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호 수도회, 길을 묻다]

수도회의 탄생, 왜 4세기인가?

종교개혁 과정 중에 대부분 개신교 국가에서 수도회 해산이 이루어졌다. 중세 말 교회 타락의 전형이 수도회에 집중된 부와 그로 인한 부패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수도회주의를 오해하고 수도회 운동을 거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회가 탄생할 때의 모습은 16세기 수도회와 동일하지 않았다. 수도회 운동은 종교개혁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교회의 유산 중 일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수도회가 교회 역사에서 유의미한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를 대체로 4세기 정도로 잡는다. 그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회심과 그리스도교 공인 시기와 맞닿아있다. 개신교 진영에서 수도회를 해산한 16세기는 하나의 가톨릭교회가 무너지고 국가 중심 교회가 형성되던 시기이다. 공교롭게도 수도회의 탄생과 해산은 제국이나 국가 등과 같은 세속 권력과 교회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4세기 수도회 운동은 로마제국이라는 세속 권력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주도하는, 급변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있다. 16세기 수도회 해산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바는, 세속 권력이 교회를 주도하는 흐름을 형성하였으며, 더 이상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세속사 흐름과 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수도회는 실제적으로는 세속과 종교 사이의 역학에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수도회는 초기 교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초기 교회가 취했던 금욕 관념이 3-4세기 그리스도교 세계의 변화에 맞게 적응하면서 탄생하였다. 그러니 수도회 탄생을 가져온 역동에 주목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 공인의 명과 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회심과 313년 그리스도교 공인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교는 로마 세계에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기도 하고 때로 존재가 용인되기도 하는 등 불안정한 상태에서 300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제국에 의한 마지막이자 가장 큰 박해는 콘스탄티누스가 권좌에 오르기 직전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일어났다.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체포, 투옥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빼앗겼으며, 로마 시민의 특권을 박탈당했다. 그렇지만 황제의 권력으로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결과에 그쳤다.

이런 박해를 견딘 교회는 다음 통치자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이 이루어졌다. 이전에 미신으로 치부되던 그리스도교는 형식상으로 로마가 용인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리스도교는 타 종교에 비해 더욱 우호적인 대우를 받았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몰수한 재산을 교회에 돌려주었다. 교회 성직자들의 병역의무를 면제하고, 납세의무도 면해주었다. 교회 건축 자금을 지원하고, 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더 나아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제국 정부의 요직에 앉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재위기에 그리스도교는 그저 박해를 면하고 자유를 얻는 정도를 넘어, 그 성격이 급진적으로 재구성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순교를 각오할 결단이 필요한 시기는 지났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앙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결단 없이도 자기 편의와 향후의 기회를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게 유행이 되었다. 삶과 가치관은 변함없는 이교도의 것을 유지하니 교회의 질적 순도는 점점 떨어졌다. 대체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직전 그리스도인의 수를 전체 10% 정도로 잡는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을 무렵, 제국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리스도교를 택했고, 국교로 공인된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는 적어도 90% 이상이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본다. 핍박받던 소수가, 이제 주류 중의 주류라는 흐름에 서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주도한 종교적 변화에 교회는 매우 빠르게 적응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항상 제국과 문화와 대립 관계에 있던 교회는 어느 순간 제국이 지향하던 가치·문화와 같은 방향에 서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관습에 로마의 전통적인 이교도 의식이 혼합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건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성취되는 강력한 증거로 보았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서 교회는 영적 통치자일 뿐 아니라, 세속사에서도 중심축을 차지하게 되었다. 점차 로마제국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해석일 뿐이다. 제국과 교회 사이의 긴장이 사라진 것을 교회의 승리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에 교회는 박해받았지만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호의를 수용했을 때 세속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다. 눈먼 교회는 제국과 권력을 나누는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 오히려 박해를 이겨낸 신실함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 결과 제국이 교회 문제에 주도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종파에서 제국의 지배 종교가 되고, 그 과정에서 제국과 깊이 얽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문제에 관여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교회의 고위 직책인 주교를 황제가 지명하는가 하면, 고위 성직자에게 세속의 직책을 부여하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교회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교회의를 소집하는 이도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 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소집하고 직접 의사봉을 잡은 사건은, 교회 박해와는 또 다른 형태의, 그보다 훨씬 치명적인 제국의 간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황제는 주교들과 함께 교회의 수호자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호의로 지어진 웅장한 바실리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더 이상 신앙으로 인해 순교당하지 않아도 되고, 성서를 소유하고 읽는 일이 금지되지 않기에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 콘스탄티누스로 인해 교회와 제국 정부 사이의 관계가 다시 설정되어 오히려 교회의 독립성이 위협받지는 않았을까? 그리스도교 공인이라는 승리 이면에는 제국과 종교의 긴장선이 무너지고, 제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제국 종교로 가는 발 빠른 이행이 이루어졌다. 이 변화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교회의 두 가지 반응

