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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부터 일관되게 김교신 연구에 천착하여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을 포함한 연구 논문을 20편 이상 저술하고, 평전도 쓴 바 있는 전인수 강서대 교수는 《김교신 평전: 세속성자, 일상에서 영원을 일구다》(서로북스, 2024)라는 제목의 김교신 전기를 펴냈다. 12년 전에 펴낸 평전 《김교신: 조선을 성서 위에》(삼원서원)를 저본으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대폭 수정해서 다시 썼다. 저자 전인수 교수가 필자에게 추천사를 요청했다. 김교신에 대해 전문적 식견이 없는 필자가 추천자로서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언젠가는 김교신을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17호 (202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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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하면서부터 노골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신사참배는 당대 조선인뿐 아니라 이후를 살아가는 한국 기독교인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한국 기독교인 대부분은 신사참배 강요 초기에 이를 십계명(제1계명과 제2계명)을 위반하는 우상숭배로 간주하며 거부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더 폭력적이고 제도화되자, 한국 기독교 모든 집단 중 가장 마지막까지 버티며 마지노선을 구축했던 조선장로회 총회도 결국 1938년 가을 총회를 기점으로 굴복했다. 일본 제국은 신사참배가 십계명의 제1-2계명을 어기는 우상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15호 (202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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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19일,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목회자 중 하나로, 20세기 한국 역사 거의 전부를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살아낸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 1902-2000)이 사망했다. 그는 해방 직후 1945년 겨울에 월남하여 남산 근교에 영락교회(당시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한 후, 1973년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될 때까지 28년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며 이 교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이끌었다. 은퇴한 후에는 25년가량 남한산성의 작은 집에서, 그의 인격과 삶을 대표하는 단어로 널리 알려진 ‘청빈’과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13호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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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1901-1987)과 박형룡(1897-1978)은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기독교, 특히 장로교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을 각각 대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1880년대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로 시작된 한국 장로교회는 희년을 맞이한 1930년대 이전까지 신학과 사상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주로 영어권 출신 서양 선교사들이 평양신학교에서 전수한 단색의 전통 신학이 별 긴장이나 갈등 없이 정통이자 유일한 진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에 2세대 지성적 신학생이 일본·미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11호 (202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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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과 21장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친구 빌립을 통해 예수를 처음 만났다. 빌립이 예수를 모세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 메시아라고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처음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을 만난 예수가 그에게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하자,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열두제자 명단에 항상 빌립과 함께 등장하는 바돌로매가 아마도 나다나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나다나엘은 순전, 진실, 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박윤선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09호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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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산, 침식, 그림자박형룡(1897-1978)은 거대한 산과 같은 존재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양대 축을 이루는 한국 장로교에서 독보적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존재였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27년부터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문을 닫은 1938년까지 그의 신학은 한국 장로교에서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1938년부터 해방 후 1947년까지는 후(後)평양신학교를 이끈 채필근, 조선신학교를 주도한 김재준과 송창근이 한국 장로교 신학계를 일시 지배했다. 그러나 박형룡이 1947년에 귀국해서 출옥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07호 (202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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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서사: “그 빛 속의 작은 생명”이 걸은 “승리의 길”김활란(金活蘭)은 1899년에 태어나 1970년에 사망할 때까지 70여 년을 살면서, 20세기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기간을 한국 교육계와 여성계,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저명인사로 활약했다. 한국에서 처음 세워진 여자대학의 최장기(22년 5개월) 교장(학장/총장)직을 역임한 그는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단체인 YWCA와 근우회 창립자 중 하나였고, 3·1운동 참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농촌운동, 여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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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
405호 (202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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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는 해방 이전 한국에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교세를 자랑한 개신교 교단이었다. 세 교단은 흔히 머리글자를 따서 ‘장감성’으로 지칭되었다. 1950년대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순복음교회 등으로 인해, 현재는 이전과 같이 3대 교단 안에 드는 위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는 2년 전 설문 조사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사 500명과 장로 500명 중 절반 이상인 51.9%가 성결교단이 더 이상 한국 개신교회의 3대 교단이 아니라고 응답했다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1) 그러나 해방 전 성결교의 위상은 높았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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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근
403호 (202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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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3월 12일 현재, 전국 주요 극장에는 이승만(李承晚, 1875-1965) 대통령을 재평가하자는 의도로 김덕영이 감독한 역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 대한민국의 탄생, 그 비밀의 문이 열립니다〉가 상영되고 있다. 2월 1일에 개봉한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필름으로는 이례적이게도, 개봉 한 달 정도 지난 3월 11일 기준으로 누적 관객 수가 114만 명(1,144,477명)을 넘었다. 이 기록은 현재 2017년 5월 25일에 상영을 시작하여 약 7개월이 지난 12월 15일에 최종 관객 수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401호 (202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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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梁柱三, 1879-1950?)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호는 백사당(白沙堂)이다. 양주삼은 “한국 최초의 신학자”(유동식)1) “한국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최재건)2)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린다. 미국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 신학 유학생이었으며, 감리교 신학교인 협성신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였다. 한국 첫 신학 잡지 〈신학세계〉를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서학, 기독론 등을 주제로 다루는 글을 발표했다.양주삼에게 신학자로서의 재능보다 더 두드러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399호 (202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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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기 사이, 500년 조선왕조가 마지막 비명을 내지르던 시기에 태어나서, 망국과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의 모든 시기를 오롯이 경험하며 살아낸 대표적인 기독 지식인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한국인으로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외(일본·중국·미국)로 유학하여 근대 학문과 선진사회를 경험한 탁월한 국제인이었다. 또한 미국 남부를 가장 먼저 경험한 한국인,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첫 한국인 기독교인으로서 해외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가장 먼저 공부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그는 독립협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397호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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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 100년간 한국기독교를 만든 12인의 증인들필자는 2018년 6월부터 3년간 온라인 신문 〈뉴스앤조이〉에 20세기에 기독교가 전 세계의 종교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인물 20명을 다루는 글을 연재했다. 이 연재물은 2022년 11월에 《20세기, 세계, 기독교: 지난 100년간 세계기독교를 만든 21명의 증인들》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외양이 바뀐 채 출간되었다. 연재를 진행하던 시기에도 가끔씩 그런 물음을 던지는 이들이 있었지만, 단행본이 출간된 직후부터 내내 후속작에 관한 질문이나 제안이 이어졌다. 20세기 ‘세계
20세기, 한국, 기독교
이재근
395호 (202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