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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요청루터의 종교개혁 이래로 개신교는 고전적인 수도회주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주류 종교개혁 진영의 흐름과 달리 다양한 종교개혁 분파는 수도회주의가 담보했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재세례파의 경우 전통적인 제도교회와 긴장을 유발했다. 그들 시각에서는 4세기 이래 지속된 제국 종교로서의 로마 가톨릭이나,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등장한 국민국가의 국교가 된 주류 개신교파들은 이른바 세속 권력과 종교가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었다. 반면 재세례파는 이 땅에 속해 살아가지만 정신적·물리적으로 세상에서 벗어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8호 (2023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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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핵심적인 영향을 주었던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은 세속과 단절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큰 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수도원 근처에서 사는 것이 더 안전했고,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수도회주의는 조직적으로 발전했고, 여러 차원에서 중세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그리스도를 섬기는 학교수도사들은 개인 소유물이 인정되지 않는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삶을 희생하여 더 높은 종교적 가치를 추구했다.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7호 (202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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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부조리 인간양차 대전은 근대 세계에서 과학과 진보의 이념이 인간의 헛된 환상이었음을 드러낸 암울한 사건이다. 인류가 공통으로 향유할 수 있는 객관적 가치와 본질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기존의 사유에 깊은 의문을 제기했다. 고대 플라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추구했다. 그것이 때로 신과 섭리를 중심에 두었던 사고 체계에 균열을 가져왔지만, 그 체계가 절대정신이나 이성으로 대체될지언정 본질에 대한 천착은 포기하지 않았다. 단순화해 표현하자면, 신의 대체재는 이성 혹은 과학이었다.그러나 이 본질에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6호 (2023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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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다. 프랑스는 이날을 혁명 기념일로 지정하고 국경일로 지킨다. 그리스도교와 국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프랑스혁명을 바라보면, 또 다른 상징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클뤼니 수도원 파괴이다. 베네딕트 회칙을 따르는 클뤼니 수도원은 10세기 중세 교회 개혁 운동의 전면에 나선 상징적인 곳이다. 로마 성베드로대성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이기도 했다. 한때 클뤼니 수도원장은 로마 교황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도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5호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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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라는 하나의 그리스도교 공화국을 유지하던 유럽이 분열되는 사건이었다. 교황제나 화체설의 부정과 같은 신학적 차이 이외에도, 사제 결혼 허용이나 가톨릭교회에서 금지하던 이혼이 제도화되는 등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는 큰 변화들이 생겨났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도주의 삶에 대한 부정과 수도원 해산이다. 독일과 잉글랜드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수도원은 그리스도교 가치를 담보하는 공간으로서 지위를 영구히 상실했다. 중세 말 수도원의 과도한 부 축적과 수도원이 낳은 부정적인 기능에 대한 공격은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4호 (202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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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들은 그리스도와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물질과 성적 욕구, 세속의 꿈을 내려놓았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여 세대를 잇는 일이 불가능한 독신 공동체라는 점에서 그들은 중성인이다. 그러니 굳이 여성들의 수도회만 따로 떼어 논의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성 수도회, 즉 수녀원은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세속의 가부장제 질서를 피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이뤘다는 데서 독립성이 있다. 수녀원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넘어선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중세에 탁월한 업적으로 이름을 남긴 여성 대다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83호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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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유럽의 11-13세기는 ‘장기 12세기’라고 불린다. 이 시기 유럽은 십자군으로 타 문화권과 교류하게 되면서 무역과 도시가 발달했다. 도시로 자본이 몰렸고, 상업으로 부가 축적되었다. 교황이 주창하여 1095년부터 유럽의 수많은 군주가 참여한 십자군 원정은 이 시기 교회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정점은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였다. 칠성사와 화체설을 확정하는 등 성직자 중심주의를 완성한 것이다. 이제 교회와 성직 계층은 유럽 사회의 사회·정치·경제 질서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현세와 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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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382호 (202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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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전쟁, 평화의 왕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수도사들과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선 수도사들. 지독한 형용모순이다.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에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학교’(dominici schola servitii)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스콜라’(schola)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정예부대라는 의미였다. 중세 초 이민족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외곽에 세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지키는 용병들을 ‘스콜라’라 불렀다. 수도회 창시자 베네딕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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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381호 (2022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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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의 암흑기서유럽 교회 역사에서 10세기는 교황권의 암흑기(saeculum obscurum)라 불린다. 서유럽 중세를 형성하는 데 강력한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교황권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교황들의 세속화와 타락을 꼽기는 조심스럽다. 오히려 교황청이 있는 ‘로마’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그 이유를 찾는 시도가 적절하다. 7-9세기 유럽은 북쪽의 바이킹과 노르만족, 동쪽의 마자르족,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반도의 사라센 이슬람의 공격으로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은 외부 침입에서 보호해줄 황제나 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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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380호 (2022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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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의 시대중세 유럽은 게르만 민족이동으로 형성되었다. 독자 문명이 없는 이주민인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중세가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간편하게는 로마 교황에게 그 공로를 돌릴 수 있다.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과 별개로, 유럽의 지형도를 들여다보면 그리스도교가 유럽인들의 삶 속에 스며들기 쉽지 않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우선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 로마는 알프스산맥이라는 거대 자연 장벽으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심지인 독일, 프랑스, 영국과 서로 소통하기 쉽지 않았다.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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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원
379호 (2022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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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종교개혁 과정 중에 대부분 개신교 국가에서 수도회 해산이 이루어졌다. 중세 말 교회 타락의 전형이 수도회에 집중된 부와 그로 인한 부패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오해하고 수도회 운동을 거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회가 탄생할 때의 모습은 16세기 수도회와 동일하지 않았다. 수도회 운동은 종교개혁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교회의 유산 중 일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수도회가 교회 역사에서 유의미한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를 대체로 4세기 정도로 잡는다. 그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황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78호 (202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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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복음과상황〉에서 교회 역사에서 ‘낯선 전통’이라는 주제로 공의회, 수도회, 이단 역사를 되짚어보는 시리즈 3부작을 기획했습니다. 2019년 1월부터 2020년 3월까지 그 첫 번째인 ‘공의회의 사회사’를 연재한 후 2년 만에 두 번째 주제로 ‘수도회’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진행될 이 연재에 독자님들의 응원과 격려, 건설적인 비판을 기대하겠습니다. ― 필자 주‘수도회’를 탐구하는 여정의 시작점에서수도회,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아마 세속과 떨어진 곳에 있어서 높은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채 고립
수도회, 길을 묻다
최종원
377호 (2022년 0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