첫째로, 제도교회는 공인으로 인한 변화를 환영하고 발 빠르게 적응했다. 이렇듯 제국과 교회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그려간 이는 4세기 유명한 교회사가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과 잇따른 일련의 교회 관련 조치들을 우호적으로 그린다. 니케아공의회에 참석하여 현장을 묘사한 그의 증언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교회 공의회가 황제의 궁전에서 열린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제국의 황제가 각지에서 참석한 교회 주교들을 환영하였으며, 주교들은 로마 군사들의 사열을 받으며 궁전에 입장했다. 유세비우스는 박해로 인해 다리를 절거나, 지팡이와 목발을 짚고 걷는 이들을 묘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결국은 승리한 이들의 환희와 감격이 묻어났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모진 대우를 받던 이들이 이제는 황제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제국 내 교회의 문제를 함께 논의하기 위해 모였으니 말이다. 유세비우스는 이 장면을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한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실현된 일로 보았다. 비단 유세비우스만 이렇게 해석하지는 않았다. 대다수 교회와 성직자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조치에 환영하고 제국의 교회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둘째는 공인과 그 이후의 교회 정책에 대한 거부이다. 이 지점이 수도회주의가 탄생한 배경이다. 대개 그리스도교 수도회는 4세기 이집트의 사막에서 제도로 자리 잡았다고 알려졌다. 이 시기 수도회주의의 발흥은 콘스탄티누스 개종과 그리스도교가 로마 주류 종교가 된 거대한 변화에 대한 대응책이었다.1) 오랜 기간 그리스도교에는 박해의 신학, 순교의 신학이라고 할 만한 관념이 있었다. 제국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는 교회 내에 순교자라는 특별한 계급을 만들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들은 수 세기 동안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들처럼 박해를 이기며 순교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가치로 여겨졌다. 박해가 끝났다는 말은 더 이상 순교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4세기의 변화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도시를 떠나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사막으로 들어갔다. 순교라는 선택지가 사라진, 급진적으로 금욕적·순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혹독한 사막은 그 자체로 상징성을 지녔다. 그들은 사막의 수도회에서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부과함으로써 종교적 완전성을 추구했다.

하지만 4세기 수도회주의 운동을 개인의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순교와 금욕으로만 한정하는 일은 사회 속에서 수도회의 역할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순교란 개인의 신앙 정절을 지키는 행위인 동시에, 제국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에 동화되지 않고 그 너머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도 가진다. 순교의 시대가 끝난 후 사막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등장했다는 움직임은, 제국의 가치가 교회를 지배하고 교회가 세속의 문화에 동화되는 현실의 위기에 대한 일련의 자각과 경각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차원에서 수도회주의와 순교주의는 제국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가장 급진적인 파생물이라 할 수 있다.

사막은 상징적인 장소이다. 음식을 찾기 어려운, 혹독하고 고독한 장소이다. 사막은 끝없는 유혹의 자리인 동시에,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지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애쓰는 예언자들이 사막으로 들어간 사례를 볼 수 있다. 4세기 등장한 수도회주의가 전형으로 삼는 이가 엘리야이다.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는 사악한 세속 통치자인 아합 및 이세벨과의 갈등 중에 광야로 들어가 피신하다가 호렙산에 이른다. 40일이라는 상징적인 기간을 호렙산에 머물며 선지자의 피를 찾는 불의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결국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 가운데서가 아닌 미세한 소리로 임하는 하나님을 만난다. 이 엘리야와 동일시되는 인물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 세례 요한이다. 그도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고 마귀의 유혹을 이겨냈다. 세례 요한은 통치자 헤롯의 부도덕성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부당하게 죽임을 당했다. 엘리야나 세례 요한에게 사막이란 도피의 장소가 아니라, 가장 치열한 도전의 자리였다. 4세기 사막에서 탄생한 수도회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제국에서 차지한 자리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응 중 하나였다. 명백하게 예상되는 교회의 수준 저하와 세속화를 막기 위한 급진적 저항이, 도시가 아닌 사막 한가운데서 생겨났다. 그들을 총칭하여 사막 교부들이라고 한다.

