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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평소처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한가한 동네 카페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 한국 뉴스를 잠깐 확인하는 게 하루를 여는 의례였기에, 그날도 평소처럼 인터넷 뉴스 포털을 열었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일을 시작하지 못했지요. 전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수백 명을 태운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했다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꽃처럼 어여쁘기만 할 나이의 학생들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밀려왔습니다.며칠 뒤 주일은 공교롭게도 부활절이었지요.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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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미국에 이민 가 살고 있던 선생님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제자들은 선생님을 환영하는 모임을 마련했고,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모임에 참석했던 제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선생님은 수시로 그 여름의 비극을 떠올린다. 제자의 죽음이 자신의 한국 방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이 사건으로 다른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염려하는 선생님은 중학생 시절부터 십몇 년 이어 오던
이한주의 책갈피
이한주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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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꽃이야, 햇살이야.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야.”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아기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 생애 첫 예배를 드릴 때, 다 함께 이 노래를 불러줍니다. 가만히 따라 부르면 아이의 웃음이 떠오르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노래입니다. 목사님 품에 안겨 멀뚱멀뚱하는 아기에게 교우들은 노래와 미소로 따뜻한 환영의 인사를 건넵니다.“너는 자유해, 널 기대해.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사랑해.”이 세상 모든 아이 한 명, 한 명이 자유롭고 귀하며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임은 당연합니다. 굳이 유엔 아동권리협약이나 법조문을 들추지 않아도
법의 길, 신앙의 길
권영실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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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트 드 프리스(Hent de Vries, 1958-)는 현재 뉴욕 대학교 폴렛 고다드 석좌교수직에 있으면서 종교학·독일어학·비교문학 교수 및 철학과 협력교수로 일하는 네덜란드 태생 철학자다. 레이던 대학교에서 유대학 및 헬레니즘 사상(신학), 공공재정 및 정치경제학(법학)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학교에서 《고요한 신학: 아도르노와 레비나스의 사유 형식의 현재성에 대하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것이 확장·개정되어 영어판 《최소신학: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에마뉘엘 레비나스에서 세속 이성 비판》으로 번역된 이후 아도르
우리 시대 종교 사상가들과의 만남
김동규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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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모세가 받았다는 십계명 여섯 번째 계명이다. 하ᄂᆞ님이 친히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몸에 이미 새겨져있는 계명이다. 사람들 사는 곳에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이 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살인은 꺼려지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쟁도, 시비를 가리는 다툼도, 아무리 선한 싸움도, 살인에 이르도록 치열해선 안 된다. 안타깝게도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편들다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 들통나자 광야로 도망쳤다. 명분 있고 우발적이었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적용되
봄봄
김영준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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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 맞은 잡지유 선생께. 편지 회답 늦어 미안합니다. 〈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은 것은 알겠지요. …— 1980년 8월 18일 유영빈 님에게 보낸 함석헌의 서신〈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 이후, 수사를 위임받은 전두환은 계엄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로 등극했다. 12·12 사태 이후 실질적인 ‘전두환 정부’가 펼쳐진 셈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월, 공문 한 장 없이 〈씨ᄋᆞᆯ의소리〉를 폐간시켰다.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등 170여 개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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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3일 오후, 원주 새동네교회 예배당에는 약 서른 명의 사람이 모였다. 미국 브루더호프 형제들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마련된 대화의 자리였다. 1920년 독일에서 시작한 브루더호프는 기독교 공동체로, 구성원들이 재산과 삶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우드크레스트(Woodcrest) 브루더호프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하인리쉬 아놀드(Heinrich Arnold)는 이번 방문이 한국 사회와 교회를 이해하고, 영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격려하며, 서로의 신앙 여정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브루더호프 통신
