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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쁜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지, 얼마나 많은 폭력과 거짓을 소비하는지 더 이상 깨닫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지난 4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입니다. 독일의 한 저널리스트(로냐 폰 부름프자이벨)는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이제는 절망에 맞서는 이야기를 상상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책 제목처럼,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당신이 읽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접하며 거기에 연루됩니다.이번 달에 담은 이야기의 주제는 고통과 아픔입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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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신혼집을 알아볼 때, 굵직한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활약하다가 공무원이 된 선배가 말했습니다. “집 사세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집을 사야 해요. 2년에 한 번씩 빚내 이사 다니면서 어떻게 시민운동을 이어가겠어요.”흘려들었던 조언이 다시 떠오른 건, 자가가 없어 불편을 겪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끝내 사지 않았던 그 집의 시세가 다섯 배 넘게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지요. 만약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빚을 내어 집을 사겠어요. 그런데 심각한 고민은 다음입니다. 과연 나는 생각으로만 지지해온 희년 정신에 따라, 다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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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그리라 하면 일단 푸른 초원 위에 네모를 만들고, 지붕을 얹고, 그 안에 가족들을 넣었습니다. 창문도 있고, 그 앞에 산도 있어서 조망권은 기본이고, 강도 있어서 물 부족할 염려도 없고, 해님도 밝게 빛나서 채광도 보장된 공간. 이 그림의 덧없음을 인지한 건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집은 바깥에서 보는 풍경이 아닌 일과를 마친 후 마주하는 조명, 침대 등 좁은 방을 채우는 가구들이었죠. 이제 집을 그리라 하면 무엇부터 그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이번 호는 희년실천주일을 맞아, 희년실천을 이어온 ‘희년함께’와 공동 기획한 집
동교동 삼거리에서
정민호
418호 (202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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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대통령이 사사로운 잇속을 좇고자 북한에 무인기를 침투시켜 전쟁을 유도했다는 믿기 힘든 소식이 들립니다. 분단 한반도의 취약한 민낯을 마주합니다. 복상이 통일, 북한이탈주민, 평화 등 다소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주제를 힘껏 붙들고 있는 까닭입니다. 34년 전 “분단과 지역 감정의 상황에 일치의 복음”을 담겠다고 나선 복상의 창간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해방 80주년을 맞아 ‘역사’를 곱씹습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유작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에서 역사의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 중 하나로 숨은 의인들을 찾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7호 (202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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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정국으로 묻힌, 올해 복상의 변화 시도를 다시 소개합니다. 1월호부터 겉과 속 디자인을 대폭 바꾸었습니다. 약 20년 만에 로고까지 새로 만든 것은 큰 도전이었습니다.짜임새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커버스토리’가 없어지고 ‘특집’ 섹션을 신설했습니다. 특집 주제를 반영한 표지 이미지는 매달 같은 소재를 활용하고 있는데 아직 눈치챈 독자는 없는 듯합니다.이번 특집 주제는 미리 기획하지 않았습니다. 연재 원고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좇아 가장 접점이 많은 주제를 ‘특집’으로 삼았습니다. 그야말로 열린 주제인 셈이죠. 성소수자, 지체장애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6호 (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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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한 해의 가운데 6월인데, 12·3 내란으로 비롯된 긴 겨울과 어수선했던 봄 때문일까요?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이 마치 한 해의 마지막 밤처럼 조심스럽습니다.이제 교회력은 성령강림절과 삼위일체주일을 거쳐, 연중 시기(年中時期)로 흘러듭니다. 다소 떠들썩한 큰 절기들 사이의 이 고요한 기간은 하늘에 오르신 주님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살아가는 실전의 시기이지요. 교회는 이 기간에 생명과 희망, 성장을 나타내는 초록색을 사용합니다. 푸른빛 짙은 이달,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떠올립니다.그러나 늘 그러하듯,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5호 (202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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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영화 속 미국 대통령은 늘 악당에 맞서 싸우는 영웅이었습니다. 테러를 진압하는 주인공이었고, 목숨을 던져 재앙을 막는 리더였지요. 그런데 지금, 외계인의 침공보다 더 지구를 혼란스럽게 하는 인물이 바로 그 미국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이라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12·3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어떤가요.