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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표어 ‘온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는 그가 회심한 후 1739년 3월 28일에 쓴 편지에 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복음을 즐겨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바른 일이며, 또 나의 고귀한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는 듯 순회 설교자로 살았다. 평생 약 25만 마일(40만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7호 (202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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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도자, 사회운동가, 교회 개혁자, 부흥사, 신학자, 이 모든 호칭에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감리교 창설자라 불리는 존 웨슬리(1703-1791)이다. 존은 1703년 영국 랭커셔주에 속한 엡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십구 남매 중 열다섯째로 태어났다.〔그림1〕은 웨슬리가 태어난 생가이다. 꼭대기 다락방을 포함하여 3층으로 이뤄졌다. 지금은 존 웨슬리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이곳 ‘옛 목사관’(Old Rectory)에서 존은 부모와 많은 형제자매와 더불어 왁자지껄 생활했다. 이곳을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6호 (2023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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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10·29 참사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놓은 꽃다발이 쌓여있다.
광장에 서다
정민호
385호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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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슈페너로부터 시작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니콜라우스 친첸도르프 백작이 계승했다. 친첸도르프는 슈페너가 죽기 5년 전 1700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외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는 슈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자국어 성경 번역을 추진하고, 소녀들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와 사회의 개혁에 힘을 쏟았다. 슈페너가 친첸도르프의 대부가 된 것도 외할머니 덕분이었다.친첸도르프는 어린 시절 경건주의 요람이었던 할레(Halle)에서 아우구스트 프랑케로부터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5호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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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으로 말씀에 충실한 신앙, 복음에 기초한 교회를 세우고자 몸부림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순수한 신앙은 점차 화석화된 교리로, 개혁의 열정은 광신으로 변해갔다. 내가 믿는 신앙만이 바른 정통이라는 고집불통은 결국 종교전쟁이라는 재앙을 낳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조차도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되고 말았다. 이때 제2의 종교개혁을 표방하며 나선 인물이 필립 슈페너(1635-1705)이다. 흔히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에서 새로운 종교개혁 혹은 16세기에 시작되었다가 교리적 정통주의로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4호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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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육되어온 곰들은 죽은 이후에야 철창을 나갈 수 있다. 이들은 야생에서 자력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고, 외래종이라서 생태계 교란 가능성 때문에 방생할 수도 없다.― 46쪽, 민간 최초 ‘사육곰 생츄어리 건립’을 준비하다(커버스토리_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최태규 대표 인터뷰)
광장에 서다
복음과상황
383호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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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오랜 세월 망명자로 살았다. 녹스는 1547년부터 프랑스 갤리선 노예로 있다가 1549년에 풀려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에드워드 6세 치하 잉글랜드의 버릭어폰트위드, 뉴캐슬어폰타인 같은 도시에서 목회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조차 로마 가톨릭 군주 메리 튜더가 여왕 자리에 오르자 녹스는 또다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554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피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배 형식과 예전을 둘러싸고 갈등이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3호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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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녹스(c.1513-1572)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로 흔히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린다. 1560년 녹스와 다섯 명의 동료는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장로교회 정치 원리를 표명한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스코틀랜드는 최초의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유럽 개혁교회 전통이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 전통으로 이어져 꽃피게 되었다.〔그림1〕은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인 뉴칼리지 교정에 있는 녹스 동상이다. 왼손으로 쥔 성경을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는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2호 (202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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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은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 생 피에르 교회다. 1538년 4월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이 3년 7개월 만인 1541년 9월에 생 피에르 교회 목회자로 귀환했다. 칼뱅은 이때부터 1564년 5월 27일 숨을 거둘 때까지 23년 동안 제네바의 목회자·개혁자·교육자로 살았다. 2년 남짓한 제네바 1차 사역(1536-1538)까지 합치면 25년간 제네바에서 사역한 셈이다. 이로써 제네바는 칼뱅의 도시가 되었고, 칼뱅은 제네바의 영혼이 되었다.정면이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빼닮은 생 피에르 교회는 이름 그대로 ‘성 베드로’를 기념하는 교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1호 (202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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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1509-1564)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았지만, 정작 사역자로 쓰임 받은 곳은 스위스 제네바였다. 〔그림1〕은 프랑스 누아용(noyon)에 있는 칼뱅 생가이다. 칼뱅은 14세 때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누아용에 살면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현재 칼뱅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프랑스 개신교 역사협회 소유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 집을 예전 그림과 판화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다시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고, 1983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을 한 것이다. 출입구 옆에 ‘칼뱅 박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0호 (202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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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그로스뮌스터(대성당) 가까이에 바서 교회(Wasserkirche)가 있다. 〔그림1〕은 1885년 교회 앞에 세워진 츠빙글리 동상이다. 이 동상은 오른손에 든 성경을 가슴에 대고, 왼손에 쥔 칼로 땅을 짚고 서있다. 