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호 동교동 삼거리에서]

달력은 한 해의 가운데 6월인데, 12·3 내란으로 비롯된 긴 겨울과 어수선했던 봄 때문일까요? 조기 대선을 앞둔 지금이 마치 한 해의 마지막 밤처럼 조심스럽습니다.

이제 교회력은 성령강림절과 삼위일체주일을 거쳐, 연중 시기(年中時期)로 흘러듭니다. 다소 떠들썩한 큰 절기들 사이의 이 고요한 기간은 하늘에 오르신 주님의 가르침을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살아가는 실전의 시기이지요. 교회는 이 기간에 생명과 희망, 성장을 나타내는 초록색을 사용합니다. 푸른빛 짙은 이달,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그러나 늘 그러하듯, 우리는 굳건하다 믿었던 이 땅, 우리가 의지해온 삶의 기반들이 실은 얼마나 여리고 허술한 얼개 위에 놓여있는지 서늘하게 깨닫습니다. 한바탕 비바람에도 쉬이 흔들리고, 작은 불씨 하나에도 모든 것을 삼킬 듯 위협하는 ‘사라짐’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깊고 넓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날마다 애써 쌓아 올린 일상의 성취와 굳건하다고 믿었던 생활의 밑동이 한낱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스러질 수도 있다는 아찔한 자각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욱, 멸종의 두려움 앞에서 좌절하는 대신, 애타게 서로의 여린 구석을 보듬는 연대의 손길을 내밀게 합니다. 소멸의 위협 앞에서,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사랑하고 희망하며, 주를 기다립니다.

이범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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