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락 맞은 잡지유 선생께. 편지 회답 늦어 미안합니다. 〈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은 것은 알겠지요. …— 1980년 8월 18일 유영빈 님에게 보낸 함석헌의 서신〈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 이후, 수사를 위임받은 전두환은 계엄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로 등극했다. 12·12 사태 이후 실질적인 ‘전두환 정부’가 펼쳐진 셈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월, 공문 한 장 없이 〈씨ᄋᆞᆯ의소리〉를 폐간시켰다.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등 170여 개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20호 (2025년 11월호)
-
₩
제때 못 나오는 잡지1970년 4월 〈씨ᄋᆞᆯ의소리〉가 세상에 나왔다. “신문이 씨ᄋᆞᆯ에게 씨ᄋᆞᆯ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을 뿐 아니라 씨ᄋᆞᆯ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입을 막고 못하게 한다”는 이유가 창간 동력이었다. 매월 발간을 목표로 삼았다. 잡지는 두 호를 내고 폐간된다. 정부가 잡은 트집은 ‘인쇄소 문제’였다.벌써 신문으로 알겠지만 잡지 발행 등록 취소 통지가 나와서 싸우고 있는 중이요. 본래 헌법에 정기 간행물을 내려면 일정한 인쇄소와 계약을 해서 그 서류를 첨부하게 되어 있소. 그래서 어떤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9호 (2025년 10월호)
-
₩
그는 왜 〈씨ᄋᆞᆯ의소리〉를 냈나해방 후 함석헌은 잡지를 내고자 꿈을 품었다. 무려 주간지로. 장준하의 〈사상계〉에 글을 쓰면서도, 급변하는 시대 상황 가운데 민중의 요구를 때에 맞게 전하기 위해 월간보다 더 잦은 잡지 발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그 후에 알아보니 주간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중의 입을 열기보다는 틀어막기만 밤낮 연구하는 집권자들은 이상야릇한 법을 만들어서 굉장한 시설과 자금이 없이는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1)민중의 숨 쉴 틈이 되었던 〈사상계〉는 1958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8호 (2025년 09월호)
-
₩
시, 뒤틀린 해방 공간에서 숨쉬기해방1) 큰 연장 황소 메고 종자망태 내놓아라삼동이 다 지나고 새봄 다시 돌아온다일천년 묵은 동산을 갈아볼까 하노라압록강 메인목이 밤동안에 열렸고나피눈물에 울든밤은 어이 그리 길었던고동천에 붉은해 솟아 우리 행진 하리라금수강산 자랑마라 잔작관전 보기싫다갈래어찌 그리 많고 줄기 무슨 그리 여럿삼천리 한마당 닦고 달려보면 어떠리…1945년 8월 15일. 함석헌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그는 해방 공간(1945-1948)에서 시를 여러 편 쓴다. 〈해방〉은 1945년 11월에 쓴 시다.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7호 (2025년 08월호)
-
₩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이1919년 3·1독립운동은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 흐름과 내부 상황, 즉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공명으로 일어났다. 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고, 놀란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방향을 바꾸었다.문화통치라며 내세운 외양은 합리적으로 보였다. 제한적이나마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종교 기관에도 ‘법인’ 등록을 위한 법적 제도를 제공했다. 그러나 허용은 통제의 또 다른 수단이었다. 모든 공식 도서와 신문, 잡지는 검열되었고, 법인체가 된 종교 기관의 재산·활동 역시 일제가 손쉽게 파악할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5호 (2025년 06월호)
-
본 연재는 본지 400호 기념 ‘연재 기획 공모전: ‘복음’과 ‘상황’을 잇다’ 우수상 수상작입니다.함석헌과 언론 함석헌은 1901년에 태어나 1989년에 별세했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굴곡진 역사를 오롯이 살아낸 한 개인이자, 사회와 종교에 사상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독립운동가·종교인·언론인·출판인·사회운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번(1979·1985년) 추천하기도 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에 초점을 맞추고 그와 관련한 언론의 대안적 기능을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민대홍
414호 (2025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