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
이예은
420호 (2025년 11월호)
-
월간 ○○
이예은
419호 (2025년 10월호)
-
월간 ○○
이예은
418호 (2025년 09월호)
-
월간 ○○
이예은
417호 (2025년 08월호)
-
월간 ○○
이예은
416호 (2025년 07월호)
-
월간 ○○
이예은
415호 (2025년 06월호)
-
월간 ○○
이예은
414호 (2025년 05월호)
-
월간 ○○
이예은
413호 (2025년 04월호)
-
월간 ○○
이예은
412호 (2025년 03월호)
-
월간 ○○
이예은
411호 (2025년 02월호)
-
월간 ○○
이예은
410호 (2025년 01월호)
-
웨슬리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표어 ‘온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는 그가 회심한 후 1739년 3월 28일에 쓴 편지에 나오는 표현이다. “나는 온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의 복음을 즐겨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바른 일이며, 또 나의 고귀한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셨다고 믿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표현 그대로 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는 듯 순회 설교자로 살았다. 평생 약 25만 마일(40만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7호 (2023년 02월호)
-
복음 전도자, 사회운동가, 교회 개혁자, 부흥사, 신학자, 이 모든 호칭에 어울리는 인물이 바로 감리교 창설자라 불리는 존 웨슬리(1703-1791)이다. 존은 1703년 영국 랭커셔주에 속한 엡워스(Epworth)에서 성공회 사제인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십구 남매 중 열다섯째로 태어났다.〔그림1〕은 웨슬리가 태어난 생가이다. 꼭대기 다락방을 포함하여 3층으로 이뤄졌다. 지금은 존 웨슬리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이곳 ‘옛 목사관’(Old Rectory)에서 존은 부모와 많은 형제자매와 더불어 왁자지껄 생활했다. 이곳을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6호 (2023년 01월호)
-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10·29 참사 추모 공간에 시민들이 놓은 꽃다발이 쌓여있다.
광장에 서다
정민호
385호 (2022년 12월호)
-
필립 슈페너로부터 시작된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니콜라우스 친첸도르프 백작이 계승했다. 친첸도르프는 슈페너가 죽기 5년 전 1700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외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는 슈페너와 경건주의 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자국어 성경 번역을 추진하고, 소녀들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등 종교와 사회의 개혁에 힘을 쏟았다. 슈페너가 친첸도르프의 대부가 된 것도 외할머니 덕분이었다.친첸도르프는 어린 시절 경건주의 요람이었던 할레(Halle)에서 아우구스트 프랑케로부터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5호 (2022년 12월호)
-
종교개혁으로 말씀에 충실한 신앙, 복음에 기초한 교회를 세우고자 몸부림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순수한 신앙은 점차 화석화된 교리로, 개혁의 열정은 광신으로 변해갔다. 내가 믿는 신앙만이 바른 정통이라는 고집불통은 결국 종교전쟁이라는 재앙을 낳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조차도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되고 말았다. 이때 제2의 종교개혁을 표방하며 나선 인물이 필립 슈페너(1635-1705)이다. 흔히 ‘경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에서 새로운 종교개혁 혹은 16세기에 시작되었다가 교리적 정통주의로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4호 (2022년 11월호)
-
평생 사육되어온 곰들은 죽은 이후에야 철창을 나갈 수 있다. 이들은 야생에서 자력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고, 외래종이라서 생태계 교란 가능성 때문에 방생할 수도 없다.― 46쪽, 민간 최초 ‘사육곰 생츄어리 건립’을 준비하다(커버스토리_곰 보금자리 프로젝트 최태규 대표 인터뷰)
광장에 서다
복음과상황
383호 (2022년 10월호)
-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오랜 세월 망명자로 살았다. 녹스는 1547년부터 프랑스 갤리선 노예로 있다가 1549년에 풀려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프로테스탄트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에드워드 6세 치하 잉글랜드의 버릭어폰트위드, 뉴캐슬어폰타인 같은 도시에서 목회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조차 로마 가톨릭 군주 메리 튜더가 여왕 자리에 오르자 녹스는 또다시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554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피난민 교회를 맡아 목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배 형식과 예전을 둘러싸고 갈등이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3호 (2022년 10월호)
-
존 녹스(c.1513-1572)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로 흔히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린다. 1560년 녹스와 다섯 명의 동료는 종교개혁 정신을 담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장로교회 정치 원리를 표명한 ‘스코틀랜드 교회치리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스코틀랜드는 최초의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이로써 유럽 개혁교회 전통이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 전통으로 이어져 꽃피게 되었다.〔그림1〕은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인 뉴칼리지 교정에 있는 녹스 동상이다. 왼손으로 쥔 성경을 가슴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는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2호 (2022년 09월호)
-
〔그림1〕은 칼뱅이 사역했던 제네바 생 피에르 교회다. 1538년 4월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이 3년 7개월 만인 1541년 9월에 생 피에르 교회 목회자로 귀환했다. 칼뱅은 이때부터 1564년 5월 27일 숨을 거둘 때까지 23년 동안 제네바의 목회자·개혁자·교육자로 살았다. 2년 남짓한 제네바 1차 사역(1536-1538)까지 합치면 25년간 제네바에서 사역한 셈이다. 이로써 제네바는 칼뱅의 도시가 되었고, 칼뱅은 제네바의 영혼이 되었다.정면이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빼닮은 생 피에르 교회는 이름 그대로 ‘성 베드로’를 기념하는 교
묵상 스케치
이근복·박경수
381호 (2022년 0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