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세계에 대한 부채감으로 ― 걷는교회 손주환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팀장)
[420호 현장과 사람]
- 목사님 안녕하세요. 인사 부탁드립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일하면서, 걷는교회를 섬기고 있는 손주환입니다. 〈복음과상황〉(이하 ‘복상’)의 오랜 구독자이기도 한데요. 예전 박총 편집장님 계실 때 구독 신청서를 강제로(?) 건네받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이어졌네요.(웃음) 저희 교회가 복상 후원교회이기도 하고, 복상 모임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요. 복상이 정말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 무엇인가요?
복상으로 모임을 하다 보면 사회 이슈나 교계 이슈에 큰 관심이 없는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복상의 논조에 따라가더라고요. 때때로 생각이 다른 지점도 나타나지만, 그래도 복상 덕분에 모임에서 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 사실 그런 진지한 이야기를 일상에서 하기가 어렵기도 하잖아요. 복상이 좋은 매개체가 되었군요.
네. 단행본은 독서에 익숙하지 않으면 읽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는데, 복상은 월간지라서 주제와 장별로 호흡이 길지 않잖아요. 각자 관심사에 따라 읽고 싶은 부분을 선택해서 읽을 수 있고, 복상의 책 소개 코너에서도 도움받고 있습니다.
- 지금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이하 ‘느헤미야’) 사무처에서 일하고 계시죠? 일하신 지 얼마나 되셨고, 주로 어떤 일을 담당하고 계시나요?
3년 조금 넘었습니다. 주로 행정과 느헤미야 교회협의회(이하 ‘느교협’) 관련 일을 담당합니다. 요즘은 느헤미야 유튜브 콘텐츠 기획도 하고 있네요. 행정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사무처의 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느헤미야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신학생과 부교역자 시절 느헤미야는 저에게 주유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제가 구약을 전공했는데, 제 지도교수님이신 차준희 교수님께 정말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목회 현장은 제가 배운 신학과 큰 괴리가 있었어요. 너무 보수적이고 교조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민이 많았는데, 느헤미야 특강이나 강의를 들으면 목회 현장에서 적용할 만한 포인트들이 있더라고요.
- 걷는교회도 느교협에 가입하셨더라고요.
2020년에 걷는교회를 시작하면서 함께하는 청년들, 성도님들과 상의를 했어요. 기존 교단보다는 독립교단 쪽으로 방향이 잡혀갔죠. 이전에 느헤미야 교수님들 강의를 여러 번 함께 들었던 분들이라 만장일치로 느교협에 가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목사님 개인에 대해서 궁금한 점을 좀 더 여쭤보고 싶어요. 기독교 신앙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셨나요?
아버지께서는 선임 장로님이셨고 어머니께서는 권사님이면서 새가족팀장이기도 하셨어요.
- 교회 좀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새가족팀장 아무에게나 맡기는 게 아니거든요.
맞아요. 그야말로 아주 표준적인 교회를 모범적으로 다니는 가정이었어요. 저도 교회 안에서 초등학교 때까지는 모범생으로 자라다가 사춘기가 좀 세게 왔어요.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아예 등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련회가 있으면 꼭 따라갔고, 거기서 은혜받고 회개도 하곤 했죠. 그 효과가 오래가진 못했지만요.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도 보내다 군대에 다녀왔어요. 군대에서 모은 월급이 좀 있어서 전국 일주를 해보고 싶어 여행을 떠났는데, 해안선을 따라 쭉 다녔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문득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 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시간이 진짜 행복했었다는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다시 교회를 열심히 다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니던 교회 청년부에 갔더니 새가족 카드를 주더라고요(웃음).
- 아니, 모교회인데.(웃음)
저 나름 그 교회 창립 멤버였어요. 아무튼 다시 청년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한 편이긴 하거든요. 교회에서 시키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진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기도회, 성경공부, 수련회 등 아무것도 안 따지고 다 했어요. 그러면서 다시 신앙이 조금씩 생겨가고 성경도 재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 약간 가볍게 이야기해 주셨지만, 나름 그때는 절박한 심정에서 하셨던 것 아니었을까요?
맞아요. 그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평소에 너무 개인적인 신앙 표현은 자제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신앙고백 차원에서 당시 방황하던 저를 하나님께서 찾아오셨다고 믿습니다.
- 어떻게 인생의 진로를 목회자로 정하게 되셨나요?
열심히 청년부 활동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교회 안에서 신학을 해보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어요. 사실 따로 생각하고 있던 진로가 있었어요. 스포츠 마케팅 쪽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아버지와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할 일본의 학교와 관련 분야의 회사도 소개받았거든요. 계속 기도하면서 신대원을 가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신대원을 가겠다고 하니 부모님도 반대하셨어요.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결국에는 신대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말 열정적이고 순수한 신앙으로 충만했던 것 같아요.
- 앞서 이야기하셨듯, 신대원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고민이 많아지셨던 것 같네요.
