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사회의 자장에서 종교의 한계와 가능성을 새로 탐색하는 철학자 ― 헨트 드 프리스 뉴욕대 석좌교수

[420호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시즌3]

2025-11-01     김동규

헨트 드 프리스(Hent de Vries, 1958-)는 현재 뉴욕 대학교 폴렛 고다드 석좌교수직에 있으면서 종교학·독일어학·비교문학 교수 및 철학과 협력교수로 일하는 네덜란드 태생 철학자다. 레이던 대학교에서 유대학 및 헬레니즘 사상(신학), 공공재정 및 정치경제학(법학)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에서 《고요한 신학: 아도르노와 레비나스의 사유 형식의 현재성에 대하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것이 확장·개정되어 영어판 《최소신학: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에마뉘엘 레비나스에서 세속 이성 비판》으로 번역된 이후 아도르노, 레비나스, 비판이론과 세속성 안에서 신학적인 것의 의미에 관심을 둔 이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철학과 교수, 암스테르담 대학교 철학과 종교철학 전공 교수 등을 역임한 후 존스 홉킨스대 인문학연구소 교수 및 소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2017-2018년 파리 가톨릭대 에티엔 질송 형이상학 석좌교수를 맡았으며, 지금도 종교학·종교철학·정치신학에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다. 《철학과 종교로의 전회》·《종교와 폭력: 칸트부터 데리다까지》·《일상의 중심에 있는 기적》 등을 썼다. 본 인터뷰는 학자로서의 삶과 종교와 종교적 폭력, 기적 등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통찰을 담고자 애썼으며, 1·2부로 나뉘어 게재된다. 인터뷰는 7월 24일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다. 서강대 철학연구소 강지하 선생이 함께하며 큰 도움을 주었다.

헨트 드 프리스 뉴욕대 석좌교수. 사진: 인터뷰이 제공

- 한국 독자들에게 교수님을 처음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아마 많은 분이 선생님의 지적 여정, 학문적 발전, 신앙 형성 과정에 먼저 관심을 둘 것 같습니다.

저는 네덜란드 북서부, 노르트홀란트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네덜란드 중부의 네이커르크(Nijkerk) 마을 출신인데, 이 이름은 ‘새로운 교회’(Nije kercke)에서 유래했어요. 13세기에 인근 푸텐(Putten) 마을 예배당이 불탄 후 세워진 자매 교회에서 비롯된 이름이에요. 네덜란드 ‘성서 벨트’ 중심부에 있었죠.

부모님은 네덜란드 개신교 전통 안에서도 서로 다른 극단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쪽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공식’ 교회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이면서 약간 신비주의적인 흐름에 속했어요. 1795년에 국교 지위를 잃었어도 여전히 사회 전반, 심지어 왕실과도 연결된 큰 교단이었습니다. 어머니 쪽은 신학적·도덕적으로 훨씬 엄격한 개혁교회 계열로, 기존 교회의 자유주의적 경향에 반발해 분리된 교단이었죠. 당시 이 공동체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유산을 강력히 지지했는데, 미국으로 치면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의 칼빈 대학교와 비슷한 분위기였어요. 한쪽은 경건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다른 쪽은 매우 교리적이고 엄격했다고 할 수 있죠. 양쪽 모두 정통파였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사회적 계층을 대표했습니다. 부모님은 조금 답답하다 느끼셨던 것 같아요. 북서부로 이주하셨고, 자신들이 겪었던 교육적 압박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저와 형제들은 자유롭게 관심사를 탐구할 수 있었죠.

