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제야 산을 오른다. 단풍이 절정일 때는 바쁜 일에 쫓기다가, 끝물 단풍이라도 보겠다며 길을 나섰을 때는 이미 겨울의 문턱이다.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고 바닥에 쌓인 잎은 발목까지 덮는다. 등산 코스는 초반부터 가파른 절벽이다. 직립보행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두 손과 두 발을 다 써서 바윗길을 올라간다. 사람 키 높이인 낮은 절벽에 짧은 나무 사다리가 걸쳐있다. 가뿐하게 올라가 숲길을 걷는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간밤에 얼었던 계곡에는 아직도 얼음이 남아있다. 다시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번에는 끝이 하늘과 닿은 듯한
연재모음
이성희
397호 (2023년 12월호)
-
₩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이들을 만나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고 마음을 공유하며 때로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연애와 결혼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그런 과정이 ‘나’라는 개인을 성장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이 과정에선 누구나 똑같은 기회, 동등한 자격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런 공식을 반드시 준수하지는 않습니다. 평등과 불평등, 부(富)와 빈(貧) 등 여러 갈래로 나뉘는 시선의 경계에는 언제나 이에 대한 불만이 표출됩니다.한때 캐나다 밴쿠버에서 시간을
연재모음
이동기
396호 (2023년 11월호)
-
₩
‘잎눈이 검은 걸 보니 안개나무가 맞구나.’ 코끝이 알싸한 겨울 아침, 뒷마당 나무를 살피다가 잎이 다 떨어진 관목에 눈길이 갔다. 집 근처 수목원에서 해마다 열리는 식물 장터에서 데려온 나무다. 유럽안개나무(Cotinus coggygria)를 개량한 품종으로 몽글몽글 피어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꽃과 짙은 자색의 고혹적인 잎사귀가 매력적인 수종이다. 이 나무를 보니 4년 전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열린 전국 대학생 조경 대회에 참가했던 때가 떠오른다. 나는 ‘나무 이름 알아맞히기’(Woody Plant Material Iden
연재모음
이성희
396호 (2023년 11월호)
-
₩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포스터의 안온한 분위기에 속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당황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테고요. 겉모습은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라는 소년의 낭만적인 성장 이야기 같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망설이게 됩니다. 저는 아메드의 성장담이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물론 그 성장이 우리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긴 하지만요.웬만한 성인 여성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자랐지만 갑작스러운 성장이 몸에 익지 않은 듯 걸음걸이가 어설픈 아메드는 독실한 무
연재모음
이정식
395호 (2023년 10월호)
-
₩
가을이 오면 국화 전시 준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동안 가꿔온 수백 본의 국화들 수형을 잡아주고, 꽃봉오리가 최대한 많이 생기도록 마지막 순치기를 한다. 최근 정원 트렌드에 비하면 다소 고전적이지만 국화는 여전히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 하나다. 뉴욕식물원 국화 전시의 역사는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임스 헤스터 뉴욕식물원장은 일본 황실 소유의 신주쿠 교엔 국민정원(新宿御苑 国民公園)의 국화 전시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마침 뉴욕식물원의 2년제 원예 전문가 과정(School of Professional Ho
연재모음
이성희
395호 (2023년 10월호)
-
제4회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둘째 날 저녁 9시경 에무시네마 2관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방금 막 상영이 끝난 영화의 여운과 강렬한 인상에 휩싸여 열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공공주택 정책부터 철거될 주택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이야기, 가로와 세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직선 이미지와 이를 뚫고 나오는 빛줄기, 마지막 장면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까지. 다양한 화제를 꺼내 놓았습니다. 관객들과 진행한 그날의 씨네토크는 영화를 보고 매료된 것 이상으로 황홀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상영작은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이 공동
연재모음
박일아
394호 (2023년 09월호)
-
₩