맞습니다. 구약 특히 예언서를 좋아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학교에서 뭔가 좀 가르치다 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고등학교 시절 저랑 함께 놀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회개(?)하고 다른 신대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예수원에 가보겠냐고 하더군요. 저는 당시 예수원에 대해 전혀 몰랐거든요. 그때 함께 가서 처음으로 희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강의가 저의 가려웠던 곳을 확 긁어주었던 거죠. 그러고 나서 성토모(‘희년함께’ 전신인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강의도 듣고, 남기업 소장님과 김근주 교수님의 강의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사회적 회심’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희년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예언서를 읽으니까 새로운 관점이 제 안에 열린 거죠. 그때부터 청어람ARMC나 느헤미야의 강의들도 찾아다니며 듣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회심이 일어나면서 가장 크게 든 감정은 ‘부채감’이었어요. IMF 이후에 좀 꺾이긴 했지만 그전까지 저는 진짜 돈 걱정 거의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았거든요. 제 친구들도 다 강남에 사는 친구들이었고요. 그랬던 제가 군대에서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요. 군 생활 동기 중 경남 하동에서 살던 친구가 휴가만 갔다 오면 새까맣게 타서 반(半)시체가 되어 복귀하는 거예요. 저는 휴가 가면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다가 반질거려서 돌아오니까 이해가 안 됐죠. 그래서 너는 휴가 가서 뭘 하길래 그렇게 타서 돌아오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갑자기 저에게 쌍욕을 하더라고요. 서울 놈이 뭘 아냐고. 가서 어떤 일을 하고 오는지 막 쏟아붓는데, 머리를 한 방 세게 얻어맞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모르는 세계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순진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거죠.
그 이후로 제게 어떤 ‘부채감’이 계속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이런 부채감을 가진 저에게 희년이 큰 열쇠가 되어 주었습니다. 모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처음 다른 교회로 가게 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가난한 지역에서 사역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당시 결혼해서 독립을 하게 되었는데요. 처음 강남 지역을 벗어나 주거를 마련하고, 달동네에 있는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재건축한 지역과 달동네가 마주하던 곳이었어요. 원래는 청소년부에 잘사는 집의 모범생 같은 친구들만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좀 놀던(?) 친구들이 오게 되었어요. 저도 왕년에 놀아본 입장이다 보니 반갑더라고요.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비슷한 친구들이 확 많아졌어요. 그렇게 부대끼며 지내보니 관념적으로만 머물던 신앙이 점차 실존적으로 바뀌어갔던 것 같아요. 이후 제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장애 인권에도 눈뜨게 되었고, 난민, 이주민 노동자, 성소수자로 약자에 대한 감수성과 신학이 확장됐습니다.
- 걷는교회를 개척하기까지의 목회 여정은 어떠셨나요?
걷는교회를 시작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당시 경험을 쓴 글이 복상에 실리기도 했어요(본지 2021년 5월호). 코로나가 끝나면 성도님들이 돌아오시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절반 정도는 못 돌아오셨습니다. 여러 현실적 이유로 떠날 수밖에 없는 성도님들과 이별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렇지만 성도님들과 함께했던 활동 중 잊지 못할 일도 많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초반에 중국인들을 향한 혐오가 심했는데, 교회는 다르게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마침 저희 교회에 중국에서 유학했던 성도님이 계셔서, 그분을 통해 대림동에 있는 중국동포교회를 찾아 손소독제와 물품을 보내 드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하고 있음을 전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어느 정도 보수적인 부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중 하나가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여서 생기는 끈끈한 연대감, 서로 함께 울고 웃어주는 것이 목회의 보람이라면 보람이겠죠.
- 작년 10·27 집회와 12·3 내란을 거치며 일부 개신교 세력이 극우와 더 밀착하면서 한국교회는 사회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난겨울에 함께 기도하던 광장에서 목사님께서 하셨던 설교도 가끔 생각이 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요즘 어떤 고민과 생각을 가장 많이 하시나요?
느헤미야는 교계에선 비판을 많이 받는 반면, 사회에서는 비교적 칭찬받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는 것 같아요. 배덕만 교수님 경우도 〈CBS〉나 〈오늘의 신학공부〉 같은 기독교 매체에서 발언하시면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는데, 〈삼프로TV〉나 〈손석희의 질문들〉 같은 곳에서는 칭찬하는 댓글이 엄청 많거든요. 느헤미야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성서한국을 비롯해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는 곳에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이겠죠. 저희 교수님들과 대화하다 보면, 반농담으로 ‘이쯤 되면 탈개신교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곤 합니다. 보수·극우 세력에 자본과 사람이 더 몰려있으니 단순한 화력 싸움으로는 쉽지 않겠죠. 그럼에도 계속 목소리를 내고 이 운동을 해나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탄핵 때도 개신교 전체가 비난받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죠. 그 목소리를 지속해서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9월에 열렸던 한국교회와 공공성 포럼은 작은 규모였지만 중요한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언론사에서 자료집과 사진을 요청하고 연락해왔어요. 기독교 언론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요. 극우 개신교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도하고 싶은데 잘 보이지 않았던 측면도 있었던 거죠. 올해가 가기 전에 포럼이 또 열릴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기독 지성 운동이나 여러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복상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복상을 정말 애정하거든요. 복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많이 배웠고, 그런 점에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복상을 꾸준히 읽으시는 분들도 저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실 것 같아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죠. 복상 자체도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발행되고 있고, 새로운 어젠다와 담론을 발굴해내어 교계에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복상과 뜻을 함께하는 구독자분들이 서로 격려하고 도우면서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꽤 보수적인데도 복상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런 분들께도 잘 닿을 수 있는 좋은 잡지로 역할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활동가분들을 만나 인터뷰하다 보면 아무래도 속한 단체나 교회 중심으로 대화를 풀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면은 한정적이다 보니 그들의 주요 활동을 분명하게 다루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긴 하니까요. 그래서 인터뷰이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할 때가 아쉽습니다.
인터뷰 후 손주환 목사님, 그리고 함께 사무처에서 일하시는 이찬영 팀장님과 설렁탕 한 그릇을 나누고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인터뷰를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수련회 마지막 날 저녁 집회를 마친 후 숙소에서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진솔한 ‘사회적 회심기’가 참 따듯하게 다가왔습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날카롭고 정밀한 담론과 연구가 여전히 절실하겠지만, 각자 처음 경험했던 ‘사회적 회심’을 다시 꺼내어 함께 이야기해보며 서로를 격려해주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행 송지훈 성서한국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