두 가지 형태의 수도회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 이집트 사막에서 시작한 그리스도교 수도회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 안토니우스(251–356)와 성 파코미우스(c.290–346)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은둔수도회(eremitical monasticism)와 공주수도회(cenobitic monasticism)라는 서로 다른 수도회 전통을 만들었다.

수도회주의 첫 번째 형태는 은둔수도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둔수도사는 완벽히 고립되어 혼자 사막에 기거했다. 그들은 동굴이나, 요새 혹은 버려진 건물에서 기거하며 살았다. 이런 은둔수도회 창시자가 안토니우스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완벽하게 본받는 삶을 결단했다.

안토니우스에 대한 기록은 아타나시우스가 쓴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전해진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안토니우스는 많은 재산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지만,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어느 날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좆으라”(마 19:21)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다섯 해 되던 해에 안토니우스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오래된 요새에서 20년을 은둔하며 살았다. 이곳에서 순례자들과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최소한의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이 기간은 시험과 고통의 기간이었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에는 악마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고 괴롭히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이 시련은 안토니우스 내면에 있는 욕망과 갈등을 상징한다. 그는 가정을 이루는 것을 포기했고, 부유한 삶도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의 매일의 삶은 불안함에 노출된다. 당장 내일의 식사가 어디서 올지 모르는 삶이다. 불안정한 삶은 늘 긴장을 유발한다. 긴장 속에 노출될 때 내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안토니우스가 경험했던 이 시험과 유혹은 수많은 예술가의 작품 주제가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그림인 〈성 안토니우스의 고문〉에는 악령들이 그를 무자비하게 휘감아 공격하는 모습이 실감 나게 그려졌다. 점차 그의 삶을 동경하고 공감하는 많은 제자가 동굴과 산 주위로 모여들어 안토니우스에게 영적인 삶을 배우고자 했다.

미켈란젤로의 〈성 안토니우스의 고문〉
미켈란젤로의 〈성 안토니우스의 고문〉

그 후 마지막으로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놓여있는 사막으로 거처를 옮긴 안토니우스는 45년간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고통당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아리우스파에 대항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갔다고 전해진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그가 105세에 죽었다고 전한다.

안토니우스가 추구한 은둔수도회는 복음을 위하여 경주하는 자(고전 9:23-25)에 비유된다.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절제하고 훈육하며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삶이다. 이를 단순히 금욕으로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 성직자들의 결혼은 허용되었으며, 재산 소유도 일반적이었다. 안토니우스의 은둔수도회는 이러한 결혼이나 사유재산을 선악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하여 자제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소유를 버리고 자선하는 삶은 더 나은 가치를 위하여 차선의 가치를 포기하는 훈련이었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은둔수도회를 발전시키는 동안, 또 다른 형태의 수도회가 탄생하였다. 안토니우스 추종자로 알려진 파코미우스는 수도사들이 각각의 오두막이나 방에서 살지만, 공동 공간에서 일하고, 먹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공동체 기반의 수도회가 동·서방 교회 역사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고립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수도사 공동체에 산다.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난 파코미우스는 3세기 후반 로마의 군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교 세계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전쟁 와중에 한 이집트 도시에 머물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돌봄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따라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들을 돌보아준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다. 파코미우스는 군대에서 나온 후 세례를 받고,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타베나(Tabena)에서 수도회를 시작하라는 음성을 듣고 거기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작은 수도회를 시작했다. 파코미우스에게 수도회 공동체의 필요는 자기완성이나 금욕 자체에 있지 않았다. 수도회 목적은 자신이 군인 시절 경험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같이 주변의 나그네를 위하는 돌봄 공동체였다. 파코미우스는 모든 수도사에게 동일한 음식과 의복을 주면서 수도회 생활 규칙을 도입했다. 수도사들은 공동의 덕을 위하여 순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재산도 보유할 수 없었다. 이 수도회는 순종을 그 어떤 금식이나 기도보다 높게 평가했다. 금식이나 기도는 자칫 자기 의를 쌓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공동체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남을 높이는 자세가 없을 때 유지되지 못한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하여 질서와 규칙이 필요하다. 공주수도회를 관장하는 책임자를 아바(abba)(수녀원의 경우 아마(amma))로 부르며 영적인 가족을 구성했다. 파코미우스는 수도회의 삶과 질서를 규율하는 규칙서 《아스테티카》(Astetica)를 편찬하여 공주수도회의 기반을 놓았다. 이 공주수도회 운동은 훗날 유럽에서 가장 표준적인 수도회를 만든 베네딕투스에게 영향을 준다.

