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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같은 이”로서의 그리스도 이해
[314호] 요한계시록 1:9~20
[314호] 2016년 12월 28일 (수) 15:03:09 정재훈 용인 덕성교회 전도사 goscon@goscon.co.kr

무모한 채굴자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이나 ‘144,000’,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같은 수수께끼의 주제들은 실제 학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역사 속에서 이미 혹세무민의 혼란만 양산한 소재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늘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수비학(numerology, 숫자를 이용한 점술)은 그 끝없는 변신으로 우리를 여전히 놀라게 했다. 슐라이어마허의 친구 프리드리히 폰 뤼케(Gottfried Christian Friedrich Lücke, 1791~1855)의 《요한계시록 개론》(1832)이 나오기 전까지, 〈요한계시록〉이라는 이 문제의 책에 대한 변변한 학문적 접근은 거의 없었다.

근래에도 한국의 샤머니즘적 유사기독교 단체들은, 이 문서에 관한 온갖 냄새 나는 ‘자가 발전적 상상’을 통해 기발하고도 유일한 진리의 신대륙을 발견한 양 기막힌 쇼를 벌이고 있다. 신학자들의 외면과 그 학문적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혹세무민의 전형적인 증례일 것이다. 개중엔 이 책을 들고 산속에 틀어박혀 신탁과 같은 유일한 해석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문서에 대한 해석이 백일기도로 얻어질 리 없다. 모든 게 실은 자기의 종교적 위상을 대중에게 인정받으려는 곡예와 마술적 술수에 불과하니, 그렇게 쓰일 바에야 차라리 〈요한계시록〉이 없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다.

이 책은 과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모음집인가? 여기 쓰인 말들의 신비로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66권의 성경 중 이 책을 뺀 나머지 책들의 시간적 관심은 주로 ‘과거’다. 몇몇 서신들이 과거를 벗어나 ‘오늘’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과거나 현재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이 다가올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일곱 교회 서신 속 ‘교회의 어제와 오늘’은 앞으로 일어날 환상 속의 주님의 진단이니 이 또한 오늘 보이는 바 오늘은 아닌 것이다. ‘예수의 환란에 동참했다’는 진술이 요한이 말하는 유일한 과거이지만, 역사를 다루려는 의도가 아닌 자기 소개에 그치는 언급일 뿐이다.

돌아보건대, 미국의 카리스마틱 신비주의와 한국의 샤머니즘적 신비주의가 만나 한국교회 특유의 성령운동 흐름을 형성할 때 〈요한계시록〉에 대한 선점(?)은 필수였을 것이다. 원어(原語)와 텍스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던 그 시절, 한국의 무속적 기독교 교사들은 실제로 이 책의 무수한 독점적 해석들을 부지런히 쏟아 냈다. 하지만 그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망상과 같았다. 말하자면 책 자체가 신비로웠던 게 아니라 (아무 도구도 없이) 해석의 광맥을 채취하려 무모하게 몰려든 ‘채굴자들’이 더 신기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잘못 꿴 단추
오늘 말하려는 주제는 〈요한계시록〉의 첫 부분,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지니는 발생론적 의미이다. 이것은 필시 〈요한계시록〉 전체를 읽는 관점을 달리하는 데 영향을 끼치리라 믿는다. 말 그대로 사도 요한이 처음 본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한다!)

   
▲ 뒤러의 요한계시록 판화 일부

화가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요한계시록 판화 그림을 참고해보자. 요한이 글로써 그림을 그린 것은 그림을 그릴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유대교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요한이 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이 서술하는 궁극적 지시사항은 우상에 대한 경계에 있었다. 곧 가짜 신인 우상과 대비되는 참된 신으로서 그리스도를 환기하려 요한은 글로써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첫 여인 미갈이 아버지 사울로부터 남편을 탈출시킬 때 요긴하게 사용했던 사람 형상의 드라빔(삼상 19:13)으로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종교는 한시도 우상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전통적 관념에서 뒤러의 이런 그림은 절대 그려져서는 안 될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런 환상(그림)이 가지는 성서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다니엘서〉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 본문은 모두 표준새번역을 사용했다.)

그의 몸은 녹주석 같이 빛나고, 그의 얼굴은 번갯불 같이 환하고, 눈은 횃불 같이 이글거리고, 팔과 발은 빛나는 놋쇠처럼 뻔쩍였으며, 목소리는 큰 무리가 지르는 소리와도 같았다. (단 10:6)

위 본문을 아래 〈요한계시록〉 본문의 “인자 같은 이”와 비교해보자.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계 1:12~16)

두 본문은 몇 가지 추가되고 변경된 요소를 감안해도 내용상 유사점들이 다량 확인된다. 학자들은 이 모습의 근원적 출처는 어디이며 〈요한계시록〉은 왜 〈다니엘서〉의 형상을 ‘변형’ ‘확대’했는지 두 가지 연구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답은 쿰란 동굴에서도 발굴된 바 있는, 〈바룩서〉 6장으로 잘못 알려진 〈예레미야의 편지〉라는 텍스트에 있다. 서문의 일부와 비교 부분만 발췌한다.

