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호 대안 언론가 함석헌 읽기]

벼락 맞은 잡지

유 선생께. 편지 회답 늦어 미안합니다. 〈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은 것은 알겠지요. …
— 1980년 8월 18일 유영빈 님에게 보낸 함석헌의 서신

〈씨ᄋᆞᆯ의소리〉가 벼락을 맞았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 이후, 수사를 위임받은 전두환은 계엄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실세로 등극했다. 12·12 사태 이후 실질적인 ‘전두환 정부’가 펼쳐진 셈이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7월, 공문 한 장 없이 〈씨ᄋᆞᆯ의소리〉를 폐간시켰다.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등 170여 개 잡지도 하루아침에 폐간되었다. 전두환의 언론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발단은 1979년 11월 2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함석헌은 서울YWCA 강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현장에 도착해서야 결혼식을 내세운 재야인사 모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 한다는 소식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다. 주례가 허패였음에도 함석헌은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옳은 일을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전 대통령 윤보선과 해직 교수 김병걸·백기완·임채정·양순직 등이 모였고, 유신 독재 청산과 군인의 정치 중립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발표가 끝나자마자 경찰이 들이닥쳤고, 재야인사 140여 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함석헌 등 14명은 용산 보안사로 끌려가 15일간 구속 조사를 받았다.

팔순에 가까운 노인 함석헌은 온몸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았다. 유신의 주역 박정희도 하지 않았던 행위다. 《함석헌 평전》 지은이 김성수는 “친일 콤플렉스가 있는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사상가 함석헌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1)며 전두환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적어도 ‘구실’을 들어 〈씨ᄋᆞᆯ의소리〉를 폐간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일방적 묻지 마 폐간을 감행한다.

폐간 직전 함석헌은 주필로서 이런 말을 남긴다. “씨ᄋᆞᆯ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ᄋᆞᆯ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가 없고 훗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뿐일 것입니다.”2)

이후 전두환은 언론 탄압의 수위를 높여갔다. 1980년 11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언론을 통제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이른바 ‘언론통폐합’ 사건이다. 언론사 구조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문사·방송사·통신사를 억제하고 공영방송 체제를 도입했다. 실상은 언론이 정권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체제에 순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언론통폐합은 지상파방송 여론 독점으로 나아가는 밑힘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까지 ‘5·18 북한군 개입설’ 등과 같은 가짜뉴스가 공적 미디어를 통해 버젓이 유통되는 원흉이기도 하다. 정권 초창기부터 언론의 목을 틀어쥔 전두환. 이토록 씨ᄋᆞᆯ의 입을 막는 데 힘을 쏟은 그는 분명 자기가 역사에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았을 거다. 전두환의 만행으로 〈씨ᄋᆞᆯ의소리〉도 벼락을 맞았다. 제95호를 끝으로 무기한 침묵에 들어갔다. 1988년 12월에 부활한다.

들풀 같은 씨ᄋᆞᆯ 소리

씨ᄋᆞᆯ의소리 애독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너무나 오래간만입니다. 어떻게 이 모진 역사의 풍랑을 이겨오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미 아시는 대로 씨ᄋᆞᆯ의소리는 1980년 7월 갑자기 들어선 군사정권의 칼에 잘린지 8년 만에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들은 씨ᄋᆞᆯ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겠지만 씨ᄋᆞᆯ은 죽지 않습니다. 죽이면 죽는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 같은 씨ᄋᆞᆯ입니다.3)

함석헌이 남긴 마지막 글이다. 그는 1988년 8월 노환으로 입원, 이듬해 2월 4일 하늘 사람이 되었다. 글은 8월 이전에 썼을 것이다. 1988년 12월, 입원 중에도 잡지는 나왔다. 김용준·안병무·장기려 등 함석헌의 뜻을 이어간 후예들이 편집을 맡았던 거다. 함석헌 별세 후 낸 1989년 3월호(통권 99호, 복간 4호)에는 잡지 발행을 이어가기 위한 후원회를 준비하는 광고가 실렸다.

함 선생님은 투병 가운데서도 “씨ᄋᆞᆯ의소리가 이제는 여러분의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본래 처음부터 씨ᄋᆞᆯ의소리는 순수하게 씨ᄋᆞᆯ 자신의 힘으로 하는 자기 교육의 기구라고 선언하면서 창간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씨ᄋᆞᆯ의소리가 되고 우리 씨ᄋᆞᆯ들의 힘으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씨ᄋᆞᆯ의 목소리는 함석헌 후신들을 통해 이어졌다. 87년 체제 이후,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 평화와 통일 문제 등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2대 발행인은 김용준이 맡았다. 처음에는 장기려를 추대했으나 고사했다. 어려운 여건에도 김용준은 〈씨ᄋᆞᆯ의소리〉 발전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975년과 1980년 두 차례 대학에서 해직될 당시 월급을 못 받았는데, 복직 후 부당함이 밝혀져 밀린 월급이 들어오자 모조리 잡지 제작을 위해 후원하기도 했다. 함석헌이 발행인으로 있을 당시 직접 모은 편집위원 13명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나 잡지는 점차 위축된다. 복간호는 1만 부가 발행되었는데, 1990년 3월에 가서는 3천5백 부가 되었다. 결국 1991년 4월, 김용준은 장문의 편지를 독자들에게 남기며 정간을 발표했다.