나는 뉴욕 주립대 지역 캠퍼스에서 식물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의 식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영어로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에 많이 긴장했었다. 첫 학기 나무 수업에서 150여 종의 나무 학명을 외우고 실물 앞에서 식별하는 시험까지 마치고 나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학생들도 본토 식물을 잘 알지 못했고, 라틴어로 학명을 외우는 데는 나와 같은 출발선에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자연과 생태에 대한 막연한 관심과 동경의 선을 넘어서 개별 식물들 이름과 계통, 고유한 성질을 알아가는 동안 어떤 목마름이 해갈되는 느
연재모음
이성희
394호 (2023년 09월호)
-
₩
취임 1년이 넘어가는 와중에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 여러 논란을 빚고 있다. 북한은 윤 정부의 대북 정책인 ‘담대한 구상’이 지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의 재탕이라며 지극히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고,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전면 중단 상태이며, 북의 미사일 발사가 이어지고, 남북 간에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통신망도 작동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은 임기 1년간 만난 국가 정상이 미국과 일본밖에 없을 정도로, 편중된 외교를 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연재모음
이인엽
393호 (2023년 08월호)
-
사람들은 피서를 여가 활동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정원사도 사람이니 무더위와 장마를 달가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식물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직업을 갖고 이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흙투성이와 땀범벅이 되어 하루 업무를 마치고도, 내가 맡지 않은 다른 정원 모습이 궁금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방식으로 여름을 보낸다. 어떤 정원은 여름이 힘겹다. 그러나 자연을 닮은 이 정원은 여름을 이용하고, 즐기고, 이긴다. 정원은 한여름의 햇빛과 폭우와 바람이 자연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하는 공간이다. 여름을 살아내는 식물들 모습에서 ‘참 아름다워
연재모음
이성희
393호 (2023년 08월호)
-
₩
훌륭한 영화를 만나다모기영에는 세 명의 프로그래머가 있습니다. 일명 ‘삼프로’라고 부르는데요. 저희 역할은 상영작을 선정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일입니다. 평소 삼프로들은 기관의 연구원으로, 타 영화제 전문위원으로, 인기 절정 일타강사(!)로 각자의 영역을 살아가며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영화를 찾아봅니다. 그러다 상영작으로 적절해 보이는 작품을 만나면 대화창에 정보를 공유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삼프로의 영화적 취향과 관람 포인트는 놀라울 정도로 제각각입니다. 이 말인즉슨, 까다로운 셋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는 영화여야만 비로소
연재모음
장다나
393호 (2023년 08월호)
-
필자는 본지를 통해 ‘칼을 의지하는 ‘제국의 평화’를 거부하라’(2016년 9월호), ‘국가 공동체의 두 기둥은 정의와 사랑이란다’(2016년 12월호), ‘‘촛불’은 권력에 취한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싸움이란다’(2017년 1월호), ‘죄를 벌하지 않는 공동체는 망한다’(2017년 4월호), ‘코로나19 사태와 문명에 대한 성찰’(2020년 4월호) 등 성경으로 사회 전반을 통찰하여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글을 써왔다. 이번이 여섯 번째 편지이다. — 편집자 주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 편지를 쓴 후로
연재모음
전성은
392호 (2023년 07월호)
-
₩
용기를 지지하는 용기바닷가 작은 마을에 사는 플로렌스 그린(에밀리 모티머)은 16년 전 전쟁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남편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간직한 채 책을 읽고 책에서 얻은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며 산책하는 것이 플로렌스에게는 가장 즐거운 일이었는데요. 여느 때처럼 바닷가에 앉아 사색하던 플로렌스는 문득 이곳에 책방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는 은둔 신사 에드먼드 브런디쉬(빌 나이)밖에 없는 어촌이었는데 말이지요.어부 레이븐(마이클 피츠제럴드)은 플로렌스에게 용감하다고 했어요. 먹고살기 바빠 책 따위 관심 없다
연재모음
최은
392호 (2023년 07월호)
-
₩
한여름은 식물원의 비수기다. 후끈 달아오른 콘크리트블록을 걸으며 온통 초록으로 덮인 정원을 바라보는 일은 고역에 가깝다. 이런 날은 식물들도 생기가 없고 축 처지기 일쑤다. 작고 여린 식물들에게 7-8월의 폭염은 큰 시련이다. 정원사들에게도 여름이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물 주기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식물과 토양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퇴근 후에도 대여섯 시간은 해가 떠있기 때문에, 일과를 마치기 전 호스를 들고 담당 구역을 한 번 더 점검하는 일 역시 빼놓을 수 없다.뉴욕식물원에서는 난(蘭) 축제가 끝나고