저는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마을에 그리스도교 학교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개신교 교회 공동체에 속했죠. 이 교단은 꽤 자유주의적인 성향이었고, 마을은 대부분 가톨릭과 사회민주주의에 우호적인 분위기였어요. 부모님은 소수파였지만, 훨씬 개방적인 개신교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자란 마을에서는 나중에 자유주의적 교회와 엄격한 교회가 합쳐졌습니다. 그때 온 목사님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영감을 주셨어요. 저는 교회 청소년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분들이 진행한 주일학교가 아주 독창적이었지요. 미국 시민권 운동 이야기도 하고, 카프카나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해서도 토론했죠. 전통적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거의 다루지 않았어요. 신학적이기보다는 영적이고 사회적으로 폭넓은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그분들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목사님들이 던진 질문들에 더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처음엔 의학을 생각했지만 결국 신학을 선택했습니다. 신학은 언어·역사·분석·실천 등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 학제적 학문이었기에, 전공을 확정하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저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레이던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배우지 않아 첫 2년은 라틴어·그리스어, 약간의 히브리어만 공부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신학을 탐구했죠. 제가 신학을 선택하게 한 목사님들은 설교자이자 신학자였고, 성서 주석과 신학을 하면서도 폭넓은 문화적 감각을 지니고 계셨어요. 대학 시절 ‘학생 에클레시아’ 모임에도 참여했는데, 제가 자란 교회보다 훨씬 자유롭고 진보적인 분위기였습니다. 개신교 학생뿐 아니라 가톨릭·동방정교회, 유대인 학생들도 있었죠.

- 선생님은 신학을 목회적 관심사보다 인문학적으로 공부하신 것으로 압니다.

의학을 공부하기를 단념한다고 했을 때, 폭넓은 문화적·정치적 관심을 가진 인문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이 학문이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덜란드는 1870년대에 법이 제정되어, 모든 국립대학(당시엔 사립대가 없었습니다)에서 신학뿐 아니라 종교 관련 학문을 함께 공부하도록 했죠. 이 법을 ‘듀플렉스 오르도’(duplex ordo[이중 질서])라 불렀는데, 기본적으로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5-6년 동안 종교학을 공부한 뒤, 두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레이던대에서는 첫 번째 과정이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철저한 언어학·역사학·심리학·사회학적 기준을 따랐죠. 그 이후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목회자가 아닌 학자가 되어 박사과정을 밟는 길을 택해 종교철학으로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듀플렉스 오르도의 종교학과 신학 두 과정의 교수들은 모두 국가에서 급여를 받았지만, 신학 과정 교수 임명은 각 교단 위원회가 맡았습니다. 저는 첫 책 《고요한 신학》에서 이 문제를 다뤘어요. 특히 ‘안티프로레고메나’(Anti-prolegomena)라는 장에서, ‘신’을 문화적 대상으로서 연구하는 방법론적 무신론과 신의 존재를 괄호 치지 않고 연구하는 신학적 접근 사이에 놓인 철학적·실천적 어려움을 분석했죠.

방법론적 무신론을 채택한다는 건, 신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현상학적 괄호 침 안에서 ‘문화적 대상’으로서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반면, 신학은 그런 괄호 침 없이 신을 연구하죠. 하지만 성서신학이나 교의신학이 과연 ‘학문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듀플렉스 오르도는 일종의 ‘제도적 이중성’이었어요. 박사논문을 마쳤을 때, 저는 신학자들에겐 철학자처럼 보였고, 철학자들에겐 신학자처럼 보였습니다. 목회자가 되지 않고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싶었던 제게 쉽지 않은 위치였죠.

- 그러다 실천적 학문을 공부하셨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셨는데요.

학부를 마친 후 1년간 휴학했습니다.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사회와 실천적 문제를 먼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법학부로 가서 1년 동안 공공재정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어요. 당시 네덜란드는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인 시기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복지국가가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죠. 전후에 사회민주당과 기독민주당 사이에 형성된 합의가 깨지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사회적 타협의 모델로 여겨졌던 체제가 점점 도전을 받았는데,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과잉을 완화하면서도 국가사회주의로는 가지 않았던 전후의 경제·사회적 합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목격했어요. 동구권의 ‘실제 사회주의’는 서유럽에서 거의 아무도 본받고 싶어 하지 않았고,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그것을 막고 있었죠.