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악의 중심에 기생하고, 진실을 말하는 자들이 표적이 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악을 악이라 부르는 것이 정파적 선택으로 치부되는, 매우 너그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악은 어느새 복잡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4호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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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7-8, 개역한글)로마서 3:7은 주요 교단에서 이단·사이비로 규정한 ‘신천지’가 모략(거짓말) 교리의 근거로 사용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저들은 어떤 거짓말도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쓰일 수 있다면, 거짓에 거짓의 산을 쌓아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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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석
413호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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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정국에서 뉴스에 언급되는 낯선 법률 용어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법의 역할과 한계를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알아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이런 와중에 극우 기독교인들은 법원에 난입해 건물을 부수고 판사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힘으로 법을 무너뜨리고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해 헌법재판관의 이름을 부르며, 밟아 밟아 밟아 노래를 합니다.이들은 어떻게 불법의, 불법의, 불법의 괴물로 변했을까요?복상은 십수 년 전부터 극우 기독교에 대한 기획을 여러 차례 해왔습니다. 문제를 진단하고 경고했지만, 극우의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2호 (202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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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이라는 단어는 기차역 승강장에서 유래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기반한 여러 서비스를 설명할 때 광범위하게 쓰이지요. 사람이나 물건, 정보와 감정이 분주하게 오가며 부딪친다는 데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최근 인터넷 뉴스 플랫폼에서 12∙3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언젠가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전쟁 광기에 휩싸인 군중들이 기차 플랫폼에서 만나고, 광란이 절정에 이를 때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전쟁터로 향하지요.‘속보’ ‘단독’을 단 기사가 하루에만 수백 개 넘게 쏟아집니다. 조회수가 기사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1호 (202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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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월호가 마감되는 디데이(D-Day)입니다. 독자들이 1월호를 받으실 때면, 이 글을 쓴 지 열흘은 훌쩍 지났을 것입니다. 이 시차는 월간지의 숙명이자 매력입니다. 2025년 1월호를 위해 여러분이 글을 쓰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배포하는 동안 시간이 흐릅니다. 그사이 세상은 변하고,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이번 호에는 12·3 내란 사태 전/후의 글이 함께 실려있습니다. 그 간극이 우리가 부닥친 황당한 현실을 더 또렷하게 들춥니다. 한강 작가는 1980년 5월 광주를 다룬 《소년이 온다》를 쓰며 “과거가 현재를 돕고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10호 (202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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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자전소설 〈침묵〉(2000)에서는 여름 수박 맛이 화두가 되어, 아기를 낳지 않을 거라는 화자의 굳은 결심에 균열이 납니다. 빛으로 나온 생명은 저마다 신비하고 오묘한 근원을 갖는가 봅니다.지난해부터 독자들에게 저출산·저출생 현상을 다뤄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이를 기독교 잡지만의 방식으로 다루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좀 걸렸습니다. 이제야 생명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생명과 관련한 지난 몇 해의 복상 글들을 보니, 동물권이나 생태 환경 등의 주제는 제법 다루었는데 사람의 탄생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9호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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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를 준비하는 동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지요. 그 위상과 의미에 대해서는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2016년 정권에 의해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이력이 새삼 회자하고 있습니다. 모 교육청은 한강 작가의 책을 ‘유해도서’로 지정하기도 했다지요. 우리 사회가 보편적 인류애에서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9월 말, 제4차 로잔대회에서 ‘서울선언문’이 발표되자 지난 선언문들보다 퇴행했다는 목소리가 거셌습니다. 이에 주최 측은 참가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8호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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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를 들춘 사람에게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 되묻는 광경을 왕왕 목격합니다. 겉으로는 대안을 묻지만, 사실은 ‘묘수’를 듣고자 하는 속내가 읽힙니다. 아니, 어쩌면 묘수에도 큰 관심이 없고, 문제를 문제시해 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느냐는 불만이 녹아있는 말인지도요. “그래서 대안이 뭔데?” 