원마루·차에녹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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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전도사 132만 원, 전임 전도사 223만 원, 부목사 303만 원, 담임목사 406만 원. 목회데이터 연구소에서 7월 15일 발표한 ‘신대원생 생활과 사역 인식’ 조사에 나타난 이 숫자는 ‘희망 사례비’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전임 전도사, 부목사, 담임목사 사례비는 각각 65만 원, 78만 원, 102만 원 증가했지만, ‘희망’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요원한 상황이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신뢰운동본부는 ‘한국교회 신뢰회복 프로젝트’ 일환으로 목회자 소득 불평등 문제에 천착했다. 주요 교단 관계자들과 세미나를 진행하고 〈한국교
무브먼트 투게더
정민호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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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1. 복된 좋은 운수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표준국어대사전)내 인생의 첫 이메일 계정은 초등학교 3학년 컴퓨터 수업 숙제 덕분에 생겼다. 알림장만 보고도 내 모든 일과와 숙제를 꿰고 있던 엄마의 도움을 받아…. 아이디를 만들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감격의 순간 ‘받은메일함’에 메일 한 통이 들어와있었다. 발신인은 엄마였다.“(제목 없음)민호야, 아이디 만든 거 축하해. 엄마가 살아보니까 학교 다니던 그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니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하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이승은·정민호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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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예수님은 옷이 없대?”한때 청어람 메일링에도 썼고, 지인들에게 나불나불 말하고 다녀서 민망한 감이 있지만, 우리고 또 우려도 웃음을 짓게 되는 질문을 소개합니다. 엄마를 따라 예배에 참석했던 어린이는 갸우뚱하며 엄마에게 저렇게 물었답니다. 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하던 찰나, 교회 안을 가득히 메운 찬양의 후렴은 이랬습니다.‘아멘 주 예수여 옷이 없어서!’우리 예수님께 어떤 속사정이 있었길래 옷이 없었을까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는 어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가끔 이 찬양을 접할 때면, 어린이의 복잡했을 심경이
내가 매월 기쁘게
배한나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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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쩐 일인지 수많은 결혼식(!)에 가볼 수 있었습니다. 보통 결혼식은 맛있는 음식 유무로 기억된다죠? 워낙 많이 다녀서일까요. 기억에 남는 음식은 딱히 없고, 기억에 깊게 남은 주례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에 남은 ‘주제 성구’랄까요. 매우 강렬했던 탓에 누구의 결혼식이었는지, 누가 주례였는지, 순간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으레 일어날 법한 사고이기도 했습니다. 순서지에 ‘요한일서’ 말씀으로 나와야 했던 주제 말씀이 ‘요한복음’으로 잘못 인쇄되었거든요. 요한일서 4:18 말씀은 이렇습니다.사랑
내가 매월 기쁘게
배한나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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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유정은 경술국치에서 일제강점으로 이어지는 193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다. 〈봄봄〉·〈동백꽃〉 같은 해학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 시대의 비애를 담은 작품을 더 많이 썼다. 스물일곱이던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등단작 〈소낙비〉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다(《동백꽃-김유정 단편선》 수록). 이 소설은 거듭되는 흉작으로 빚을 지고 고향을 떠난 춘호 부부 이야기다. 그들은 야반도주해 어느 산골 마을에 정착했지만 떠돌이에게 소작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점점 더 궁핍해진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밑천이
이한주의 책갈피
이한주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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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다정한 글방 ‘희영수’에서 글벗들이 함께 읽고 전해준 의견을 반영하여 최종 완성한 글입니다.‘살아남을 수 있을까.’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치고 독립을 선언했지만, 개업을 준비하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망할까 봐 걱정한 것은 아니다(사실 아주 조금은 했다). 사무실 운영에 치여 평소라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을 사건도 맡게 되는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노동을 통한 밥벌이라는 명분도 충분하니까. 노동조합 법률원에 소속되어있던 8년과 국회·환경단체에서 보낸 시기까지 10년이 넘는 변호사 생활을 통틀어 한 가지 공통점을 꼽자
