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낭만적이지 않다
[420호 특집]
10대 시절은 유독 고달팠다. 우리 가정의 중심축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엄격했고 강인했다. 늘 아버지 앞에서 주눅 든 상태로 보냈다. 그러다 IMF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신청하셨다. 그와 함께 세계가 무너졌다. 아버지가 무너지니, 가정도, 나의 정신세계도 무너졌다. 성적은 떨어졌고, 학교 폭력과 왕따를 겪었다. 정신과까지 다녀야 했다. 여파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고통은 결국 나를 교회로 이끌었다. 삶에 반복되는 고통을 창조주께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고통의 이유를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고통 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20대 내내 곱씹었던 성경 구절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지난 힘든 시간들 이면에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었다. 모든 순간이 끝내 합력(合力)하여 선(善)으로 완성되리라 믿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시절을 곱씹어본다. 분명한 건 신앙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시 믿었던 바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 1:3은 말씀으로 창조가 시작되던 순간을 묘사한다. “빛이 있으라!”(창 1:3) 그렇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창세기 1:2에는 혼돈·공허·흑암·깊음, 그리고 물까지 등장한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적 질서에 반하는 영적 존재들을 암시한다. 이들을 통틀어 ‘카오스’라 명명하자. 그렇다면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유대인 성서학자 존 D. 레벤슨은 구약성경 창조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카오스’(무질서·불의·속박·질병·사망)1)를 정복하는 이야기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개혁주의 성경학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또한 하나님께서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시는’2) 이야기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창세기 1장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일어난 모든 창조는 실제로 질서와 결부되어있다. 빛과 어둠, 궁창 아래 물과 위의 물, 물과 뭍을 각각 나누시는 장면은 모두 질서가 만들어지고 카오스가 제압되어가는 과정이다.
고통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카오스를 말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통에도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로마서 8:28에 근거하여 모든 고통에 끝내 합력하여 선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는다. 정말 그럴까? 제럴드 싯처가 《하나님의 뜻》에서 이미 답한 바 있다. 1991년 가을, 아이다호주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맞은편 음주운전자의 차가 시속 137킬로미터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어와 그와 가족이 탄 미니밴을 들이받았다. 어머니와 아내, 네 살짜리 딸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이 교통사고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족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가야만 이룰 수 있는 선(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피조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일은 가당치 않다. 성경은 태초부터 카오스가 있었다고 말한다. 카오스는 질서와 무관하게 움직인다.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이, 단지 고통을 양산해낸다. 제럴드 싯처가 당한 교통사고처럼.
창세기 1장 말고도 성경 곳곳에서 카오스를 언급한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시편 74:13-14) 여기에 등장하는 바다·물·용·리워야단은 모두 카오스를 가리킨다. 시편 기자는 의도적으로 태초에 카오스를 정복하셨던 사건을 하나님께 상기한다. 카오스는 태초에 이미 정복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살아있다. 시편 기자는 카오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74:6-7) 가끔 하나님이 없는 것만 같은 시공간이 펼쳐질 때가 있다. 말씀으로 창조가 시작되기 전인 창세기 1:2처럼 세계가 온통 카오스로 가득 찬 것만 같은 순간이다.
많은 이가 고통 앞에서 욥기를 읽는다. 성경은 욥을 두고 세 번이나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욥 1:1·1:8·2:3)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자녀·재산·건강을 잃은 문제가 적어도 하나님의 징벌일 수는 없다고 선을 긋고서 욥기가 시작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욥이 고통을 겪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욥기는 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욥도 자신이 겪은 고통의 이유를 궁금해할 법한데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계 가운데 만연한 불의, 오직 카오스에 관심을 둔다. 존 D. 레벤슨의 《하나님의 창조와 악의 잔존》 원제는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정복하셨던 카오스(evil)는 여전히 끈질기게(persistence) 살아남아 있으며, 따라서 창조(creation)는 아직 미완이라는 뜻이다. 욥기가 다루는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창조 이후에도 남겨진 카오스의 문제 말이다.
