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호랑이를 타는 사람”
[420호 봄봄]
살인하지 말라. 모세가 받았다는 십계명 여섯 번째 계명이다. 하ᄂᆞ님이 친히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몸에 이미 새겨져있는 계명이다. 사람들 사는 곳에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이 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살인은 꺼려지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쟁도, 시비를 가리는 다툼도, 아무리 선한 싸움도, 살인에 이르도록 치열해선 안 된다. 안타깝게도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편들다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 들통나자 광야로 도망쳤다. 명분 있고 우발적이었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적용되던 시절에 살려면 어딘가로 도망쳐야 했겠다. 이런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과 광야 여정을 시작할 때 하ᄂᆞ님께서 살인 금지를 명령하신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정당하지 않다고, 히브리 사람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하ᄂᆞ님의 백성으로서 살인을 저질러선 안 된다고 명토 박아 말씀하신 것이다.
법전을 들춰보지 않아도, 성문법을 채택한 모든 나라의 법전에 살인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겨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제노사이드가 고도로 문명화된 세상에서도 여전하다. 제노사이드는 이유가 없다. 그저 살해자가 피살자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때, 제노사이드는 일어난다. 인종이 다르거나 종교가 다르거나 언어가 다른 것이 죽임 당할 이유가 될 순 없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이유 없이 제노사이드를 저지른다.
대한민국 군대는 1965년 10월 베트남에 상륙했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편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전선이 따로 없는 전쟁이었다. 베트콩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베트남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오인하거나 의심해 죽이기도 했다. 마을 전체를 몰살시키기도 했다. 빈선현 빈호아사 마을에선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 사이에 430명을 죽였다. 그중 268명이 비무장 여성이었다, 임산부 7명을 죽였다. 2명을 강간 후 죽였다. 어린이 108명을 죽였다. 살아남은 베트남 사람들이 대한민국 군대의 잔혹함을 기억하기 위해 ‘증오비’(BIA CAM THU)를 세웠다. ‘증오비’는 베트남 3곳에 남아있다고 한다. 쭈옹딘에 세워진 증오비는 민간인이 몰살당한 구덩이 바로 옆에 자리한다. 비석엔 이렇게 새겨져있다.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1) 희생자 명단만 적혀있는 위령비는 60여 곳에 세워졌다. 퐁니·퐁넛에선 70여 명, 하미 마을에선 135명이 죽임당했다고 한다. 전쟁 동안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한민국 군대에 희생된 민간인이 5천여 명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전두환은 대령으로, 노태우와 정호용은 중령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5·18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베트남에선 연대장과 대대장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을 직접 경험했다.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은 베트남전쟁 당시 어떤 명령을 내렸을까. 실전을 치르는 장병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을 전두환 대령, 노태우 중령, 정호용 중령은 베트남에서 어떤 경험을 했을까.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이 대령과 중령으로서 베트남에서 치렀던 일들이 1980년 5·18 광주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을까.
5·18 직후 미 국방정보국(DIA)은 계엄군의 ‘잘못된 과잉 대응’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현군부의 실세인 전두환·노태우·정호용이 한국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으며,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라고 지칭’하고,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광주 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고 보고했다. 베트남의 미라이 마을은 미군이 양민을 대량 학살한 곳이다.2)
베트남전 당시, 전두환 대령은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이었고, 노태우 중령은 맹호부대 1연대 3대대장이었고, 정호용 중령은 제9보병사단 대대장이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병사들을 지휘하며 북베트남 군대와 전투하듯, 위장한 베트콩을 제압하듯, 12·12를 일으킨 주역들은 광주시민을 학살했다. 연대장과 대대장으로서 외국 군대와의 전쟁을 경험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에게 5·18 당시 연대장들과 대대장들은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전두환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혀를 두 가닥으로 놀리지만, 실제 실탄은 지급됐고 발포됐다. 전두환이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5·18 광주에 있었던 대대장들이 현장에서 발포 명령을 내렸고 시민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두 가닥 혀를 가진 전두환뿐 아니라, 현장을 지휘했던 연대장과 대대장도 살인자다. 상부의 발포 명령이 있다 해도, 연대장들과 대대장들은 현장을 지휘하는 전문성을 갖춘 군인으로서, 간첩도, 폭도도 아닌, 살기 위해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해야 했다. 적이 아닌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은 ‘합법적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군 임무의 본령은 국경을 지키고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기에, 고등 훈련을 받은 장교라면 전문성을 발휘해 부당한 상부 명령에 불복종해야 한다.
5·18 광주 일원에서 사병들을 지휘한 장교는 대대장 22명, 연대장 3명이었다. 그 위에, 심우식 7공수여단장, 최웅 11공수여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박준병 20사단장,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진종채 2군사령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전두환 이하 사령관·여단장·사단장이 5·18 광주로 들어간 군대에게 내린 명령은 모두 불법이었다. 교육과 훈련을 받아 전문성을 갖춘 장교라면 이성과 양심을 따라 명령의 합법성을 분별할 수 있기에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해야 했다. 대령들과 중령들은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인 학생들이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령들과 중령들은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령들과 중령들은 무서워 이불을 두른 채 방에 숨어있는 소시민들이 간첩에 포섭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령관이 명령을 내렸다 해도, 현장을 파악한 대령들과 중령들이 거부할 수 있었다. 군은 합법적 명령에만 복종해야 한다. 연대장들과 대대장들은 발포 명령에 거부할 수 있었고,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지시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합법적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9월 30일 미국 오리건주 의회 청문회에서 앨런 그론월드 준장이 한 말이다. 대통령과 주지사의 명령을 따르는 군인의 복무에 충실하되 전문성(the professionalism)을 가진 군인으로서 합법적 명령(lawful order) 여부를 분별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군인은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단, 합법적 명령이어야 한다. 합법적 명령 여부를 분별할 수 있는 이성과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있고, 더군다나 고등 훈련을 받은 장교라면 전문성까지 갖췄기에, 대통령의 명령이라도 불법이라면 수행하지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역할에 충실하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합법적 명령만 수행해야, 군인이다.