앞선 폐간이 외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 정간은 순전히 내부적 문제였다. 편집위원들이 생각하는 잡지상이 달랐던 것이다. 특히 안병무와 김용준의 의견이 갈렸다. 김용준은 함석헌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잡지를 계속 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경영이 어려우면 다른 잡지사 도움을 받아서라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병무는 95개 호의 〈씨ᄋᆞᆯ의소리〉는 순전히 함석헌 개인 것이었고, 이 잡지는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함석헌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각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새로운 일들을 빚어가야 한다는 뜻에서다.

또 다른 이유는 운영과 재정 문제였다. 돈이 아닌 뜻으로 시작한 잡지라 해도, 결국 돈이 없으면 사업을 이어갈 수 없을 터. 줄어드는 판매 부수와 경영난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보증하지 못했다. 결국 김용준은 ‘내려놓음’을 선포했다. 1991년 3월, 제122호를 끝으로 무기한 정간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다시 멈춰 섰다. 그러나 씨ᄋᆞᆯ이 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정간을 안타깝게 여긴 박선균·문대골·김조년·노명환·김종태 등 젊은이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수천 부를 발행할 여력도, 100쪽 넘는 지면을 채울 필자도 없었지만, ‘씨ᄋᆞᆯ모임’이라는 이름으로 A4용지 10면 정도로 모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93년까지 총 11회 발행된 이 소식지는 〈씨ᄋᆞᆯ의소리〉를 사랑했던 독자들에게 무료로 발송되었다. 이후 김경재가 중심이 되어 ‘씨ᄋᆞᆯ소식’이라는 이름으로 7회 발간된다.

매체가 사라져도 씨ᄋᆞᆯ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함석헌이 말한 “들풀 같은 씨ᄋᆞᆯ”은 비록 열 장의 종이에 담긴 볼품없는 모습일지라도 ‘소리’를 낸다. 첫 강제 폐간 때 서신으로 목소리를 이어갔던 것처럼.

〈씨ᄋᆞᆯ의소리〉와 300

3년간 멈추었던 잡지는 1994년 11월에 미등록 잡지 〈씨ᄋᆞᆯ마당〉으로 복간된다. 당시 재창간을 준비했던 이들이 〈씨ᄋᆞᆯ의소리〉는 함석헌 시대로 마무리하고, 새 이름을 쓰자고 합의했다. 발행인은 안병무가 맡았다. 이름만 바꾸었지 짜임은 예전 형식 그대로였다. 차이가 있다면 함석헌의 ‘새 글’ 없이 격월간으로 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복병이 등장한다.

난데없이 〈씨ᄋᆞᆯ의소리〉라는 제호로 다른 잡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함석헌과 결을 같이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편집인들은 그 잡지를 발행하는 당사자를 찾아가 설득한 끝에 이름을 되찾아왔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1999년 1월 제146호부터 다시 〈씨ᄋᆞᆯ의소리〉로 내게 되었다.4) 현재도 발행하고 있다. 폐간과 복간을 거듭하며 이름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면서 고난의 역사를 지나왔다.

그사이 여러 일이 있었다. 장기려·안병무·이윤구·이문영·김용준 등 〈씨ᄋᆞᆯ의소리〉의 역사와 함께했던 이들이 함석헌 뒤를 따라 별세했다. ‘씨ᄋᆞᆯ모임’과 ‘씨ᄋᆞᆯ소식’을 발행했던 주역도 원로가 되었다. 그중 박선균은 가장 오랜 시간 〈씨ᄋᆞᆯ의소리〉 편집주간을 맡았다가 2023년에 은퇴하고, 이듬해부터는 김관호가 새 주간으로 선임되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도 변한다. 오늘날 〈씨ᄋᆞᆯ의소리〉는 완전히 다른 시대 속에 던져졌다. 지금은 과거와 같은 탄압이 없기에 방해받지 않고 잡지를 낼 수 있다. 함석헌 별세 후 조직된 함석헌기념사업회가 출간 비용 부담 및 구독자 관리를 하고 있어 안정적 발행도 보증된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구독자의 급감이다.