너희는 하느님 앞에서 지은 죄 때문에 바빌론인들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바빌론으로 들어가, 일곱 세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해 동안 긴 세월을 그곳에서 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나는 너희를 거기에서 무사히 데리고 나오겠다. 너희는 이제 바빌론에서 사람들이 은과 금과 나무로 만든 신들을 어깨에 메고 다니며 이민족들을 두렵게 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다른 민족들처럼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희는 군중이 앞뒤에서 그것들에게 경배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주님, 경배드릴 분은 당신뿐이십니다.’하고 마음속으로 말하여라. (바룩서 6:1~5)

   
 


이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당도한 요한의 편지다. 앞의 표를 참고하며, 한국교회의 자화상과 〈요한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를 비교해보자.

배경(일곱 촛대)
일곱 금 촛대는 바벨론 신전의 무분별한 초와 대비되는 것으로, 질서와 균형, 약속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곱 교회로 설명(계 1:20)하는 데 이르러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이 부르신 신앙 공동체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빛의 자리를 넘겨받았다. 이 엄중한 의미로서의 ‘교회’가 오늘날 친목 단체로 변질되어 작은 백열전구로 전락한 듯하다.

의관(긴 옷과 금띠)
‘개독교’와 ‘먹사’로 대변되는 지금의 교회와 목사는 신뢰와 자비를 상징하는 옷을 잃어버렸다. 주님이 아무리 의의 옷을 입으셨던들 교회와 목사들이 탐욕의 좀이 난 옷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한, 주님이 걸치신 옷은 의미가 없다.

머리(흰 머리와 머리카락)
이방 신전의 제사장들이 신도의 돈으로 치장한 금과 은으로 도금한 저 우상의 관을 벗겨 창기에게 화대로 준다는 예레미야의 일성은, 오늘날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례를 들자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찰 지경 아닌가.

눈(불꽃 같은 눈)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 사건 앞에서도 한국교회는 눈 한번 깜박 않는다. ‘주님이 우리를 본다는 것’에 교회는 기뻐하나, 자기 스스로는 세상일에 눈을 감는다는 것을 어찌 봐야 하나? 먼지 덮인 우상의 눈과 타오르는 예수의 눈은, 이보다 더 좋은 대비가 없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위기는 ‘눈 감지 않는 눈앞에서 눈 감고 있다’는 데 있다.

손과 발(일곱 별 쥔 오른손, 풀무 놋쇠)
우상의 오른손에 있는 것은 무기다. 교회가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붙들려 있다는 안정감(?)은 엉뚱한 방향이다. 제대로 보자면 칼과 도끼를 쥐고 있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의 무기는 ‘교회’란 뜻이다. 냉정하게 자문해보자.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적합한가? 낡은 도끼자루 위에 새 도끼날이 서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로도스의 헬리오스 동상은 무릎이 깨져 허물어졌다고 한다. 요한의 주님은 결단코 멈추지 않겠다고 무쇠 다리로 약속하셨다. 위선적 한국교회사에서 드문드문 함석헌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처럼 진리만을 따르고, 또 따르고자 뜻을 품은 이들도 있었다. 그 가치를 아는 이라면 고달픈 노상에 주저앉아 내처 쉬고픈 맘을 떨치고 일어나 중단 없이 진리의 길을 가야 한다. 걷지 못하는 신을 떠받드는 바빌론의 저들은 교회를 자기 권력과 재산 축재의 도구로 삼아 무서운 기세로 위선의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멈추어선 안 된다. 우리가 진리를 등진다면, 차디찬 물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소리 지르리라!

입(큰 물, 양날 검)
금과 은으로 두껍게 도금된 우상의 혀와 달리 예수의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고 양날 가진 검과 같다. 그러나 교회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이 구구한 궤변으로 정권을 비호하고 삼류 신학적 넋두리를 쏟아 놓는 하수구 같았다. 화려한 가운으로 온갖 부정한 학위를 쓸어 담아 고상한 학자를 자처하면서 백성의 한을 풀기는커녕 설상가상의 막장 설교로 상처를 후벼 파는 설교들은 제발 그리스도의 강단에서 사라져야 한다.