법의 길, 신앙의 길
박다혜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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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한 구절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에게 이 말씀은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닻이었고,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바로 시편 30:5입니다.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이 말씀은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고백이자, 제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늘 붙들었던 빛이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돌이켜보면 어릴 적 제 삶은 말 그대로 ‘울음이 깃들인 저녁’ 같았습니다. 막막하고
내 인생의 한 구절
김무경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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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때 못 나오는 잡지1970년 4월 〈씨ᄋᆞᆯ의소리〉가 세상에 나왔다. “신문이 씨ᄋᆞᆯ에게 씨ᄋᆞᆯ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씨ᄋᆞᆯ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한다”는 이유가 창간 동력이었다. 매월 발간을 목표로 삼았다. 잡지는 두 호를 내고 폐간된다. 정부가 잡은 트집은 ‘인쇄소 문제’였다.벌써 신문으로 알겠지만 잡지 발행 등록 취소 통지가 나와서 싸우고 있는 중이요. 본래 헌법에 정기 간행물을 내려면 일정한 인쇄소와 계약을 해서 그 서류를 첨부하게 되어 있소. 그래서 어떤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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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동물기를 연재하며 인간과 함께 살아온 동물 친구들 이야기를 다뤘다. 그런데 인간 곁에 더 가까이, 그러나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이 있다. 비록 살과 피를 가진 진짜 생명은 아니지만, 상상 속에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수천 년간 함께해온 미지의 존재들이다.지난여름, 부여로 가족 여행을 가서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났다. 이전에는 교과서에서 읽은 대로 ‘금으로 만든 불교 유물’ 정도로만 알았다. 다시 마주한 향로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향로에서 수많은 동물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백제
구선우의 동물기
구선우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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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줌. (표준국어대사전)생각해보면 일련의 사건으로 끊어진 인연들은 죄다 가장 가까웠던 이들이다. 한때 단짝이었던 친구, 사랑했던 애인…. 반대로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어떤 단절의 순간 없이, 그저 서서히 멀어지기 마련이었다.왜 가장 가까웠던 이들하고만 단절을 경험하게 되었을까. 거리 조절에 실패한 탓이리라. 누구에게나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일부 사람들은 내 못난 모습을 감당해줄 수 없었을 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오래오래 잘 지냈다면 좋았을 것을.내 실수로 그렇
내향인의 마음 탐구 생활
이승은·정민호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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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원미동에는 지하 1층에서 운영하는 숨겨진 보석 같은 서점이 있다. 용서점. 소설가 양귀자가 쓴 스테디셀러 《원미동 사람들》 배경지인 ‘원미동 사람들 거리’(구 원미동 71번지, 현 부천로136번길 27) 바로 근처로, 서점이 입점해있는 곳은 원미구청 맞은편 건물들 중 하나다. 건물 근처로 가면 ‘책방 모임, 꾸준히 쌓아가는 글쓰기 모임들’ ‘책방 OPEN’이라는 작은 피켓이 보인다. ‘노래연습장 지하 1층’이라는 커다란 문구에 속지 않고, 그곳에 서점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한 층 내려가면 용서점이 나온다. 용서점에는 빈티
책방은 열린 문
장진경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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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왕상 19:11-12, 새번역)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레스 이스 모어’(less is more), 적을수록 좋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습니다. 건축에서 모든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기능에 따른 최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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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습니다. ‘웃기고 앉아있네’는 왜 하필 ‘앉아있네’일까. ‘놀고 자빠졌네’는 왜 ‘자빠졌다’로 끝날까…. 웃기고 서있거나, 웃기고 누울 수 있지 않나요! 왜 이렇게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 주는 환기가 있다는 변명을 하고 싶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작은 구멍을 뚫어준달까요.혹시 잠시 수긍하지 않으셨나요. ‘웃기고 누운 게 훨씬 좋겠네!’라고 말이죠.‘바흐/바하 구분법’도 환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바하핰.사실 각 잡고 재밌는 글을 쓰려니 살짝
내가 매월 기쁘게
배한나
418호 (2025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