로테르담에서 산업사회에서의 규범과 가치를 연구하는 기관을 이끌던 헤르만 더 랑게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어요. 그는 노동당 핵심 인물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자유대학교 밥 하웃즈바르트 교수와도 함께 공부했죠. 그는 사회주의·공산주의·계획경제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와 무제한 시장 자유도 비판했습니다. 그들이 제안한 대안은 ‘충분성의 경제’(economy of sufficiency) 개념이었어요. 저는 이 주제에 큰 흥미를 느꼈고, 많은 것을 배웠죠. 1년 동안 휴학하며 인턴십도 했고, ‘익명의 노동자’로서 다양한 산업 현장에 배치되어 실제 노동환경도 체험했어요. 로테르담 셸(Shell) 정유 공장 조립라인에서 일했습니다. 그 후 복지 경제와 민주적 심의 과정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지만, 경제학을 더 공부한다고 사회와 정치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가장 열정을 느꼈던 종교철학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프랑크푸르트학파, 소위 신변증법적·네오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에 몰두했습니다. 아도르노와 하버마스가 출발점이었죠.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저작도 공부했습니다. 제가 아도르노와 레비나스를 선택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저는 아도르노에 대한 비판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렇게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부정변증법’을 쓴다면, 그것은 헤겔에 대한 변증법의 내재적 비판이자 마르크스에 대한 유물론의 내재적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다. 일정 부분에서는 후설과 하이데거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논변은 결국 [아도르노가] 역설적이고 심지어 자기모순에 빠진다고 주장하게 됐습니다. 아도르노의 이 같은 비판자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패러다임 전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죠.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 및 3세대 이론가들—하버마스, 악셀 호네트, 알브레히트 벨머, 크리스토프 멘케, 마르틴 질 등—은 일종의 ‘언어적 전회’를 주장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목적 지향적 이성, 즉 단선적(monological) 이성에 대한 자기 파괴적 비판의 대안으로, 형식적 혹은 유사-초월적 실용주의의 상호주관적 형태를 지지해야 한다고 보았죠. 상호주관성의 철학은, 아도르노의 사유를 지나치게 협소한 칸트적·베버적 이성 개념—수단-목적 합리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심의와 궁극적 합의를 기반으로 한 소통적 합리성의 형태로 근본적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어요. 이 주장이 베버와 아도르노 사유에 내재한 니체적 요소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늘 이런 비평가들이 아도르노의 의도와 성취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아도르노의 사유에는 그들이 인정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학생 시절부터 존경했던 레비나스는 자크 데리다의 에세이를 통해 철학적으로 재조명되었지만, 동시에 비판도 받았습니다. 여기서도 아도르노의 오해와 유사한 패턴을 보았죠. 그래서 아도르노와 레비나스를 비교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각자의 맥락에서 읽고, 그들이 보여준 역설적 사유 방식—변증법을 변증법적으로 비판하고, 현상학을 현상학적으로 비판하는 방식—이 사실상 철학의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아포리아적 모델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싶었죠.

아도르노와 레비나스의 역설과 아포리아를 연구하며 시도한 것은, 제가 ‘심층 실용주의’(deep pragmatism)라 부르고 싶은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이 개념은 형이상학적 통찰과 실천적 통찰을 결합하며, 핵심 모티프는 ‘서술의 곤경’(predicament of predication)이에요. 모순 속에서 사고하고 살아가는 것을 철학적으로 정당하고, 윤리적·정치적으로도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죠. 이 주장은, 대륙철학 이후나 분석철학 이후의 철학에서 나타난 실용주의적·언어적 전회가 여전히 (혹은 다시) 신학적·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깊이의 감각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오히려 그 전통은 형이상학적 전통에 흔적을 남기고, 때로는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이 모티프를 발전시키고 함의를 탐구하는 일이, 최근 제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정치적—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저의 지적·영적 여정은 결국 가장 난해하고 종종 가장 정통적인 신학과, 근대 이후—계몽주의 이후, 변증법 이후, 현상학 이후—의 사유 사이의 긴장을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 선생님의 영향력 있는 첫 저서인 《고요한 신학》(Theologie im pianissimo), 영어판 제목은 《최소신학: 아도르노와 레비나스에서 세속 이성 비판》(Minimal Theologies: Critiques of Secular Reason in Adorno and Levinas)인데요. 신학에서 “미니멀”이란 무엇인가요? 왜 아도르노와 레비나스인가요?

