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기사’는 누구인가?

[318호 올곧게 읽는 성경] 한국교회로 배달된 요한의 편지 5 (계 6장)

2017-04-21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계 6:1-2)

세상을 논쟁의 피로 물들인 ‘백마 탄 기사’
요한계시록 6장만큼 수준급 학자들이 지혜를 뽐내며 상대를 무참히 타격하는 격투가 벌어진 성서 본문이 또 있을까? 이 논쟁에는 심지어 자끄 엘륄1까지 백마 탄 기사(이하 ‘백기사’)는 그리스도라며 뛰어들었다(1975년). 한편 그레고리 빌은 《NIGTC 요한계시록》(1999년)에서 침착하게 넷째 기사와 함께 백기사를 사탄적 세력으로 봐야 한다며 자끄 엘륄의 정반대 편에 섰다.2 자끄 엘륄은 이 싸움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뛰는 천재 위에 나는 전문가가 너무 많았다. 물론 빌의 견고함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기엔 버거웠다.

좌우 전후 학자 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백기사에 관해 언급된 요소들을 중심으로 자기들 주장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같은 연구 방식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 상대 학자를 비판하는 것도 똑같았다. 구약을 공부하던 필자를 계시록 연구로 인도한 스승 마틴 카러(Martin Karrer)는 ‘독자들이 특별히 계시록 6:2을 해석하려 하면 영원한 쟁투적 논쟁에 휩쓸려 들어간다’고 했다.3 그는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독자’가 얼마나 다양하게 채워 넣으려 시도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독일의 세종대왕인 루터의 오역을 들추는 것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신·구교 공동 계시록 주석의 집필을 위탁받은, 작금 최고의 권위자 카러조차도 이 본문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피해간다.

뫼비우스의 띠를 글로 쓴 것 같은, 계시록 6:2의 해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극도로 제한된 묘사를 근거로 그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려 하지 말고 저자의 교묘한 중의적 형상을 그대로 즐길 줄 아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외적인 형상을 일부 공유했다고 본질이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말이 어렵다면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한다.

백기사의 고뇌와 느부갓네살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단 4:24-27)

우리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해주는 장면에서 ‘하나님이 제국주의와 독재자를 다루는 법’을 엿보게 된다. 왕의 꿈은 ‘탄핵’된 왕의 미래를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는 ‘확정’된 것으로 그려지지 않고 조건부 유보 상태로 보인다(“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_4:27).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심판 예언은 폭정의 과도기에 분출되었다. 권력의 횡포가 일어나기 전이나 도중에 긴급한 ‘경고’를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실제로는 시리아의 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BC 175-163 재위)가 들어주길 바랐을 이 다니엘과 왕의 대화는 약자를 들판의 이름 없는 풀처럼 여기는 당대의 절대 군주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이자 마지막 기회이다.

폭정의 희생자는 하나님 날개 안으로, 독재 군주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사람들 위에서 군림했으나 심판의 운명 앞에서는 마침내 무너지고야 말 피고인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마지막 권고, 그 심판의 계시를 듣고 스스로 돌아볼 ‘인간’은 과연 존재할까? 다니엘의 회개와 전향을 의미하는 충고를 누가 감히 신하로서 주군에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다니엘이 제시했던 4:24의 충언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는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수를 시험했던 율법교사에게 예수께서 한 명령과 동일한 내용이다.(“이르되 자비[엘레오스, ἔλεος]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_눅 10:37). 이 구절은 구약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마소라(MT) 본문에서 동사 ‘자비를 베풀다’(하난, חנן)는 헬라어로 ‘아가파오’(ἀγαπάω, 70인역)와 ‘엘레에모수네’(ἐλεημοσύνη, 데오도치온역)로 번역되었다. ‘하난’(חנן)의 동의어는 우리말 ‘인애’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이다. 스가랴 7:9에서 헤세드는 다시 위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온 헬라어 ‘엘레오스’(ἔλεος)로 번역된다. 이러한 언어적 관계로 볼 때,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존속할 길과 율법학자가 영생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를 땅에서 실천하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

