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이 듣는 나팔 소리

[419호 이한주의 책갈피]

2025-09-30     이한주

소설가 김유정은 경술국치에서 일제강점으로 이어지는 193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다. 〈봄봄〉·〈동백꽃〉 같은 해학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 시대의 비애를 담은 작품을 더 많이 썼다. 스물일곱이던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등단작 〈소낙비〉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다(《동백꽃-김유정 단편선》 수록). 이 소설은 거듭되는 흉작으로 빚을 지고 고향을 떠난 춘호 부부 이야기다. 그들은 야반도주해 어느 산골 마을에 정착했지만 떠돌이에게 소작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점점 더 궁핍해진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밑천이 필요한데 춘호는 이 밑천을 아내에게 요구한다.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졸라보았다. 그러나 위협하는 어조로,
“이봐, 그래 어떻게 돈 이 원만 안 해줄 테여?”
아내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갓 잡아온 새댁 모양으로 씻는 감자나 씻을 뿐 잠자코 있었다. 되나 안되나 좌우간 이렇다 말이 없으니 춘호는 울화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 그래도 아내는 나이 젊고 얼굴 똑똑하겠다, 돈 이 원쯤이야 어떻게라도 될 수 있겠기에 묻는 것인데 들은 체도 안 하니 괘씸한 듯싶었다. 그는 배를 튀기며 다시 한 번, “돈 좀 안 해줄 테에?”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42쪽)

춘호는 ‘이 원’만 있으면 노름판에 뛰어들어 큰돈을 벌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아내를 닦달한다. 춘호가 남자인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돈을 아내에게 요구하는 이유는 그녀가 ‘어떻게라도’ 돈을 구해올 수 있는, 나이 젊고 얼굴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다. 춘호 아내는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쇠돌 엄마를 찾아간다. 쇠돌 엄마는 동네 부자이자 호색한인 이 주사와 정을 통하는 사이로, 춘호 아내는 이 주사에게 겁탈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주사와 마주칠까 봐 쇠돌 엄마 집을 피해 다녔는데 돈을 빌릴 만한 사람이 쇠돌 엄마밖에 없다. 큰맘 먹고 쇠돌 엄마를 만나러 갔더니 쇠돌 엄마는 없고 하필 소낙비가 내려 온몸이 젖는다. 이때 이 주사가 이 집에 찾아오고, 춘호 아내를 본 그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탐한다. 춘호 아내는 이 주사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돈 이 원을 약속받는다. 아내가 집에 돌아오자, 춘호는 늦게 돌아왔다며 아내를 때리려다 내일 돈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돌변해서 다정하게 군다. 그리고 다음 날, 춘호는 정성스럽게 아내를 단장시키며 외출을 돕는다.

남편은 아내 손에서 얼레빗을 쑥 뽑아들고는 시원스레 쭉쭉 내려빗긴다. 다 빗긴 뒤, 옆에 놓인 밥 사발의 물을 손바닥에 연신 칠해가며 머리에다 번지르하게 발라놓았다. 그래놓고 위서부터 머리칼을 재워가며 맵시 있게 쪽을 딱 찔러주더니 오늘 아침에 한사코 공을 들여 삼아놓았던 짚신을 아내의 발에 신기고 주먹으로 자근자근 골을 내주었다. “인제 가봐!” 하다가, “바루 곧 와, 응?” 하고 남편은 그 이 원을 고히 받고자 손색 없도록, 실패 없도록 아내를 모양내 보냈다. (58쪽)

조선의 인민이 일제의 수탈에 시달렸던 1930년대 ‘들병이’라 불리는 여성들이 있었다. 춘호 아내처럼 남편에게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성매매하는 유부녀들이다. 청년 김유정은 들병이들과 친분이 있었고 〈소낙비〉뿐 아니라 〈총각과 맹꽁이〉·〈솥〉·〈안해〉·〈산골 나그네〉 등 여러 작품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들병이 아내와 무능한 남편이 나오는 김유정의 작품을 읽으면 떠오르는 부부가 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과 사라다. 그들 역시 고향을 떠난 떠돌이였고, 극심한 흉년으로 생존을 위협받았다. 이집트로 들어가야 먹고살 길이 열리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복을 주기로 약속한 여호와를 믿기보다 자기 아내를 생존의 도구로 삼는다. 아내를 누이라 속여 이집트 남자들의 호의를 얻을 계획을 세우고 심히 아리따운 아내의 미모를 전시해 소문이 나게 한다. 사라는 춘호 아내처럼 힘없는 떠돌이 남자가 가진 마지막 소유물이었고 무능한 남편의 비열한 계획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사라가 파라오에게 가던 날 아침을 상상해본다. 아브라함도 춘호처럼 파라오 후궁으로 가는 사라를 제 손으로 정성스럽게 단장시켜 보냈을까? 식민지 조선의 들병이 남편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내세우는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유정이 조카 김영수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 목록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열린책들)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등단작이다. 이 소설은 서간체소설로 40대 후반 하급 공무원 마카르 제부스킨과 20대 초반 고아 처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주고받은 편지를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주인공 바르바라는 가난한 형편이지만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고,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마카르의 경제 상황을 염려할 만큼 사려가 깊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알 뿐 아니라 마카르에게 푸시킨과 고골의 작품을 추천할 만큼 지적 수준이 높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가난이 남긴 깊은 상처가 있다. 열네 살 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걱정과 상심 속에 갑자기 돌아가셨고, 친척 집에 얹혀살며 설움을 당했고, 첫사랑이 가난으로 고생하다 죽는 걸 보았고, 얼마 뒤 어머니마저 병으로 잃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가난이었고, 그녀의 이웃들도 가난 때문에 비참하게 산다. 바르바라는 자신을 돕고자 마카르가 빚을 졌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쓴다.