탄압을 받으면서 ‘어떻게 잡지를 내는가’를 고민했던 역사는 이제 ‘어떻게 읽게 하느냐’의 장벽에 부딪힌다. 많게는 1만 부 이상, 적어도 3천5백 부를 발행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500부를 발행한다. 대폭 축소되었다. 그마저도 정기독자와 후원자에게 300부 남짓 전달된다. 구독자 중 젊은이는 거의 없다.

글은 종이를 벗어나고 있다.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컴퓨터·태블릿·스마트폰을 통해 편리하게 정보에 접속하고 소비한다. 신문·잡지·도서 등 종이를 매개로 한 정보 전달 시장이 축소됨은 당연지사. 소수 구독자 외에는 ‘안 보는’ 이 잡지는 어떻게 씨ᄋᆞᆯ이 내는 소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 비단 〈씨ᄋᆞᆯ의소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보 홍수 속에서 종이 매체는 ‘생존’을 염려할 처지에 놓였다.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할 지혜를 얻고자 100년 전 첫출발을 소환한다. 1920년대 삶과 생명이 위협받던 시절에 등장한 〈성서조선〉도 200-300부 발행한 잡지였다. 작지만 존재감만은 분명했다. 민족의 시련을 성서 연구에 바탕한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하자고 외치고, 기성 교회 문제를 비판하면서 조선인을 각성시키고자 했다. 장기려·유달영 등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의 지식인을 길러냈다. 이로 인해 교회 측 압박을 받았고, 일제의 집요한 감시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1942년 3월호 제158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는 순간까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조선에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했다.

〈성서조선〉의 역사는 끝났다. 그러나 그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1982년 5월에는 전권이 영인본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학자들은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 〈성서조선〉을 읽기 시작했다. 그 뜻을 일부 계승하는 잡지도 있다. 바로 〈복음과상황〉.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자는 목적에서 탄생한 이 잡지는 〈성서조선〉의 맥을 기억한다.5)

잡지가 사라져도 뜻은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300은 작은 수가 아니다. 〈씨ᄋᆞᆯ의소리〉가 위기 속에서 더 집중해야 할 것은 300 구독자와 더불어 의미 있는 소리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소수 구독자 책상에 펼쳐진 잡지가 장기려도 만들고 유달영도 만든다.

연대 저널리즘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잡지도 다양해졌다. 꾸역꾸역 소량의 종이 잡지를 발행하는 〈씨ᄋᆞᆯ의소리〉도 있고, 수만 부씩 발행하는 대기업형 잡지도 있다. 종이를 넘어 온라인판만 내기도 하고, 종이-전자 하이브리드형 매체도 존재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도 마찬가지다. 레거시 미디어, 곧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신문·잡지·라디오·TV와 같은 전통적 방법을 넘어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도래했다. 수십만·수백만 명을 구독자로 보유한 유튜버도 있고 몇백의 작은 구독자이지만,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1인 크리에이터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존재는 다름 아닌 소비자. 바야흐로 사용자가 스스로 정보를 선택하는 시대가 열렸다.

소비자가 주체가 된 정보 마당에서 존중돼야 할 것은 ‘취향’이다. 또한 소비자의 취향은 다양하다. 이런 흐름에 따라 잡지 수도 늘어났다. 지표누리 E-나라지표(index.go.kr)에서 본 정기간행물 수는 1990년대에 7천여 종에서, 2024년 기준 2만6천여 종으로 늘어났다. 그중 인터넷 신문 비중이 약 50퍼센트이다. 여기에 온라인 플랫폼, 블로그, 개인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활동하는 언론의 수는 포함되지 않는다.

인구 증가와 시장 확대의 속도보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제한된 환경 가운데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취향 저격’ 콘텐츠 생산은 필수가 되었다. 많은 언론과 잡지가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인 메시지를 띄운다. 현대판 가짜뉴스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근거 없는 기사를 보도해도 양심에 타격을 받지 않는다. 많이 보면 장땡. 조회수가 곧 돈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혼인한 지 한 달도 안 된 연예인의 ‘결별’ 기사가 올라왔다. 정확한 근거는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냥 ‘카더라’다. 사실이 아니어도 돈만 벌면 된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확산된 기사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이런 일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서 일일이 처벌하기도 힘들다.

정보가 많아졌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 뜻에만 매달리고 있자니 줄어드는 구독자와 경제적 압박을 견뎌나가기도 쉽지 않다. 소리를 내도 듣는 이가 없다면 결과적으로 ‘입틀막’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거다.

이런 시대 속 작은 목소리가 살아남아 지속적으로 제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한 방안으로 ‘연대’를 제시해본다. 우리 사회에서 연대의 힘은 이미 증명되었다. 12·3 내란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다양한 사람이 연대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우리 역사에 선명히 새겨졌다.