동상 아래에는 로마숫자로 그가 1484년 1월 1일 출생하여 1531년 10월 11일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동상은 츠빙글리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1884년에 계획하여 이듬해 공개되었다. 제막식에 참석했던 교회사학자 필립 샤프는 이 동상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음을 전해준다. 동상 건립위원회의 중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9호 (202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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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는 루터와 함께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이끈 쌍두마차 중 한 사람이다. 루터로부터 루터교회가 출발했다면, 츠빙글리로부터는 개혁교회가 시작되었다. ‘개혁교회의 아버지’ 츠빙글리는 1484년 스위스 장크트갈렌주에 속한 토겐부르크 지방의 빌트하우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베른·빈·바젤에서 수학하였다. 1506년 바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해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로 서품되었다. 글라루스(1506-1516)와 아인지델른(1516-1518)에서 12년 동안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러다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8호 (202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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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는 공식 명칭에 루터 이름이 들어간 두 도시가 있다. 루터가 태어난 고향 아이슬레벤(Lutherstadt Eisleben)과 그가 종교개혁을 펼치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로, ‘루터의 도시’라는 명칭이 붙어있다. 특히 비텐베르크는 루터 종교개혁의 요람이자 심장이다. 루터가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과 성경을 가르쳤던 옛 비텐베르크 대학교, 지금은 종교개혁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루터 하우스, 파문을 위협하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던 루터의 참나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 논제’를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7호 (202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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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아픔의 목록들을 짚어가며 열람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만 같아 민망한 계절입니다.”―142쪽 ‘무수한 감점으로 다시 피는 봄’(그림책으로 우리의 안부를, 김주련)
광장에 서다
이예은
377호 (2022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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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교회 개혁자 얀 후스가 설교했던 베들레헴 채플에 의미심장한 그림이 걸려있다. 그림을 보면 위쪽에 존 위클리프가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키고 있고, 중간에 후스가 초를 켜고 있으며 아래쪽에 마르틴 루터가 횃불을 들고 있다. 이는 위클리프의 개혁 정신이 후스를 거치며 확산하고 루터에 이르러서 마침내 환하게 세상을 비추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때가 차매” 일어난 교회 개혁을 염원하는 외침이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횃불이었다.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난 루터는 아이제나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6호 (2022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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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의 생애 마지막 장면을 보고 싶다면 스위스 국경과 맞닿아있는 독일 남부 도시 콘스탄츠를 방문해야 한다. 후스를 재판했던 로마 가톨릭의 교회회의가 열렸던 장소, 후스가 감금되어있던 곳, 후스가 화형당한 곳에 세워진 기념석 등에서 후스의 당당한 외침과 의연한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후스의 개혁운동이 점차 확산되자 로마가톨릭교회는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콘스탄츠공의회로 그를 소환하였다. 교황과 황제가 후스의 목숨은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 앞에 나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후스는 진리를 증언할 기회를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5호 (2022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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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는 체코의 개혁자 얀 후스(c.1371-1415)를 기념하는 동상이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림1〕의 후스는 루터보다 한 세기 먼저 태어나 로마가톨릭교회에 개혁을 요구하다 화형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공부를 했고, 이후 프라하 대학 신학부 학장으로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후스는 일찍이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 불리는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c.1320s-1384)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 로마가톨릭교회가 근본으로부터 개혁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후스는 주저인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4호 (202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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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발도의 정신을 따른 발도파는, 자국어로 성서를 번역하여 가르치고 자발적 가난을 실천한다는 이유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에 의해 정죄당하고 쫓기는 이단자로 살아야만 했다. 1215년 이단으로 정죄된 후 8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한겨울 폭풍 한설을 견디고 핀 꽃처럼, 모진 박해 속에서 지킨 믿음이었다.이탈리아 피에몬테주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 토레 펠리체는 발도파가 신앙을 지키고자 몸을 피한 은신처였다. 피에몬테의 주도인 토리노에서 남서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조용한 산악 지대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2호 (202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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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발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다. 종교개혁의 주창자 루터보다 350년 앞서, ‘종교개혁의 새벽별’ 위클리프보다 200년 앞서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 개혁을 요구하고 ‘오직 성서’라는 원리를 확립한 인물이다. 로마가톨릭의 교권이 절정에 달했던 12세기, 프랑스 리옹 출신인 발도는 맘몬에 사로잡힌 교회를 비판하면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림 없이 하나님 편을 택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빈자에게 나누어주며 제자도의 모습을 보여줬고,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생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71호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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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축복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단 재판에서 정직 2년을 받은 이동환 목사와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6월 21일 감리회본부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이동환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광장에서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이동환 목사는 정직 2년을 받고 항소를 제기한 지 8개월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던 재판을 진행해달라고 촉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천막 농성 19일 차였던 7월 9일, 감리회 총회재판위원회는 상소를 ‘각하’하기로 했다. 재판위는 이동환 목사가 상소 기한인 ‘1심 판결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재판비용을 납부
광장에 서다
정민호
369호 (2021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