이 제목은 현대의, 비록 반드시 모더니스트적이지는 않더라도, 신학과 그것을 동반하고 성찰하는 현대 종교철학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요약하는 저만의 방식이었죠. 저는 ‘in pianissimo’라는 표현을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로부터 빌려왔어요. 베버는 1917년 강연 《소명으로서의 학문》에서 근대 학문을 소명으로서, 직업으로서, 또한 부름으로 논의했습니다. 이 제목에는 루터파의 Berufung(소명) 개념의 메아리도 있었고요.

베버는 당시 근대성(modernity)이 가치 지향적 합리성이 아니라 목적 지향적 합리성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인간을 ‘철창’(iron cage)에 가두었다고 보았죠. 이는 헤겔-마르크스 전통에서 말하는 물화(reification)와 소외(alienation) 개념과 유사했어요. 베버는 독일 관념론자도, 역사적 유물론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근대성의 철창 안에서 시장과 관료적 합리성의 힘과 논리가 사고와 삶의 속도·형식·내용까지 지배하게 될 것을 우려했죠. 이 강연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의 젊은 세대 전체에 호소하며, 지적·공적 삶 모두에서 활력과 실질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청중은 전혀 다른 무언가를 갈망했습니다. 당시는 사회학자들이 공동체(Gemeinschaft)의 상실감을 논의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요. 공동체는 ‘Gesellschaft’ 또는 사회로, 더욱 반동적인 어휘에 따르면 프랑스의 civilisation(문명)으로 대체됐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소속감과 친밀감뿐 아니라 흥분까지 포함한, 요컨대 베버가 그의 강연에서 논의한 ‘체험’(Erlebnis) 개념에 담긴 모든 것을 새롭게 얻고자 하는 유사-낭만주의적 갈망이 존재했죠.1)

베버의 응답은 기본적으로 그가 광범위하게 저술했던 종교의 역사에서 이른바 예언적 불꽃이 거리를 관통하며 달음질했다는 거예요. 이제 그것이 퇴색됐다고 강연의 각주에서 말하죠. 지극히 작은 소리로(in pianissimo) 들릴 뿐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친밀함의 영역, 사적 영역으로 물러났습니다. 이제부터 세속주의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이른바 분리의 벽에 관한 논쟁을 포함한 공적 논쟁에서, 종교와 종교적 경험은 ‘사적 문제’(Privatsache)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해, 베버는 학생들에게 이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훈계합니다. 근대 합리성에 속한, 경제와 국가의 전체 기계장치를 되돌릴 수 없음을 시사해요. 기껏해야 우리 마음의 친밀함 속에 잘 간직된 비밀의 규율(disciplina arcani) 같은 무언가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예언은 더 이상 공적·사회적·정치적 영역에 자리하지 않아요. 대인 관계로서, 종교와 예언은 침묵을 지켜야 하며, 시야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베버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이나 가치의 문제조차도 아니지요. 그가 기술적 표현으로 ‘in pianissimo’라 부르며 남겨둔 것은 그 ‘음악성’입니다. 흥미롭게도 베버 자신은 종교적 의미에서 ‘음악성이 없는 사람’이라 고백했습니다. 만약 종교가 울려 퍼지는 울림, 혹은 데리다가 표현했듯이 죽음의 종소리, 금속성의 울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관계의 가장 친밀한 순간에서 포착된다고 말하면서도, 베버 자신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점에서 같은 시대의 또 다른 대가 에른스트 트뢸취와 대조적이었죠.

제가 여기서 끌어낸 것은 이렇습니다. 종교와 신학은, 예언과 더불어, 근대성 속에, 바로 ‘거기에’ 있으며, 계몽주의와 그것이 초래한 합리화의 변증법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철창(iron cage)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이제부터 그것을 포착하고 더 적절히 응답하기 위해서 훨씬 더 세련된 감수성과 미묘한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베버의 명령을 마음에 새겼는데, 종교가 여전히 또는 다시금 거기에 있지만, 점점 미세하고 미묘해졌으며, 난해해졌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또는 가상적인 것 속으로, 말하자면 거의 비존재 속으로 후퇴했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유명한 ‘체스 기계 속 난쟁이’의 비유 말이죠. 이 비유는 그 ‘난쟁이’(신학)가 너무 작고 볼품없어 얼굴조차 내밀 수 없지만,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근대적 체스 기계는 그 난쟁이 없이는 단 한 수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지요. 