욥기를 읽다 보면, 곳곳에서 카오스를 마주할 수 있다. 욥이 거주하던 ‘동방(קדם)’(욥 1:3)은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에덴의 ‘동쪽(קדם)’(창 3:24)을 암시한다.3) 욥이 살던 동네는 에덴과 상반된, 카오스가 가득한 공간이다. 욥기 3장에서 욥은 차라리 이 세계를 카오스가 집어삼켰더라면 낫지 않았겠냐고 기도한다. 기도 중에 언급한 단어 ‘캄캄(חשךׁ)’(욥 3:4) ‘리워야단’(3:8)은 모두 카오스를 가리키며, 내용 또한 창세기 1:2의 세계로 복원시키라는 절규에 가깝다. 물론 욥은 하나님에게 카오스를 능히 제압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트리시며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욥 26:12-13) 다만 하나님은 카오스를 남겨두셨고, 세상에는 불의가 만연하다. 카오스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통치를 과연 정의롭다 말할 수 있을까? 욥기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이면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는다. 고통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분이 오직 하나님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통을 계획하고 실행하신 분이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선(善)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낭만적이다. 신은 인간에게 선물을 할 때 고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또한 그렇게 믿었다. 신앙의 연차가 쌓여갈수록 더 많은 고통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고통을 선물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욥기는 하나님이 아닌 카오스로부터 오는 고통에 대해서 말한다. 제럴드 싯처가 겪은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부당하다. 아우슈비츠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다. 이면에 감춰진 ‘하나님의 뜻’은 없다. 카오스에 의해 발발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28을 곱씹었던 시절, 내가 믿었던 바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사례가 성경에 있었다. 요셉 이야기다. 요셉이 겪은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였다. 나 또한 그리되길 소망하며 곱씹었다. 요셉의 삶에 누적된 고통은 만만치 않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간다. 섬기던 주인에게 총애받지만, 주인의 아내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는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며, 자신의 누명을 벗겨달라 요청한다. 그는 요셉을 잊는다. 요셉은 긴 시간 감옥에서 버텨야 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기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술 맡은 관원장이 누명을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은 파라오가 의미심장한 꿈을 꿨던 시점에 해몽할 기회를 얻는다. 나아가 그는 총리가 되고,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며, 자신의 가족 이스라엘을 구원할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b). 이것이야말로 고통의 사건들이 합력하여 끝내 선으로 완성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의 말을 빌려 이 같은 생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만물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한 작은 생명체를 고문하여 죽인다면 과연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러한 대가를 용인할 수 있는가?”4) 아무리 끝이 좋았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이를 위해 요셉에게 가해질 사건들을 꼼꼼하게 설계하셨다고 믿을 수 있을까? 요셉이 겪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셨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요셉이 겪은 고통은 야곱의 편애(창 37:3)에서 기인한다. 덧붙여, 요셉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형제들의 모략(37:18)과 보디발 아내의 모함이며, 술 맡은 관원장의 망각(40:23)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고통을 선으로 바꿔주셨다고 고백한 요셉이, 이전에 형제들을 향해 한 말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50:20a).
하나님은 요셉이 겪을 고통들을 미리 계획하고, 또한 실행하시지 않았다. 모두 카오스로부터 기인한다. 편애·모략·모함·망각이라는 카오스가 요셉을 괴롭혔다. 따라서 각각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내재적 의미도 찾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요셉은 고통 때문에 악(惡)으로 파멸될 여지가 있었다. 정신세계는 물론이고 실제 생이 망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하나님이 요셉의 고통을 끝내 선(善)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끝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자동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단지 끝까지 살아남는 이에게 선으로 완성될 기회가 주어질 따름이다. 고통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카오스에 의한 고통을 이겨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다시 욥기로 돌아오자. 욥은 세상 가운데 만연한 카오스의 범람을 바라보며,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정의로운지 묻는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욥 24:1) 적어도 욥이 인식하는 현실은 창세기 1:2, 온갖 카오스가 가득한 세계와 닮아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계시다(욥 24:2-4). 욥은 끝내 악인이 심판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24:22·24), 적어도 현시점에는 심판이 유예된 상태다. 욥이 보기에 현 세계에는 불의가 가득하다. 윤리적 잣대를 통해 바라본 피조세계는 참혹하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38:7) 하나님은 욥과 달리 철저히 미학적 관점에서 피조세계를 바라보신다. 하나님 눈에 피조세계는 충분히 아름답다.
특별히 욥기 38장 후반부부터 언급되는 카오스를 상징하는 피조물 12종5)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하나님은 카오스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오히려 욥과 동등한 지위에 있는 피조물처럼 대하신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40:15) 앨런 F. 데이비스는 이를 두고 ‘창조주는 이런 생동감(pizzazz)을 사랑하신다’고 해설한다.6) 인간 손이 닿지 않은 정글 같은 세계를 떠올려보자. 철저히 약육강식 논리를 따른다.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이뤄진 세계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가는 장면, 하이에나가 떼로 몰려다니는 장면, 강가에서 악어가 튀어나오는 장면, 윤리적 잣대로 바라보면 끔찍하다. 욥의 심정이 꼭 그랬으리라. 미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똑같은 장면이 생동감 넘치는 다큐멘터리영화로 바뀐다. 고통을 겪는 인간에게는 잘 납득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카오스가 일부 남겨진 피조세계를 여전히 아름답다 말씀하신다.
