, 가구점 측은 “코로나로 포장지 구하기가 힘들어져, 한국산 신문지를 사왔다”고 응답했다.
광고비는 신문 발행 부수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 많이 발행하는 신문일수록 광고비를 많이 받는다. 그러니 찍고 포장지로 팔지언정, 부수를 줄일 수 없는 현실인 거다. 최근 10년 사이 신문 구독률은 1/4로 급감했지만, 발행 부수는 그대로다. 엄밀히 말하면 발행 부수 조작. 이렇게까지 신문을 찍어내는 이유는 광고를 받는 것이 우선이지, 양질의 정보를 담는 것은 그다음이기 때문이다. 돈의 저널리즘이다.
최근에는 레거시 미디어로부터의 이탈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저널리즘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역시 ‘돈의 저널리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돈 안 되는 일은 무시하는 세상이라 그렇다.
함석헌의 저널리즘이 그립다. 돈이 되기는커녕, 폐간이라는 험악한 조치 앞에서도 제소리를 내는 언론인이 그립다. 그는 〈씨ᄋᆞᆯ의소리〉 제3호(복간호, 1971.8.) 서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씨ᄋᆞᆯ은 소리를 내야 씨ᄋᆞᆯ입니다. 속에 알이 드는 것은 싹이 트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죽고 못 하거든 여러분이 내십시오. 천천 만만으로 내야 합니다.
70세가 넘어 시작한 잡지 운동. 입을 막으면 편지를 쓰고, 돈이 없으면 늦게 내는 괴상한 잡지. 그러나 저널리즘만큼은 분명했다. 제소리, 씨ᄋᆞᆯ의 소리를 내는 잡지. 돈의 저널리즘은 이미 졌다. 씨ᄋᆞᆯ 저널리즘은 이미 이겼다.
1) 이 글은 《전집》, 《저작집》에 실리지 않았다. 함석헌의 외손자인 정현필과 (사)함석헌기념사업회가 수집해놓은 자료를 누리집 ‘바보새함석헌’(ssialsori.net)에 게재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함석헌 문집》(미간행)에 자료집 형태로 묶여있다. 《문집》 제15권, 307쪽.
2) ‘박선균, ‘씨ᄋᆞᆯ의소리 10년 발자취(상)’, 〈씨ᄋᆞᆯ의소리〉 통권 96호(1988.12.), 186쪽.
3) 1970년대에 검열에 의해 삭제된 글들은 《금지된 씨ᄋᆞᆯ의소리》(생각사, 1987)에 엮여 나왔다. 전체 삭제분과 일부 삭제분을 나눠서 편집했고, 일부 삭제분은 고딕체로 구분했다.
4) 박선균, 윗글, 187쪽.
5) ‘씨ᄋᆞᆯ에게 보내는 편지’ 제6신(1970.8.18.)
6) 1980년, 《함석헌 전집》 제작을 앞두고 〈씨ᄋᆞᆯ의소리〉는 함석헌과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에게 편지 원본을 수집했다. 많은 글이 모였고, 당시 전집에 넣지 못했던 원본(또는 복사본)을 (사)함석헌기념사업회가 이어받아, 정현필이 텍스트 파일로 정리해두었다. 1차 폐간 시기에 김숭경·김종성·김지헌·서정웅·서형선·임명수·임순만·진영상 등에게 전한 서신은 《문집》에 실려있다.
7) ‘씨ᄋᆞᆯ에게 보내는 편지’ 제3신(1970.8.8.)
8) 박선균, 윗글, 185쪽.
9) 양성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일부. 《금지된 씨ᄋᆞᆯ의소리》 172-173쪽에 삭제분이 실려있다.
10) ‘1971.5.25. 서신’, 《문집》 제15권, 335-336쪽.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