- 두 번째로 출간하신 책이 《철학과 종교로의 전회》입니다. 여기서 “전회”(turn)란 무엇인지요?

전회(turn)라는 표현은 다소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종교가 존재하고 있으며, 시민·공공·정치, 나아가 그것이 세계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 그 역할을 더 이상 어떤 변칙이나 퇴행, 반동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간과되었거나, 잊혔거나, 억압되었던 것들이 점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죠.

그 책을 쓸 무렵,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는 ‘근본주의’ 프로젝트라는 대규모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배경에는 미국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에서도 나타나는 복음주의 운동의 등장과 부흥, 그리고 설명이 필요했던 현상인 힌두 민족주의, 이슬람 국가주의 대두가 있었어요. 근본주의 프로젝트는 서구 유럽이나 대서양권에서는 계몽주의 이래로 지적 합리화와 사회적·제도적 분화를 넘어서 시장과 국가 같은 공식적인 기구의 확립 및 확산으로까지 이어진 세속화라는 선형적 궤도 위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점을 전제했죠. 이런 경향은 세계 곳곳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그 자체로 의문스러운 이 가정에 맞서, 이 체제에서 벗어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것은 퇴행, 혹은 기껏해야 전통·경전 등으로의 소박한 회귀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민족주의, 이슬람 극단주의, 마크 주어겐스마이어와 같은 저자들이 분석한 다른 경향들은 이런 운동들이 근대성에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님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줬죠. 그들은 추정되는 원시적 기원이나 근본적인 텍스트에 근거하여 행동하지 않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현대적 시나리오를 능가하는 성과를 냈지요. 그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는 데 매우 능숙했으며, 종종 선하기보다는 악한 대안적 근대성을 제시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되돌아보면, 세속화 개념 속에서 근대의 역사를 사고하는 일이 더욱 문제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찰스 테일러가 《세속 시대》에서 주장했듯이, 급진적 무신론의 ‘내재적 틀’은 근대성의 자기 이해에 있어 ‘기본값’이었어요. 저항이나 심지어 대규모 반동의 움직임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바꾸지는 않았을 테죠. 그러나 만약 근본주의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이 옳았다면, 이 가설 자체도 수정이 필요했습니다. 아마도 종교에는 이성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이 있고, 칸트가 믿었듯이 그것을 ‘이성의 사실’로, 혹은 마르셀 모스가 말했듯이 ‘총체적 사회적 사실’로 마주하고, 결연하게 ‘파고 들어가야’ 할 뿐 다른 대안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몽주의의 어떤 야심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면,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기록들과 태곳적 기억처럼 여겨지는 심연에 대한 끝없는 상상적 변주와 지속적인 개념적 재구성의 야심일 것입니다. 이 같은 심층은 칸트와 그 뒤를 이은 사상가들이 수행해온 ‘비판’의 전통이 예상보다도 훨씬 풍부한 의미론적·규범적 자원과 저장소를 제공해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우리는 종교적 상상력의 강인한 지속성을 인정하고, 먼저 마주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계몽주의의 자식들로서 종교적 모티프와 동기의 재등장에 진지하게 우려하고, 그것이 좌우 양측에서 근대성과 민주주의를 향한 공격으로 이어질까 염려하며, 이미 해결됐다고 믿었던 문제들을 다시 다뤄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시대착오적이라거나 심지어 금기시해야 할 것으로 선언하는 일이겠죠. 억압된 것의 귀환은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어요.