다니엘서 1장에서 다니엘 다음으로 거론되는 세 친구 중 가장 먼저 언급되는 ‘하나냐’라는 이름에서, 다니엘서가 제국치하 이스라엘과 군주 모두에게 제시하고픈 메시지의 핵심은 결국 ‘인애의 삶’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대의 ‘이기며 또 이기려고’ 나아가던 백기사 느부갓네살 왕에게 ‘인애의 도’가 제시되었다. 그가 ‘유턴’을 한다면 재앙의 예언은 취소될 것이었다. 다니엘은 왕을 고뇌에 빠뜨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딜레마(눅 10:25-37)
‘생명’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본능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이기적인 존재가 영생을 추구할 때 예수는 매우 이타적인 답(“네 이웃에게 자비를, 인애를, 사랑을 베풀라”)을 제시하셨다. 예수의 교설(敎說)은 우리에게 본능을 거슬러 살라 한다. 역사가 보여준 권력자의 본능은 이기고 또 이기는 것이다. 밟고 또 밟는 것이다. 취하고 더 취하는 것이다.

   
 


누가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가진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온 사건을 소개한다. 보통 성경에서 서기관이라 불리는 이 ‘율법학자’들은 누구였을까? 서기관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율법교사’는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가진 자들이다.(“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_눅 19:47) 다니엘이 앞으로 일어날 바벨론 왕의 폭정을 알았던 것처럼, 예수도 율법학자들이 무서운 음모에 가담하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강도 만난 자’에게 일어나는 일 세 가지는 예수의 수난을 한 획으로 그려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예수는 비유 속 등장인물에 늘 자신을 등장시킨다. 예수는 처세술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러 오신 분이다. 이제 예수 앞에 예수를 죽이고자 일을 꾸미는 사람 중 하나가 나타나 예수를 시험하며 ‘영생’의 길을 묻는다. 예수는 자기를 가리켜 생명의 물(요 4:10)이요 생명의 빛(요 8:12)이라 가르쳤다. 그러고는 그 생명의 물과 빛으로 생성된 (참포도)나무가 자신이며 너희는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가지’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요 15:5) 지금 율법사는 (계획에 따르면) 곧 죽여야 할 예수 앞에서 ‘영생의 길’을 묻고 있다. ‘생명의 근원’인 나무를 잘라내고 ‘가지’만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묻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라” 가르치는 예수의 말은 자기를 죽이지 말아 달라는 호소였다.

율법사에게 한 말을 제자들은 경청했을까?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떠났다고 진술하지만, 누가는 그것을 생략하고 제자들은 오히려 세상을 떠나 예수를 따랐다고 스스로 변호한다. (사도행전-누가의 관점에서 제자들은 ‘아직’ 예수를 떠난 것이 아님은 명확하다. 혹은 예수를 떠났던 그때 그 제자들을 제자로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복음서 중 비교적 실증적 역사가로 평가받는 누가는 때론 과거의 역사보다 앞으로의 신앙 고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는 길에서 ‘유턴’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도 성경 밖 역사(빌라도행전)에서 유턴했다.

느부갓네살과 율법사는 이제 판단의 갈림길에 섰다. 하려고 하던 일을 할 것이냐, 계시와 예언을 받고 돌이켜 갈 것이냐? 여기서 다시, 활을 든 백기사는 누구인가? 그는 현대의 논쟁사가 보여주듯, 아직 기로에 있다.

오라! (에르쿠, ἔρχου)
계시록 본문에서 ‘오라’(ἔρχου, 6:1)는 단어는 말 탄 기수들(6장)과 그리스도(12장)에게만 사용되면서 주석자를 양자택일의 좁은 길로 몰아갔다. 구약(70인역)에서 동사 ‘오다’(ἔρχομαι)의 2인칭 단수 중간태 명령형(ἔρχου)은 유일한 용례가 있는데, 바람을 향해 오라고 명령하는 문맥이다.(아 4:16) 요한도 천상의 네 생물이 말 탄 네 기수를 네 바람을 부르는 것으로 여겼다면(“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_슥 6:5) 네 말과 동서남북을 동일시하는 스가랴 6장의 묘사는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전승된 듯하다. 네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바람이었다. 잠언(30:4)은 하나님을 가리켜 바람을 장중에 모은 분으로 묘사한다.