수도자들 수는 빠르게 증가했고, 근처에 남성들을 위한 열 개의 수도회와 여성들이 모인 두 개의 수녀회가 지어졌다. 파코미우스가 지도하는 수도사 수는 한때 7천 명에 달하였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세속과 완벽히 고립된 공동체가 아니었다. 수도회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더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파코미우스의 수도회는 내적 완전성을 추구하기보다 사랑과 환대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애썼다. 그는 직접 아픈 수도사들을 돌보며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고 거룩한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였다.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아픈 사람들을 위한 단식 규칙을 완화하기도 했다. 공주수도회는 은둔수도회가 자칫 영적인 엘리트주의로 불릴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점을 늘 경계하였다. 파코미우스는 346년경에 전염병에 걸려 사망해 수도회 근처 언덕에 묻혔다.

안토니우스의 은둔수도회가 신적 음성을 듣기 위한 내부에 집중하였다면, 파코미우스로 대표되는 공주수도회는 타자 돌보기로 확대되었다. 이 두 수도회 전통은 세속화의 길을 가는 제도교회의 대안 공동체 역할을 하였다.

긴장을 줄 공동체

그리스도교가 제국에서 공인되고 중심을 향해 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주변으로 물러나는 선택을 한 자들이 수도회를 형성, 발전시켰다는 점은 여러 생각할 지점을 남긴다. 그리스도교가 형성된 이래 교회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단 한 사람을 뽑자면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의 로마 황제이다. 이 황제로 인해 교회가 오늘 같은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반면, 국가와 교회의 결탁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같이 들어온 일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13년은 복잡한 마음을 준다. 하지만 여기에서 놓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에 제국의 문화와 사상을 온몸으로 막아낸 순교자들이 있었다. 공인 이후 국가와 교회가 밀월 관계를 맺게 된 가운데 그 위험성을 자각한 이들이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공동체를 형성했다. 순교가 신앙을 지키기 위한 희생 그 너머의, 제국적 가치에 맞선 저항이라면, 수도회는 그 자체로 순교의 연장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남긴 역사를 보며 국가와 종교의 결탁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말고, 바로 그 시기에 그 너머의 가치를 향해 나아갔던 집단적인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313년 이래 제국과 교회의 유착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흐름이 그리스도교 흐름의 전부라고 단정하는 일 역시 섣부르다. 수도회 운동은 거대한 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종교가 설 자리가 무엇인지 본질에 대해 천착하며, 시대의 고비마다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뒤집어보자면, 수도회 해산은 국가 중심의 교회에 저항해왔던 긴 공동체 역사의 뿌리가 뽑힌 것이다. 물론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수도회 탓이지만, 장기적으로 개신교에도 유익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주의 가치에 과도하게 경도되어있는 오늘 제도교회 모습은 낯설지 않다. 곰곰이 살펴야 할 것은 그 중심을 향한 제도교회에 긴장을 줄 또 다른 주변을 향한 움직임이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주

1) Little, Lester K, ‘Monasticism and western society: from marginality to the establishment and back’, 《Memoirs of the American Academy in Rome 47》(2002), 83–94쪽.

 

■ 연재 순서

1부. 수도회의 탄생
1. 오늘 왜 수도원인가?
2. 수도원의 탄생 – 그리스도교 공인과 사막 교부들

2부. 역사 속의 수도회
3. 유럽을 만든 수도회 - 아일랜드 수도회, 베네딕트회
4. 중세 유럽의 개혁자들 – 시토 수도회와 클뤼니 수도회
5. 십자군과 수도회 –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6. 세속화에 대한 급진적 저항 – 탁발수도회의 등장
7. 여성 수도회와 대안의 종교성
8. 종교개혁, 수도원 폐쇄, 예수회
9. 근대 혁명과 수도원 파괴
10. 근대성의 종말 앞에서 – 떼제 수도회, 라브리 공동체

3부. 수도회가 남긴 현대의 유산
11. 수도사의 일상
12. 수도원이 발견한 의식주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공의회 역사를 걷다》 《왜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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