프랑스 철학 맥락에서 도미니크 자니코는 현상학에서의 신학적 전회에 관한 저서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그 책보다 훨씬 이전에, 주로 예술과 미학을 중심으로 작업해온 현상학자 미켈 뒤프렌이 논고를 발표한 적도 있지요. 그는 시학(poetics)에 관한 글을 재출간했고, 책에 매우 긴 서문을 덧붙였습니다. 그 서문은 사실상 선언문으로서, 그가 ‘비신학적 철학’(non-theological philosophy)이라 불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철학적 요청을 담고 있죠. 뒤프렌은 사르트르적 실존주의 영향 아래 등장한 프랑스 전후 지식인들—미셸 푸코,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등—이 겉으론 급진적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보일지라도, 논증 방식이나 사유의 전개는 방법론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철저히 신학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책 제목을 ‘철학과 종교로의 전회’로 정한 것은 철학 안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관심사를 주목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흐름은 후기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도, 프랑스 현상학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죠. 두 경우 모두 단순한 일탈이나 향수의 표현이 아니며, 모순이나 지적 불성실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는 종교적 모티프와 동기의 재등장을 사유의 퇴행이나 패배로 보지 않아요. 이 관심이 오히려 철학의 핵심에 오래도록 자리해왔으며,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졌다고 보았죠.

제가 제안한 ‘전회’는 종교와 신학이 철학적 사유의 명시적인 관심사이자 주제로 다시금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수 세기에 걸친 계몽적 사유는 종교와 신학을 완전히 소화해내지도 못했고, 그것의 권위와 매력을 제거하지도 못했어요.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은, 수천 년에 걸친 종교적·신학적 사유와 실천이 인간의 정신과 심성에 심어온 정교함에 필적할 만한 수준의 철학적 세련됨조차 계몽적 사유가 획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죠. 그렇다고 단순히 방법론적 무신론이나 휴머니즘, 세속주의에서 종교적·신앙적·교회 중심의 인식적·감정적 태도로 방향을 틀자는 말은 아닙니다. 이 전회가 본질적·실제적으로 훨씬 더 복합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향함’만큼이나 ‘떠남’의 성격도 함께 지닌다는 점이에요.

핵심은, 종교에 대한 ‘전회’—종교 안으로의, 종교를 향한, 혹은 종교로부터의 전환—가 본질적으로 깊은 역설을 품고 있으며, 어쩌면 아포리아(aporia)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역설은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종교를 향해 나아갈수록, 우리는 동시에 그 현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경향을 보여요.

이 같은 진술 방식은 매우 레비나스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죠. 레비나스는 코제브의 《정신현상학》 강해 이후 헤겔 수용에 비판적으로 응답하면서, 하나의 급진적인 통찰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하지만 광범위한 질문을 던졌어요. “헤겔에게 ‘욕구(need)’란 무엇이고, ‘욕망(desire)’이란 무엇인가?” 레비나스는 프랑스어에서 besoin(욕구)과 désir(욕망) 사이에 용어적 구분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죠. ‘욕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적 개념입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충족되면 끝이지요. ‘욕망’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지요. 대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더욱 커지며, 더욱 결핍을 느끼게 만들죠. 역설적이고 아포리아적인 방식으로, 욕망하는 대상을 향해 다가갈수록 우리는 그 대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레비나스의 윤리적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정의로울수록, 나는 더욱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정의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더 큰 책임과 죄의식을 수반하게 되는 셈이지요. 그 함의와 결과는 실로 중대했어요. 윤리와 도덕에 대해 사고한다는 것은, 어떤 규범이나 준칙을 충실히 이행했으니 이제 나는 정의롭고 선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론 불가능하다는 뜻이었죠. 오히려 규칙을 따랐다는 확신, 의무를 다했다는 자기만족이야말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한 양심’이 아니라 ‘나쁜 양심’일 수 있어요.