오 나의 벗이여! 불행은 전염병과 같은 겁니다. 불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전염되지 않도록 서로서로 피해야 합니다. (134쪽)

바르바라에게 가난과 불행은 돌보며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 피해야 하는 전염병이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더 불행해진다는 것이 그녀가 살면서 깨달은 진실이고, 거만하고 폭력적인 지주 비코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청혼을 받아들인 이유다.

벗이여, 그 사람에 시집가겠어요. 저는 그 사람의 청혼에 동의해야만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의 수치를 씻어주고, 제게 명예를 되돌려주고, 미래의 빈곤과 결핍과 불행에서 절 구해줄 수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사람뿐입니다. 제가 다른 무슨 길을 선택할 수 있겠어요? (225쪽)

가난한 사람이 다른 가난한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현실에서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은 바르바라가 가난이라는 전염병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아름답고 젊기 때문에 주어진 기회였다. 다른 무슨 길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가난한 마카르는 ‘당신을 보러 가겠다’는 말 말고는 마땅한 답을 주지 못하고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처럼 그녀의 결혼식을 대신 준비해준다.

20대의 김유정과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의 등단작에서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또래의 젊은 여성을 등장시켰다. 춘호 아내와 바르바라에게 가난은 개인의 도덕성이나 의지로는 벗어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 사회는 변했고 가난이 전염병이 되지 않도록 돕는 복지 제도에도 큰 발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가난은 어떤 것일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팔복을 설교했던 날, 교인 한 분이 〈복 있는 자들〉이라는 소설을 링크해 보내왔다. 우리 시대의 가난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소설은 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길란(필명)이라는 젊은 작가의 등단작이다(《2025년 신춘문예 당선소설집》(한국소설가협회) 수록).1)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충분한 가난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엄마는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난해서. (448쪽)

20대 미혼 청년인 희재와 아직 오십이 넘지 않은 엄마는 임대주택에 당첨되어 새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젊고 건강한 희재가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기로 ‘선택’한 덕분이다. 한동안 회사를 열심히 다녔던 희재는 평생 아등바등 일하며 돈을 모아봤자 영원히 아파트를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월 소득 97만 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경제활동을 하니 수급 자격이 인정되었고, 정부는 이렇게 가난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임대주택 청약 자격을 주고, 평생교육바우처와 문화지원금도 지급한다. 성경을 열심히 필사하는 엄마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유다.

주거급여 수급자가 되니 오히려 이 전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나니. 엄마는 자주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았다. 어차피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주 가난한 쪽이 좋았다. (449쪽)

희재는 정부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복을 누리며 20년을 이렇게 버티고, 그 후에는 65세가 넘는 엄마 명의로 고령자 대상 임대주택을 신청해서 옮겨 살 계획이다. 그러나 누군가 희재 모녀를 부정 수급자로 신고해 아파트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고, 엄마에게 암이 생겨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비 150만 원이 없다. 소설 마지막에서 희재는 가난한 사람의 복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내가 깨끗하지 못한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아? 집을 갖는 게 이렇게까지 힘든 게. 사람이 이렇게 더러워져야만 한다는 게. “내가 도망칠 줄 알고?”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고 깨끗한 아파트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들러붙을 거야. 더럽고 치졸하고 비굴하게 버텨줄게. 너희들이 끔찍하게 보기 싫어하는 오물이 되고 소음이 되어줄게. (463-464쪽)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하려는 것이 복지 제도의 허점이나, 일하지 않고 세금만 축내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아닌 것 같다. 가난하지 않기 위해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편법으로 유지되는 삶을 불안해하면서도 미래를 포기하고 가난을 유지한다. 정직하게 일해서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물질적인 욕망을 부추기면서도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지 않고, 희망을 주기보다 가난을 선별하고 관리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이 시대의 가난이다.

 

김유정, 도스토옙스키, 길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젊은 작가들이 첫 작품을 통해 그들 시대의 가난을 그려냈다. 식민지 조선의 농촌, 제정러시아 시대의 상트페테부르크, 현재의 서울. 그들이 보는 가난의 풍경은 달라도 가난이 주는 공통점이 있다. 돈이 없으면 비참한 삶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다. 이 절망감에 춘호 아내는 자기를 팔고, 바르바라는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하고, 희재는 부정수급자의 삶을 산다. 변하지 않는 세상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빼앗아간다.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포기한 이들에게 성경은 희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희년은 가난한 사람을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거룩한 상상이다.

하나님은 남편을 위해 팔려간 사라를 구출해 한 민족을 이루시고, 그 민족을 통해 희년을 선포하게 하셨다. 50년마다 선포되는 희년은 아무 변화 없는 사회에 대한 거부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고, 정직하게 살아도 인생에 한 번은 기회가 온다는 응원이다. 자기를 팔지 않을 만큼 자존심을 지키고, 사랑을 따라 선택하며, 성실하게 노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라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온다는 소식을 ‘나팔을 불어,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레 25:9)이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한주
대전 주사랑교회 담임목사. 중앙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를 했다. 책과 책 읽는 사람과 책 읽고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