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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평소처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한가한 동네 카페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 한국 뉴스를 잠깐 확인하는 게 하루를 여는 의례였기에, 그날도 평소처럼 인터넷 뉴스 포털을 열었습니다. 그러고는 결국 일을 시작하지 못했지요. 전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생 수백 명을 태운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했다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꽃처럼 어여쁘기만 할 나이의 학생들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밀려왔습니다.며칠 뒤 주일은 공교롭게도 부활절이었지요.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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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왕상 19:11-12, 새번역)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레스 이스 모어’(less is more), 적을수록 좋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습니다. 건축에서 모든 장식적 요소를 제거하고 기능에 따른 최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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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막 9:24, 이하 새번역)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1)작년 이맘때였을 겁니다. 책상 위에 한동안 놓여있던 《따름, 그 회복의 여정》을 ‘집어 들고 읽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경험한 ‘톨레 레게’의 은혜가 밴쿠버의 방황하는 영혼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난 구절은 공교롭게도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갔다”(눅 22:54)였습니다. 멀찍이. 헬라어로 ‘마크로덴’, 시간적·공간적 길이를 뜻하는 ‘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8호 (202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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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도덕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아름다움이 필요하다.1)그리스도인은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사람이다.2)“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도스토옙스키의 이 문구를 좋아하는 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수첩에 적어놓고 다닌 적도 있었는데요. 한 번쯤 들어봤을 문장이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이 정말로 구원의 힘을 지녔다고 곧이곧대로 믿는 이가 있다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나이브하다고 타박받기 십상이겠지요. 쇼핑몰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7호 (202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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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에서 그분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몸을 가진 피조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체성을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며, 바로 그러한 신체성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지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1)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전 6:20, 새번역)요즘 무척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나탈리 칸스라는 신학자가 쓴 《모성(Motherhood)》인데요. 표지가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인데, ‘고백록’(A Confession)이라는 부제 역시 시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6호 (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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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 14:2)정현종 시인은 요새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을 꿈꾼다 했지요. 온갖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 모질고 사나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그런 이들을 먹이고 재울 그 집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일 거라고요. 시인은 이렇게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 아래에서 한숨 돌릴 그늘을 찾습니다.캐나다 밴쿠버에도 그런 비슷한 꿈을 품은 “방이 많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모나이 폴라이, 말 그대로 “많은 방”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5호 (202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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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엡 2:14, 새번역)워크온워터, 포티데이즈앤드나잇, 쓰리와이즈맨, 브레드오브라이프.우리말로 옮기면, ‘물 위를 걷다’ ‘40일의 낮과 밤’ ‘세 명의 동방박사’ ‘생명의 떡’인데요. 다 복음서와 관련한 이야기니까 찬양이나 경건 서적 제목인가 싶지만, 아닙니다. 힌트를 드리면요. 베들레헴이나 갈릴리바다가 아니라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4호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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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었다’는 실로 현대 예술 공통의 주제다.1)사실 현대미술 안에는 생명을 긍정하며 다른 이들의 영적인 건강에 관심을 두는 훨씬 많은 것이 있다.2)현대미술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관점을 고민하며 리젠트 칼리지로 유학을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 서점에서 반가운 책을 만났습니다. 당시 제 롤모델이던 한스 로크마커의 전집을 발견한 겁니다. 게다가 세일까지 해준다니, 팍팍한 유학생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섯 권짜리 두꺼운 하드커버 전집을 덜컥 사버리고 말았지요. 현대미술에 막연히 관심을 두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 제가 태어난 해에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3호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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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만든 예술품이다.1)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창 1:31, 새번역)밴쿠버의 석양은 참 아름답습니다. 키칠라노 해변 가까이에 살던 시절, 해 질 무렵 바닷가로 자주 산책을 나가곤 했습니다. 못내 아쉬웠던 태양이 남기고 간 불그레한 자취로 한껏 달아오른 하늘과 그 위로 단아하게 브이 자를 그리며 집으로 날아가는 구스 친구들, 파도마저 잔잔해진 고요한 바다 위에 수를 놓듯 돛단배들이 떠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늘과 땅의 얇은 틈새로 창조주의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2호 (202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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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후 5:17, 새번역)수천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소명은 우리 자신이 “새 창조[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동시에 또한 새 창조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불의와 부패가 가득한 세상에서 새 창조로 살아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겠지요. 또한 우리는 마침내 올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표지를 만들어내는 공동 창조자들이 되어야 합니다.1)사도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kainē ktisis, new creation),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1호 (202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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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은 훌륭한 옷장이나 벽난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늑하면서도 웅장하고, 친근하면서도 신비롭고, 압도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맞아주니까요. 그것은 저만치 자리를 잡고서 우리를 넉넉히 기다립니다. 또, 중요한 무언가를 그 안에 담고 있지요. …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바로 다름(otherness)을 사랑하게 되는 비밀, 이기적인 자아와는 구별되는 만물의 부요함을 사랑하게 되는 비밀입니다.1)이 글을 읽으며 커크 교수의 시골 저택에 있던 크고 비밀스러운 옷장, 호기심 가득한 루시를 나니아로 안내했던 옷장이 떠올랐습니다. 그 옷
예술, 구원을 묻다
백지윤
410호 (2025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