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큰 답(이 답은 실은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우리를 무가치해 보이게 만드는 답이다)에 다다르기를 열망해야 하며, 그럴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답은 우리 자신의 갈망, 분투, 내적 노력으로는 거둘 수 없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대답이다.이는 그가 우리의 영원한 질문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어떻게 그를 없애야 뒤탈이 없을까?’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고민하고 있다. 예수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그분의 광채를 보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뜻으로 그 말을 이해해왔다. 내 친구는 그분의 슬픔을 알고 나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의미일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분의 슬픔은 곧 그분의 광채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예수는 오지 않았다. 나사로의 상태를 진즉 전달했지만, 예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부러 시간을 지체했다. 그에게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예수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사로의 몸에 온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까지 그
거짓말하는 습관은 사람의 영혼에 사형을 가하는 것과 같은 해를 입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거짓말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사람이 저지른 첫 번째 죄는 속임수의 결과였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내린 명령은 금지된 실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와는 그것을 만지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도 역사를 통하여 거짓말은 온갖 잔혹과 유언비어 사기극의 어머니가 되어왔고, 살인과 전쟁의 전주곡이 되었다. 남에게 아픔을 가하는 잔혹한 행위, 남의 고통과 절망을 모른 척하거나 나아가서 즐기는 행위 모두
(하나님을 믿느냐는 물음을 받을 때)열 번 가운데서 적어도 다섯 번은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아니다’가 ‘예’만큼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아니다’라는 대답은 그 사람이 인간임을 입증합니다.인간이라면 당연하게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 대답이 정말 ‘예’라면,그것은 고백과 눈물 그리고 커다란 웃음으로 목이 메는 그런 ‘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레드릭 비크너그리스도교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바는 ‘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아니오’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어렸을 때부터 교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