보좌를 둘러싼 네 생물이 바람을 부르는 장면은 세상에 부는 어떤 바람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제를 아주 벗어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말들이 달려도 고삐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것이다. 바람이란 본시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에(합 1:11) 하나님은 보좌 주위 네 생물로 하여금 바람의 고삐를 쥐게 하셨다. 스가랴의 네 바람(네 말)은 욥기의 사탄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고대에서 사탄은 ‘절대 악’의 상징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 1: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슥 6:7)

욥을 괴롭힌 사탄에게 한계(“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_욥 2:6)를 정하셨던 하나님은 계시록에서도 네 바람에게 한계(“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_계 7:1)를 지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네 바람 중 하나인 백기사를 의의 그리스도라 단언할 수 있을까?

백마 (히포스 로이코스, ἵππος λευκός)
스가랴의 흰 말은 검은 말을 뒤따랐고(슥 6:6) 계시록에서는 음부가 청황색 말을 뒤따랐다. 여기서 보듯 계시록은 스가랴서의 네 말들을 전향적으로 재편성했다. 두 책을 비교하며 얻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유사성을 찾아 도움이 되는 대목 하나를 찾자면, 네 말(바람)들을 땅으로 보내 그곳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슥 7:14)

흰색이 계시록 안에서 주는 의미는 용례상 긍정적이고 신적이며 그리스도 친화적이다. 그래서 ‘흰색’ 관련 사물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유독 ‘흰 말’ 문제에서만큼은 의견이 갈렸다. 그것은 어쩌면 백기사가 활을 들고 있어서 생긴 문제다.

활 (톡손, τόξον)
여러 논쟁의 와중에 유일하게 학자들이 의견 일치를 본 것은 활이 비(非)이스라엘적이며 따라서 아폴로 신화, 파르티야 군대 내지는 스키타이 족의 전투 양식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4 그러나 헬라어 활(τόξον)은 무지개(창 9:13)의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이고, 사울 왕의 칼과 아들 요나단의 활(삼하 1:22)은 조화를 이루며 부자지간을 상징하는 좋은 도구였다. 심지어 선지자 엘리사의 손이 닿은 이스라엘 왕의 활과 화살들은 여호와의 구원(왕하 13:15-17)을 의미하기도 했으니 백기사가 활을 들었다 해서 이방 신과 이방 민족의 군대와 연결하는 것은 성경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기 어렵다. 다만, 여류 신학자 피오렌자가 예레미야의 바벨론의 패망과 관련한 예언(“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_51:56) 속에서 백기사의 의미를 살핀 작업은 이 부류 해석 중 가장 돋보이는 제안이다.5

백기사를 그리스도로 보는 자크 B. 두캉이, 활은 있으나 화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화적 승리를 추론하는 것6은 역으로 무기인 활도 없어야 한다는 논리적 그림자를 만든다. 또한 활을 들고 화살로 이기지 않았다면 “이기면서 또 이기려고 나아갔다”(계 6:2)는 말은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화살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생략의 미학으로 봐도 좋다.

면류관 (스테파노스, στέφανος)
그리스도는 실패했고 실패하며 나아가다가 최후에 백성이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손에 못 박힌 채로 고작 가시면류관을 썼다. 그런데 5장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두루마리를 손에 넣은 후, 14장에서 구름을 타고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낫을 들고 나타났다. 달을 중심으로 하는 도상학적 측면에서 보면, 낫과 면류관은 같은 상징이다. 나아가 구름이 품고 있는 ‘무지개’는 ‘활’과 글자를 공유하니, ‘백마’의 상징을 공유하는 6장과 19장의 ‘백기사’는 14장을 가교로 교묘히 상징을 교류한다. 요한의 묘사가 보여주는 그 수사학의 화려함은 감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아무리 6장의 백기사가 19장의 백기사와 유사해 보인다 해도 19:16을 간과해선 안 된다(“그의 옷과 넓적다리에는 ‘왕들의 왕’, ‘군주들의 군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_새번역). 19장은 그 어떠한 ‘유사 왕’이 세상에 존재해도 최고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임을 확인시킨다. 6장의 면류관이 ‘활’로 얻어진 것이라면 19:12 백기사의 면류관들은 “의로 심판하고 싸워”(11절) 획득한 것이다. 6장의 백기사가 자석에 이끌리듯 19장의 백기사와 동일시되고 있으나, 활을 든 백기사의 승리가 어떤 승리인지를 알기 전에는 판단이 유보되어야 한다.