이런 질문, 살면서 몇 번 (하거나) 들어보셨나요?이번 커버스토리는 ‘기독교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라는 거창한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만든 여러 실천이 우리네 교박한 생활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따져보자는 목적이었지요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7호 (202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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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옆자리에 계신 (복상 실무진 중 유일)한 중년분께 물었습니다. “중년의 위기를 느끼시나요?” “압박감이 있죠. 위로는 부모님이 있고, 아래로는 아이들이 있는 샌드위치구조의 압박. 몸이 더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 오는 불안.” 하하하,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끝마쳤지만, ‘웃프고’ ‘서늘한’ 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커버스토리만 놓고 보면, 위 중년분께서 이번 주제를 기획했겠거니 오해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기획안을 내놓은 사람은 접니다. 중년까지 5년 정도 남은 ‘늙은 청년’이지요. 연달아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이었습니
동교동 삼거리에서
강동석
406호 (202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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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안이 된 듯 멀리 있는 것들을 잘 본다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의 빛이 비추는 동안만큼만. 그러나 가까이에 뭐가 다가오면, 우리 정신은 텅 비어 버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일들을 알 수 없다오.”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과거와 미래 일은 잘 알지만, 현재 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한 말입니다. 지금 여기, 내 옆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포착하지 못하면서, 먼 미래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아니 본의에 걸맞은 상처를 내고 다니는 사람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5호 (202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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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으로 야근을 하고 퇴근한 날 밤, 1963년생 엄마는 종종 제게 “미안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로 모바일로 쇼핑하실 때 늘 제게 최종 결제를 부탁하시거든요. 몇 번 가르쳐 드렸지만 결국 포기하셨습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서 온 한 친구는, 한글로 된 디지털 메뉴판 앞에서 쩔쩔매다가 자신을 도운 제게 연신 “고맙다”고 말했는데요.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렇게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싶어서요. 누군가는 이를 두고 ‘문해력이 나쁘다’고 할 텐데,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하는 평가인가, 좀 더 시스템이 친절할 수는
동교동 삼거리에서
김다혜
404호 (202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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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뉴스에 내성이 생겼습니다. 하루 이틀 미사일 날아가는 장면을 접할 때는 심각하지만, 사흘째부터는 잊고 잘 지내니까요. 반복되는 망각이 인간 본성으로 인한 것은 아닐지 돌아보게 됩니다. 프랜시스 쉐퍼는 “전쟁이란, 극한에 몰린 이웃을 돕는 일에 무제한 쏟아부어야 할 사랑을 사용하지 않는 비기독교적 사랑 결핍이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표출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만성적인 사랑 결핍에 빠진 거겠지요.영화 〈기생수: 더 그레이〉의 원작 《기생수》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면, 한 살인범이 등장해 자기를 변호합니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3호 (202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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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 자주 쓰시나요? ‘하마터면’.조금만 잘못하였더라면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할 뻔했을 때 자주 쓰는 말이지요.이런 말은 얼마나 쓰시나요? ‘하필이면’.흔히 뭔가 되어가는 일이 못마땅하고 곤란한 상황에서 그 연유를 캐물을 때 사용합니다. 각종 참사, 재앙, 사고의 피해자들은 머릿속으로 수천 번은 더 되뇌었겠지요. 하필이면, 왜 나에게?저는 주로 ‘하마터면’을 씁니다. 위험과 재난이 고만조만 잘 비껴갔습니다. 위협을 피한 비결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시위나 피해 현장에 가면 불식간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마터면 나
동교동 삼거리에서
이범진
402호 (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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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5분 27초〉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시입니다. 1980년 광주, 학살이 끝났던 그 시간, 5월 27일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시를 접한 충격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말할 수 없음’ ‘어찌할 수 없음’, 비극 앞에서 마주한 언어의 무용성을 충격적으로 전달해주고 있죠. 참담한 사건과 시간 앞, 유려한 시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말을 잃은 채 묵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숱한 사건이 떠오릅니다.20대 때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서 가장 긴 시’
동교동 삼거리에서
강동석
401호 (2024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