무엇보다 여전히 피조세계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욥에게 있다. 욥은 자녀를 잃었다. 재산을 잃었다. 건강마저 잃었다. 분명 악(惡)으로 파멸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욥은 살아남았다. 오히려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욥 38:3·40:7) 하나님과 독대한다.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는다. 도리어 피조세계에 만연한 불의를 지적하며, 불의를 겪는 이들과 연대하며 하나님을 고소한다(31:35). 피조세계에 가득한 피조물이 카오스에 의해 모조리 악으로 파멸된다면 끔찍할 것이다. 그런 피조세계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카오스의 직격탄을 맞고도 살아남아 하나님께 항의하는 욥에게서 뿜어 나오는 생명력(pizzazz)을 보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을까? 욥과 같이, 요셉과 같이, 카오스 속에서도 끝내 선(善)으로 달려가는 이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은 피조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한 고등학생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서점에 가려고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끝내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장애는 평생에 걸쳐 그를 괴롭힌다. 그는 장애를 이겨내고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다. 공무원 사회에서 이른 나이에 승진하며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교통사고의 여파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날마다 신경통에 시달렸다. 늘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왔다. 가정환경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고통은 날마다 배가되었다. 이 고등학생은 이제 칠순이 된 우리 아버지다. 내가 10대 시절 겪었던 고통의 원인을 따져보면, 7할 이상이 아버지로부터 기인했다. 카오스로 말미암은 고통은 한 개인을 넘어, 가족 구성원들의 삶까지 망가트린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버지는 언젠가 나에게 물었다.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내버려 두셨는지 대답해보라!” 당시 ‘하나님의 뜻’을 굳게 믿었던 나는 무척 할 말이 많았다. 이제는 할 말이 없다. 아버지가 겪은 사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유는 없다. 내재적 의미 또한 찾을 수 없다.
아버지가 자주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있다. 공무원 면접 당시의 일이다. 장애인 가산점도 없고, 장애인 공무원 채용도 불분명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 면접관은 ‘공무원이 되면 가끔 출동을 나가는 일이 있을 텐데 다리 한쪽이 없어서 가능하겠냐’ 질문했다. 당시 아버지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다리 한쪽이 없어서 출동을 나갈 수 없다면 사무실에 남겨달라고. 그러면 사무실에서 두 명 몫을 다하겠노라고. 장애에도, 면접관의 발언에도 굴하지 않던 모습은 아버지 스스로 기억하기에도 아름다웠나 보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 다리 하나를 잘라내고도 여전히 의연하고 유머러스하며 고집 센 아버지가 가끔 아름다워 보인다. 고통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끝내 고통을 선으로 바꿔내는 한 인간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 세상에 끈질기게 남아있는 카오스는 생명을 파괴하려 하지만, 카오스 속에서도 어떻게든 파멸되지 않고 생명력을 드러내는 이들이 존재한다.
“in everything God works for good with those who love him.”(롬 8:28, 옛 RSV) 로마서 개역개정판 본문은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자동으로 합력(合力)하여 선(善)으로 귀결될 것처럼 번역했다. 반면 옛 RSV 본문은 ‘하나님’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협력(協力)하여, 함께 선(善)으로 빚어가야 할 것처럼 번역했다.7) 후자가 더 정확하게 번역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고통(‘모든 일’)이 자동으로 합력(合力)하여 선(善)으로 귀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 이면에는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의미도 이유도 없이 찾아와 우리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있으니 말이다. 고통은 우리 정신세계는 물론이고 목숨까지 파괴할 힘을 지니고 있다. 고통을 선(善)으로 만들 기회는 고통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러니 고통으로부터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먼저다.
재클린 E. 랩슬리는 욥기를 나오미 이야기, 즉 룻기와 함께 읽을 것을 제안한다.8)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녀·재산·건강을 잃은 욥처럼 나오미도 아무 이유 없이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다. 무엇보다 욥기와 룻기 사이에는 묘한 평행이 존재한다. 욥은 피조세계에 존재하는 카오스를 문제 삼는다. 이 때문에 과부와 고아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엘리바스는 욥 또한 불의에 가담하고 있다며 그의 행실을 지적한다. “너는 과부를 빈손(ריקם)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욥 22:9) 나오미 또한 베들레헴으로 낙향하면서 자기 처지를 두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ריקם)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a) 재클린 E. 랩슬리는 두 본문 사이의 평행을 이렇게 해설한다. “과부를 비게끔 대우한다는 발상은 히브리 성경 중 오직 이 두 본문에만 나온다.”9) ‘빈손이 된 과부’ 이미지는 욥기와 룻기에만 등장한다.