이기면서 이기려고 나아갔다 (엑스엘덴 니콘 카이 히나 니케세, ἐξῆλθεν νικῶν καὶ ἵνα νικήσῃ.)
백기사는 승리를 경험한 자인가? ‘νικῶν’은 ‘νικάω’의 현재 분사형으로 부정과거 ‘ἐξῆλθεν’의 시제와 일치되며 이긴 적이 있음을 명확히 한다. 쉽게 말해, 이 백기사는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의 의의 승리 외에 진정한 승리가 과거에 있었는가? 6장 백기사의 승리가 어두워 보이는 이유다.
문예비평적 분석으로 보면, 6장에는 전쟁의 환란으로 고통받는 두 부류가 존재한다.

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9절)

2.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5-16절)

백기사는 누구와 싸워 이긴다는 말일까? 순교자?(9절) 땅의 임금들 등?(15절) 백기사가 땅의 임금들과 싸워 승리한다면 그는 어린양의 진노 화신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의 무기가 순교자를 직접 양산한다면 모순이다. 적어도 백기사와 다른 기사들 간의 유기적 성격이 존재한다면, 모순되는 것이다(Beale). 두 피해자들의 고통은 두 갈래의 공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 보편적 전쟁의 풍화 속에 나타난 두 양상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긴다’는 말이 적시하는 대상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생략의 미학 차원을 넘어선다. 이 문제의 답이 6장의 키워드다. 적이 누구인지 왜 싸우는지 불분명하므로, 백기사의 정체는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하나의 분명한 신학: 스가랴, 계시록 그리고 예레미야
백기사를 비롯해 네 생물이 불러낸 기사들의 전쟁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계시록의 기록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1월호에 쓴 “인자 같은 이로서의 그리스도”(계 1장) 편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레미야의 편지(바룩서 6장)에 묘사되는 바벨론 신전의 죽은 신 ‘벨’과 상반되는, 살아 계신 신의 형상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밝혔다. 사실 그 점이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었다. 왜냐하면, 차후에 펼쳐질 모든 계시와 심판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몇몇 서신들을 보면 그가 서신 서두에 ‘내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먼저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롬 1:3 이하; 고전 1:18; 엡 1:4 이하 등).

예레미야의 편지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희는 하느님 앞에서 지은 죄 때문에 바빌론인들의 임금 느부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바빌론으로 들어가, 일곱 세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긴 세월을 그곳에서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는 너희를 거기에서 무사히 데리고 나오겠다.”(바룩서 6:1-2) 스가랴도 다르지 않다. “바빌론 도성에서 살고 있는 시온 백성아, 어서 빠져 나오너라!”(슥 2:7, 새번역) 예레미야의 계시와 심판 기준도 그렇다. “너희는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하여라.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땅에서 떠나라. 양 떼 앞에서 걸어가는 숫염소처럼 앞장서서 나오너라.”(렘 50:8, 새번역)
이제 다시 계시록을 보자.