얼굴(떠오르는 태양)
예수가 처형되던 날 해는 가려졌다.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떠오른 저 태양은 이제 태양마저도 비추는 태양이다. 구름 따위에 가려지는 태양도 아니다. 이 태양이 빛을 잃는 것은 교회의 타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전의 연기로 검게 그을린 우상의 얼굴보다 이 땅 예수의 얼굴이 더 검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러한 수고로운 검토와 지성적 비판이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한 터럭도 고치지 못할 것임을. 그러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받고(마 11:19), 경고는 무시당했을 때 심판을 앞당겨 그 심판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훌륭히 할 것이니, 무의미하지는 않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치명적 부패는 이제 치유할 길이 없는 ‘말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많은 돈, 일하지 않는 손이 거기 우상의 터전에서 기생하며 살기 때문이다.

부정의 신학, 반사의 신학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Antoni Placid Gaudí i Cornet, 1852~1926)는 “곡선은 신의 선이고 직선은 인간의 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우디는 직선을 싫어하고 곡선을 좋아하여 기이한 건축을 하기로 유명했는데, 문제는 이런 건축이 무게 중심을 잡기가 곤란했다는 점이다. 그의 해법은 세우고자 하는 건물을, 총알을 넣은 작은 주머니에 실을 달아 아래로 늘여 뜨려 놓고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보고 재설계를 하는 독창적 방법이었다. 가우디가 사용한 작업 도구가 성당 내 박물관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위 사진 참조)

‘부정의 신학’이라 했던가? 그가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을 건축할 때 사용했던 이 기법은 요한이 ‘인자 같은 이’의 형상을 그려내는 기법과 정확히 닮았다. 말 그대로 ‘부정의 신학’, 가우디의 방식을 빌면 ‘반사의 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우상의 부정적인 형상과 정반대되는 긍정적 형상을 ‘그려냄’으로써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자아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었던 요한. 그는 하나님을 ‘그리지 않고도 그려낸’ 천재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편지〉가 목표로 한 것이 ‘우상=죽은 신’이었다면 요한은 그 반대를 그려내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요한과 그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인자 같은 이’의 정체가 무엇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그려진 어떤 것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는 일찍이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서 예언적으로 경고됐던 내용이다. 한국교회가 외경(外經, Apocrypha)이라 치부하며 읽지 않았던 그 책에 〈요한계시록〉이라는 ‘신비의 책’을 해석하는 열쇠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열쇠를 외면하면서 어찌 문을 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열쇠의 책 〈예레미야의 편지〉를 도외시한 것은 우리만은 아니었다. (덧붙이자면, 필자가 2011년 독일 가톨릭-개신교 공동주석시리즈인 EKK의 《요한계시록》 저자이자 필자의 은사인 부퍼탈 신학대학의 마틴 카러 교수에게 논문으로 제출하기 전까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요한계시록〉과 〈예레미야의 편지〉의 관련성을 발견하고 언급한 기독교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
필자는 마틴 카러 교수로부터 〈요한계시록〉과 〈예레미야의 편지〉의 상호 관련 가능성을 인정받은 이후, 역사 속에서 그 뒷받침을 해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주후 4세기 중엽 로마제국의 황실 천문학자이자 대 수학자인 종교담당 행정관 율리우스 피르미쿠스 마테르누스(Julius Firmicus Maternus)를 발견했다. 그는 로마의 다신교주의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전해지기로는 로마의 신화적 종교의 허구성을 인지하고 회심한 후 황제와 원로원을 움직여 로마의 신상들을 부수게 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 종교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 《이교(異敎)의 오류에 대하여》(De errore profanarum religionum)에서 위에 언급된 세 본문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예레미야의 편지〉의 ‘인자 같은 이’의 형상을 언급하며, 자신의 기독교 개종의 근거를 제시했다.


이로써 필자의 연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이자 종교계의 수장을 지낸 이가 설득될 수밖에 없었던 책으로서 〈요한계시록〉의 내적 에너지에 관한 심층 연구가 그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치밀한 성서신학적 배경을 지닌 〈요한계시록〉이 한국에선 온갖 사이비 종교가 자라나는 모판이 되어버렸기에 참으로 안타깝다. 권력과 명예를 위해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우상의 휘장을 들씌우고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는 이 땅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제국의 장관으로서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참된 신 그리스도께 전향했던 마테르누스로부터 많이 배우고 반성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독자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과연 어떤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정재훈
대한신학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 독일 뷔르츠부르크와 튀빙겐 대학교를 거쳐 부퍼탈 신학교를 졸업(Mag.Th)했다. 1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M.Div)하고 현재 용인 덕성교회에서 청년학생부를 지도하고 있다. 토요일 밤마다 대치교회 성서학당을 통해 요한문서들을 강해하고 탁상담화를 진행한다. 전공 논문은 〈요한계시록 인자 기독론〉이며, 현재는 ‘요한계시록’ ‘지혜’ ‘기독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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