연재모음
이성희
392호 (2023년 07월호)
-
₩
백만 송이 수선화로 시작된 봄날의 꽃 잔치는 진달래, 철쭉, 만병초가 가득한 아젤리아 가든(Azalea Garden)으로 이어지고, 그 꽃들이 시들해질 즈음에는 벚꽃 계곡(Cherry Valley)에 줄지어 선 백 년생 벚나무들이 화사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봄비에 떨어진 벚꽃 잎이 소복하게 계곡을 덮을 때면, 라일락 컬렉션(Lilac Collection)에서는 수백 그루의 라일락 꽃나무들이 진한 향기로 온 정원을 사로잡는다. 숨 가쁘게 이어져 온 꽃 잔치의 절정은 단연 6월의 장미. 그늘 한 점 없는 장미 정원
연재모음
이성희
391호 (2023년 06월호)
-
₩
학생들을 만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의 눈빛에서는 이런 질문과 대답이 흘러나옵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가요?” “이번에도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이야기겠죠.” 저는 평소 사람들에게 ‘영화는 쉬워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시각과 청각을 적절히 이용하는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인 매체이지만, 화면과 소리가 관객과 제대로 된 소통을 나누지 못한다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영화는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를 담아내야 합니
연재모음
이동기
391호 (2023년 06월호)
-
₩
왜 책임지지 않을까“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공자의 경구 ‘군군신신’(君君臣臣)이라는 말처럼 유교 이념에 기초한 조선 사회는 ‘군신’(君臣), 즉 왕과 신하에게 백성을 영도하고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책임을 부여했다. 따라서 그들은 바른 사상을 연마하고 도덕을 실천하여 군자(君子)의 인간상을 표징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이는 스스로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 고려는 물론 조선에서도 온 땅에 가뭄이 들면 왕은 목욕재계하고 허술한 초가로 거처를 옮겨 식음을 전폐했고, 자신의 부덕함과 실정을 책
연재모음
홍이표
390호 (2023년 05월호)
-
₩
겨우내 텅 비었던 수선화 언덕이 진초록 새싹들로 가득하다. 며칠 안으로 이곳은 ‘백만 송이 수선화’라는 팻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꽃들로 가득 덮일 것이다. 소나무 껍질을 곱게 갈아 만든 멀칭으로 말끔하게 덮인 숲 가장자리 화단은 설강화와 헬레보루스, 히아신스가 만개했다. 이른 봄을 깨우는 복수초와 크로커스, 바람꽃 종류와 더불어 새봄의 환희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이 꽃들은 모두 알뿌리, 즉 구근식물이다. 이 식물들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실라(Scilla)라는 꽃이 있다. 백합과(科) 무릇속(屬)에 속한 식물인데, 이맘때면 식물원
연재모음
이성희
390호 (2023년 05월호)
-
₩
치기 어린 마음이었을 겁니다. 막 가석방된 다니엘(바르토시 비엘레니아)이 자신을 ‘신부’라고 소개한 까닭 말이죠. 다니엘은 소년원을 나와 목공소로 복역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어떤 남자와 마주칩니다. 소년원에서 나왔냐며 너 같은 애들은 다 티가 난다는 무례한 말을 듣습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고 들어간 성당에서 만난 비슷한 나이의 엘리자(엘리자 리쳄벨)도 그에게 목공소에서 왔냐고 묻죠. 다니엘은 아니라고 우겨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보다 어디로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을 돌리죠. 행색과 외모에서 전과자 티가 나는
연재모음
박일아
390호 (2023년 05월호)
-
₩
봄이다. 복수초, 설강화, 풍년화…. 눈이 녹기 전부터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에 이어서 본격적인 꽃 잔치가 열릴 참이다. 바깥 정원은 이제 시작이지만 사람들 마음속 정원에는 이미 기화요초가 만개했다. 내면의 정원을 바깥 세상에 구현하고픈 동기가 가장 왕성한 계절이다. 꽃집은 이맘때 제일 붐빈다.봄은 정원사들에게도 당연히 바쁜 계절이지만, 특별히 봄이라서 더 그런 것은 아니다. 식물원 각 부서마다 차이는 있지만, 꽃의 향연이 저무는 가을 무렵에 각종 전시 준비로 더 바빠진다. 9월 말부터 식물원 방문객은 급격히 줄어드는데, 이때를 맞춰
연재모음
이성희
389호 (2023년 04월호)
-
₩
‘이상한’ 영화를 읽어내는 결정적 열쇠영화를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영화가 건네는 섬광 같은 진심을 기다리는 관객으로서, 누군가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이 있다면?’ 하고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엔딩 크레딧이 뜨는 찰나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 순간은 두어 시간 동안 나를 향해 무수히 쏟아지던 은유와 셀 수 없는 장치들이 파도에 휩쓸려가듯 천천히 귀결될 때, 소강될 무렵 직관적으로 마음에 쾅 찍히는 어떤 ‘감정’이 등장하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저는 이 감정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롯이 나와 그 영화를 내
연재모음
장다나
389호 (2023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