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호] 요한계시록 1:9~20

무모한 채굴자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나 ‘144,000’,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같은 수수께끼의 주제들은 실제 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역사 속에서 이미 혹세무민의 혼란만 양산한 소재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늘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수비학(numerology, 숫자를 이용한 점술)은 그 끝없는 변신으로 우리를 여전히 놀라게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친구 프리드리히 폰 뤼케(Gottfried Christian Friedrich Lücke, 1791~1855)의 《요한계시록 개론》(1832)이 나오기 전까지, 〈요한계시록〉이라는 이 문제의 책에 대한 변변한 학문적 접근은 거의 없었다.

근래에도 한국의 샤머니즘적 유사기독교 단체들은, 이 문서에 관한 온갖 냄새 나는 ‘자가 발전적 상상’을 통해 기발하고도 유일한 진리의 신대륙을 발견한 양 기막힌 쇼를 벌이고 있다. 신학자들의 외면과 그 학문적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혹세무민의 전형적인 증례일 것이다. 개중엔 이 책을 들고 산속에 틀어박혀 신탁과 같은 유일한 해석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문서에 대한 해석이 백일기도로 얻어질 리 없다. 모든 게 실은 자기의 종교적 위상을 대중에게 인정받으려는 곡예와 마술적 술수에 불과하니, 그렇게 쓰일 바에야 차라리 〈요한계시록〉이 없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다.

이 책은 과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모음집인가? 여기 쓰인 말들의 신비로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66권의 성경 중 이 책을 뺀 나머지 책들의 시간적 관심은 주로 ‘과거’다. 몇몇 서신들이 과거를 벗어나 ‘오늘’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나 현재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이 다가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일곱 교회 서신 속 ‘교회의 어제와 오늘’은 앞으로 일어날 환상 속의 주님의 진단이니 이 또한 오늘 보이는 바 오늘은 아닌 것이다. ‘예수의 환란에 동참했다’는 진술이 요한이 말하는 유일한 과거이지만, 역사를 다루려는 의도가 아닌 자기 소개에 그치는 언급일 뿐이다.

돌아보건대, 미국의 카리스마틱 신비주의와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비주의가 만나 한국교회 특유의 성령운동 흐름을 형성할 때 〈요한계시록〉에 대한 선점(?)은 필수였을 것이다. 원어(原語)와 텍스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던 그 시절, 한국의 무속적 기독교 교사들은 실제로 이 책의 무수한 독점적 해석들을 부지런히 쏟아 냈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망상과 같았다. 말하자면 책 자체가 신비로웠던 게 아니라 (아무 도구도 없이) 해석의 광맥을 채취하려 무모하게 몰려든 ‘채굴자들’이 더 신기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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