2025년 12월 3일 밤, 수도방위사령부 1경비단장이었던 조성현 대령은 서강대교를 넘지 않았다. 서울 시내로 군이 투입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대가 국회에 들어가서 작전을 펼치려면, 침투하는 적을 방어하거나, 침투한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당시 여의도에 적군이 활동하는 징후가 없었고, 아무 소요도 없었기에, 조성현 대령은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성과 양심, 그리고 고등 훈련을 받은 장교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합법적 명령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역시, 같은 날 밤, 비상계엄 선포 20분 후, 계엄군은 수도방위사령부에 서울시 상공으로 헬기 진입을 요청했다. 김문상 대령은 사전에 허가되지 않았고, 목적을 밝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이후 세 차례나 진입 허가를 요청받았지만 불허했다. 합동참모본부도 허가 여부를 뚜렷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 상황이었고, 직관적으로 국회의사당으로 진입하려는 헬기임을 알아챘을 것이다. 최초 헬기 진입 요청 후 55분이 지난 후, 계엄사령부의 승인 허가를 받고서야 헬기는 국회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요건을 갖추지 않은 군사행동이라면 계엄하에서도 막아야 한다. 군은 절차적으로 ‘합법적 명령’을 따라야 한다. 절차상 하자가 있다면 합법적 명령이 아니기에 김문상 대령은 고등 훈련을 받은 장교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폭력을 지연시켰다.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 기관이다. 폭력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야 할 때, 국가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국가가 지닌 폭력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어떤 잔혹한 폭력보다 강력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고, 반드시 합법적 절차와 공적 명분을 확보해야 생명을 지킬 수 있다. 국가 폭력을 다루는 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국가는 어떤 폭력보다 잔혹한 학살의 주체가 된다.
구약성서 출애굽기는 이런 오래된 국가 폭력을 고발하고,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집트 파라오가 노예 수를 조절하기 위해 남자 영아 학살을 명령했다. 왕의 명령이 곧 법이던 때라, 그 명령 자체를 불법이라 규정하긴 어렵겠지만, 명령을 받은 이들 중 그 부당함을 감지하고 저항한 이들이 존재했다.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출 1:15-21, 새번역)
파라오가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히브리 사람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파라오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다(출 1:17). 파라오의 부당한 명령에 복명하지 않았기에, 일시적이나마 파라오가 살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산파들의 불복종은 파라오를 위한 참복종이기도 하다. 국가 권력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것은 그저 복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진짜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언젠가 설교 예화로 들은 얘기다. 어느 수도원에서 수행자들에게 배추 머리를 땅속으로 심으라고 명령하면, 명령받은 대로 배추 뿌리가 하늘로 향하게 하고 배추 머리를 땅속으로 심는 게 순종이라고 가르쳤단다. 거슬리는 이야기다. 잘못된 명령이 분명하다면 배추를 심는 이는 이성과 양심, 전문성을 따라 배추 뿌리를 땅속으로 심어야 배추도 살고 사람도 산다. 무조건 복명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 모든 공적 명령의 취지다. 명령에 복종하되, 그의 말에 기계적으로 복명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까라면 까’는 게 명령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까야 하는 것, 까도 되는 걸 까는 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라고 명령받는다면,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 명령을 진실로 따르는 것이다. 히브리 산파들이 파라오 명령에 불복종할 수 있었던 건 파라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절대 권력자에게 짓눌려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어떤 권력이나 시스템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이겠다. 다비드 칼리는 이를 ‘호랑이를 타는 것’이라 표현한다. 그가 쓴 《호랑이를 타다》를 읽어본다.
또다시 목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선택하시오, 누군가를 죽일지, 죽임을 당할지.”
몹시 곤란한 상황입니다.
죽임을 당하는 건 끔찍합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더 끔찍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이는 걸 선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는 걸 선택합니다.
이들은 결국 죽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편, 언제나 호랑이를 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손이 피로 물든 사람이 묻습니다.
“왜 그는 우리처럼 선택하지 않나요?”
“그는 이미 자유를 선택했지요.” 목소리가 대답합니다.
“아, 그럴 수도 있었나요?”
“물론이지요.”
“당신도 할 수 있어요!”3)
대한민국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군인은 항명이라는 무거운 죄를 범하게 된다. 부당하고 불법적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법 조항이 따로 없어, 아무리 고등 훈련을 받은 장교라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항변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법엔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나치를 경험한 독일은 ‘독일 군인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서 상관의 명령이 정당한 경우에만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것(상관의 명령)이 정당하다는 한도 내에서.”4) 독일 법률은 불법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보장한다.
항명이 무조건 죄가 되던 그때에도, 5·18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 중에 부당한 명령을 차마 수행할 수 없어 시민들이 아니라 허공을 향해 총을 쏘는 군인이 있었다. 시민군을 죽이고, 시체를 모아 허리 반동으로 박자를 맞추며 군가를 부를 때,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저항하는 계엄군도 있었다. 죽임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고등 훈련을 받지 않아 전문성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법률로 보장되지 않아도, 태어날 때 이미 몸에 새겨진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뜻을 수행하고, 신의 뜻이 굴절될 때 괴로워하며 슬픈 사람들이 있다.
“그는 이미 자유를 선택했”다. “당신도 할 수 있”다.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