광장 속 시민들은 ‘하나의 구호’만을 외치지 않았다. 제소리를 냈다. ‘전국 얼죽아 협회 서울지부’ ‘전국 깃발 준비 못한 사람 동호회’ ‘전국 집에누워있기 연합’ ‘민주묘(猫)총’ ‘응원봉을 든 오타쿠 시민연대’6) 등 각 취향을 반영한 구호를 깃발에 새겼다. 각기 다른 취향과 지향을 가진 이들이 민주적 세상을 향해 연대했다.

1990년대에 비해 3.5배 이상 숫자가 늘어난 언론 진영. 비공식 언론을 포함하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아진 저널리즘은 우리 시대의 다양한 취향과 지향을 반영한다. 지상파방송이나 대형 매체가 여론을 끌고 가는 형태의 저널리즘은 유효기간이 끝났다.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수의 유사 성향자들이 여러 갈래의 저널리즘을 이끌어간다. ‘민주’ ‘평화’ ‘환경’ 등 거대한 이슈에 있어서는 연대하여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양적 측면에서 〈씨ᄋᆞᆯ의소리〉는 수만 개의 매체 중 하나, 그마저도 매우 미약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벼움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어느 일간지처럼 과도하게 찍어낼 필요가 없다. 자극적인 기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오직 더 좋은 콘텐츠, 본래 목적으로 삼았던 씨ᄋᆞᆯ의 삶과 목소리를 담아내고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 〈성서조선〉·〈사상계〉, 그리고 옛 〈씨ᄋᆞᆯ의소리〉처럼. 다만 연대의 문은 활짝 열어두자. 다른 아픔, 다른 소리, 다른 취향에 귀 기울이는 연대의 저널리즘으로 나아가자.

연재를 마무리하며

지금까지 총 6회에 걸쳐 〈성서조선〉·〈사상계〉·〈씨ᄋᆞᆯ의소리〉를 통해 대안 언론가 함석헌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 온당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해방 공간, 전쟁, 독재 시기를 오롯이 살았던 함석헌의 삶과 언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친구인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무너진 정신, 허리가 부러진 역사를 다시 세우기 위해 성서의 관점을 조선에 수혈하고자 했다. 미운 일본을 비판하기보다, 조선인의 얼과 혼을 일깨우는 데 집중했다. 비판은 우회적으로. ‘밑장빼기’를 시전했던 함석헌의 저항적 글쓰기를 살펴보았다.

해방 공간은 곧 권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북과 남으로 나뉘어 찢긴 우리 강토는 중축이 부러진 역사를 이어갔다. 혼란의 시대에 독재가 등장하니, 함석헌은 〈사상계〉에서 시대정신을 바로잡고자 애썼다. 바른 소리 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장준하의 죽음과 잡지의 폐간을 쓰라린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결국 그는 ‘씨ᄋᆞᆯ’에게 희망이 있음을 선언하고자 70세에 〈씨ᄋᆞᆯ의소리〉를 창간한다. 입틀막 시대에 소리를 내야 사는 씨ᄋᆞᆯ의 존재를 세상에 소개했다. 씨ᄋᆞᆯ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는 일. 필자는 함석헌의 글쓰기를 ‘씨ᄋᆞᆯ 저널리즘’이라 명명한 바 있다. 폐간 속에서도 소리내기를 멈추지 않은 그 너머의 저널리즘이다.

함석헌은 떠났고, 〈씨ᄋᆞᆯ의소리〉만 남았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남긴 저널리즘은 이제-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함석헌 없이 작은 구독자로 운영하며 ‘생존’을 고민하는 때에, 씨ᄋᆞᆯ의 소리를 온당히 담아내기 위해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보고 듣는 이가 주체가 된 세상에서 300용사가 버티고 있는 복 받은 잡지라고. 작지만 다른 목소리와 연대할 때, 큰 소리도 낼 수 있다고.

88세. 병원에서 병마와 싸우면서도 복간을 꿈꾸었던 그가 그립다. 평생 글쓰기를 통해 당대의 체제에 저항했던 모습도 되새긴다. 언제나 동시대적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그의 글. 함석헌의 저널리즘을 통해 ‘시대 응답적 글쓰기’를 배운다. 이제 〈씨ᄋᆞᆯ의소리〉가 이어가야 할 것은, 곧 우리 시대에 응답하는 소리내기다. 대안을 꿈꾸는 이 시대의 뭇 언론에도 이 정신이 이어지기를, 그리고 연대하기를!  


민대홍
함석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때때로 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목으로 파주 서로교회에서 목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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