이처럼 역설적이고 아포리아적인 ‘전회’가 과연 다른 사유 전통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지, 예컨대 초기 그리스 철학이나 불교, 힌두교 사상에서도 그런 구조가 존재하는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전회가 단지 ‘아브라함 계통 종교’에만 고유한 현상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해석한 바의 ‘전회’는 일반적 의미의 ‘회심’(conversion)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처음엔 시선의 방향을 바꾸고, 이어서 우리의 신체 전체, 나아가 정치적 공동체의 몸까지도 방향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종교를 모든 의미 가능성의 궁극적 지평으로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주장한 바는, 가장 정교하고 가장 계몽적인 철학들조차도 당분간은 종교를 암묵적으로든, 우회적으로든 자신의 주제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엄격한 철학적 논증들은 결국 신의 문제를 다루게 되며, 때로는 격렬하게 배제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신의 문제는 점점 더 존재론적 문제,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이해해온 ‘존재’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 존재 너머를 엿보면서도 신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게 레비나스 철학의 특징인데, 말씀을 들으니 선생님 작업에 레비나스의 흔적이 보이는 듯합니다.

레비나스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 것, 타자, 타인에 대한 철학이죠. 그러나 타인과의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을 거치는 가운데서만, 궁극적으론 ‘신’에 대한 철학이기도 합니다. “신은 관념 속으로 도래하시는” 것이지요. 동시에 그는 윤리적 ‘얽힘’(intrigue)—타자가 자아 속으로 스며드는 그 수동성, 그것도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방식—에선 ‘신’이라는 단어·이름·개념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윤리나 성스러움은 드러나고, 스스로를 현시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헤겔과 분명히 달라요. 헤겔은 《대논리학》에서 “신만큼 학적 관심을 받을 만한 존재는 없다”고 주장하며, 학문은 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면서 절대적 권리를 신에게 부여하죠. 데리다는 마치 그 전제를 논평하듯, 《에크리튀르와 차이》의 마지막 부분, ‘타원’(Ellipse)이라는 짧은 글에서 “신은 이미 스스로 모순적이다”라고 언급합니다.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자기모순적이며, 어쩌면 ‘존재’ 안에 자리 잡거나 그것을 근거로 삼을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지요.

물론 레비나스가 데리다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 수수께끼 같은 언급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신’이라는 단어·이름·개념은 의미론적으로 일관될 필요가 없으며, 그럼에도 존재론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거죠. 오히려 의미론적 일관성에서 멀어질수록 그 영향력은 더 깊어질 수 있어요.

이 같은 사유는 매우 난해하면서도, 신학의 가장 흥미로운 논쟁들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를테면, 칼 바르트는 그의 변증법적 신학(특히 《로마서》 제2판과 《교회교의학》)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모든 신학은 거의 자동적으로 우상숭배적이며 신성모독적이라 명확히 밝히고 있어요.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바르트는 실제로 “오직 신만이 신에 대한 신학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직 신 자신에게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 유한한 존재들—사유하는 자, 행위하는 자로서 인간—은 모든 술어화(predication)의 곤경에 놓여있습니다. 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개념을 부여하든, 명명이나 개념화는 필연적으로 신을 온전히 표현하거나 존중하지 못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죠. 이 통찰은 아도르노에게도 일관되게 나타났어요. 그는 모든 개념이 필연적으로 자신이 포착하고자 하는 비개념적인 것을 배반한다고 지적했죠. 개념은 그것이 담아내려는 실재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고 정의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외려 실재를 왜곡하거나 손상시키고 맙니다. 어떤 개념이든, 정의상 지시하는 대상과는 본질적으로 어긋남이나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개념의 고된 작업에 자신을 맡기고, 개념을 증식시키고, 미시적 개념학을 발전시키면서 개념을 구성하고, 현실을 해명하고,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역설과 아포리아는 우리의 숙명으로 자리매김하죠. 심지어 만들어내는 개념이 정교할수록, 지시하는 대상은 더욱 손에 잡히지 않게 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감’(turning)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유의 막다른 길이나 패배가 아닙니다. 이 모든 술어화의 곤경 속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는 한, 종교와 신학이 제기하는 물음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비판적 사유를 위한 가장 깊고 넓은 아카이브—자원과 저장소—로 남아있게 됩니다.(계속)


김동규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객원교수. 현상학, 해석학, 종교철학 등을 주로 연구한다. (신학적 전제를 괄호 치고) 철학적 상상력을 통해 신과 신앙을 다시 사유하는 일이 (비)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으며 여러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