나는 하늘에서 또 다른 음성이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아 그 여자(바벨론)에게서 떠나거라. 너희는 그 여자의 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 (18:4, 새번역)

드디어 하나의 명확한 신학이 드러났다. ‘탈(脫)바벨론’ 신학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토록 탈출해야만 했던 바벨론은 어떤 곳인가? 예레미야의 편지가 경고하는 대상은 바벨론의 정치적 폭거가 아니다. 편지의 발신자는 바벨론의 우상을 경계하고 있다. 우상 즉 생명 없는 신과 그를 모시는 왕과 제사장들이 땅에서 화평을 제하고 흉년과 사망이 그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섰던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이 충고한다.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 예언의 경고를 간과하면 환란의 예언이 응할 것이다!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렘 51:56)
활을 든 백기사는 처음 하나님의 종 역할을 감당하다 지나친 욕심으로 마지막에 하나님의 또 다른 종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바벨론일 수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수많은 권력들이 증명한 바다. 의기로 일어나 탐욕으로 꺾인 활들이 어디 하나둘인가! 도대체 백기사 그는 누구인가?

7가지가 결여된 백기사
19장의 백기사에 비해 6장의 백기사는 ①“인자 같은 이”(1:12-20)와의 형상적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②따르는 의인이 없으며 ③보편적 지배권이 없으며 ④이름이 없고 ⑤승리의 근거와 대상이 불분명하고 ⑥최종 승리 여부가 불확실하고 ⑦자기 것이 아닌 수여된 면류관을 쓰고 있다. 19장의 백기사에 비해 그리스도를 특정할 일곱 가지가 없는 껍데기뿐인 6장의 백기사를 무엇이라 고정적으로 규정할 때 생기는 반론을 잠재울 묘수는 없다. 은행의 공(空)카드처럼 소유주를 확정하고 사인을 하기 전 상태와 같은 활을 든 백기사는 스스로 자기를 규정할 숙제가 남아 있다. 오늘날의 활을 든 백기사들도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문제의 백기사는 보좌 앞 어느 생물에 의해 호출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스스로 판단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행사할지 홀로 판단해야 한다. 첫째 인이 뜯기며 그에게 힘과 권위와 승리가 보장되었다. 느부갓네살 왕과 예수를 죽이려던 율법사가 열린 공간에 서 있었던 것처럼 백기사도 열린 공간에 서 있다. 우리는 다만 그가 우상과 거짓과 적폐와의 전쟁에 나서길 바라고, 반드시 승리하길 바랄 뿐이다. 그와 함께 달릴 기수들도 죽음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더러운 위선의 평화를 제하는 역사의 반전이 일어나길 소망한다. 그리하면 계시록은 일그러진 지구의 종말을 그려낸 거북한 환상이라는 누명을 벗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고 농락하던 인류의 교만한 폐습을 바꾸는 인류의 마지막 보루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장미 대선을 코앞에 둔 2017년의 5월, 우리 앞에는 곧 백마 탈 기수 여러 명이 선을 보이고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분명 백마를 타고 면류관을 쓴 채 권력의 활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그가 적폐를 향하여 정의의 화살을 쏠지, 민중을 향하여 위선의 창을 던질지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제1공화국부터 작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이미 계시되었다. 양의 탈을 쓴 이리도 이기려 나아갈 것이고, 희생을 마다치 않을 백성의 큰 머슴도 토호들의 매를 맞는 것을 오히려 승리라 여길 것이다. 다만 바라건대, 가난한 이에게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임을 새겨주길 바랄 뿐이다. 

 

각주)

1) 《요한계시록 주석》(한들), 유상현 역, 183쪽.
2) 《NIGTC 요한계시록(상)》(새물결플러스), 오광만 역, 630쪽.
3) Martin Karrer, 《Studien zur Johannesoffenbarung und ihrer Auslegung》(Neukirchener), 2005, 402~432쪽. ‘독자 손에 들린 시각적 도구’라는 카러의 참여 글이 담긴 이 책은 자신의 스승 Otto Boecher의 70회 생일을 맞아 헌정된 바 있다.
4) Heinrich Kraft, 《Die Bilder der Offenbarung des Johannes》(Peter Lang), 1994, 86쪽.
5) Elisabeth Schuessler Fiorenza, 《Das Buch der Offenbarung》(Kohlhammer), M. Graffam-Minkus 역, 1994, 85쪽.
6) 자크 B. 두캉, 《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시조사), 유동기 역, 2012, 85쪽.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