공통점보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점이다. 욥기는 하나님을 직접 등장시키면서 고통에 얽힌 신학적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카오스가 남겨진 피조세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일깨운다. 룻기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룻기는 빈손이 된 과부 나오미 곁에, 의외의 인물 이방인 며느리 룻을 둔다. 이방인 며느리 룻 곁에는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둔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자기 이름을 ‘괴로움’이라는 뜻인 ‘마라’로 불러달라 했던(룻 1:20)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 덕택에 베들레헴 여인들에게 “나오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룻 4:17)는 환호를 받는다. 이 환호로 룻기는 끝이 난다. 참고로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마라’로 부르지 않는다. 그녀는 한결같이 ‘기쁨’을 뜻하는 이름, ‘나오미’로 불린다. 룻기는 욥기와 달리 하나님의 정의에는 무관심하다. 다만 고통으로 망가질 것만 같았던 한 인생이, 결국 동료 인간들의 ‘선대(חסד)’(룻 1:8)를 통해 회복되는 서사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내 동료 인간들의 선대(חסד)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חסד)’(룻 2:20)였다는 암시를 풍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 처음 출석하고 나서 근 10년 동안은 고통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유독 엄격한 가정에 날 보내신 분도, IMF를 유독 심하게 겪게 하신 분도, 학교 폭력과 왕따를 당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 더 나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꽉 붙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념 덕분에 나는 교회 안에 머물 수 있었다. 교회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겪은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준 이가 있었고, 고통에 신음하던 나를 선대해준 이가 있었고, 고통을 겪어가며 동질감을 나눴던 이가 있었다. 그들과 나눈 우정은 나를 망가지지 않고 끝내 살아남게 만들었다. 교우들을 통해 협력하신 하나님 덕분에 이제는 선을 빚어나갈 기회를 얻었다.
나는 지금도 교회·학교·직장·가정 등에서 누적된 적폐로 고통받는 이들을 알고 있다. 인생 가운데 마주한 사건의 잔상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따라서 기도한다. 악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달라고. 그들이 버틸 수 있게끔 룻과 보아스를 보내달라고. 혹은 내가 그들 곁에서 룻과 보아스 역할을 감당할 기회를 달라고. 고통은 언제든 인간을 파괴할 힘을 지니고 있다. 자연스럽게 합력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곁에 있는 벗들이 선대를 베풀어준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망가지지 않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요셉처럼, 욥처럼, 고통을 이겨낸 아름다운 생명력을 뽐낼 기회도 생긴다. 고통은 분명 낭만적이지 않다. 다만 고통 가운데 곁을 지키는 이들, 그리고 끝내 고통을 이겨낸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낭만적이다.
1) 존 D. 레벤슨, 홍국평·오윤탁 옮김, 《하나님의 창조와 악의 잔존》(새물결플러스), 29쪽.
2)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강대훈 옮김, 《SSBT 혼돈과 질서 성경신학》(부흥과개혁사), 31/439쪽(전자책).
3) 《SSBT 혼돈과 질서 성경신학》, 105/439쪽.
4)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차보람 옮김, 《바다의 문들》(비아), 63쪽.
5) 고대 근동 도상학(Iconography)을 연구한 오트마 킬(othmar keel)은 피조물 12종(사자·까마귀·사슴·산양·야생나귀·산짐승·타조·군마·매·독수리·베헤못·리워야단)이 고대 근동 세계에서 ‘혼돈’을 상징하는 동물이라 말한다(만프레드 외밍·콘라드 슈미트, 임시영 옮김, 《욥의 길》(대한기독교서회).
6) 엘런 F. 데이비스, 노종문 옮김, 《히브리 성서를 열다》(복있는사람), 559쪽.
7) 톰 라이트 또한 해당 번역을 지지한다. 《로마서의 심장 속으로》(비아토르), 260-265쪽을 참조하라.
8) 재클린 E. 랩슬리, 정대준 옮김, 《이것도 하나님 말씀인가》(도서출판100), 192쪽.
9) 위의 책, 208쪽.
홍동우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저자, 사당역 성경공부방 기획자, ‘추천왕 홍목’ 유튜브 기획자. 돈 안 되고 의미 있는 일을 보면 군침이 도는 기이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