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호 예술, 구원을 묻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 14:2)

정현종 시인은 요새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을 꿈꾼다 했지요. 온갖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 모질고 사나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그런 이들을 먹이고 재울 그 집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일 거라고요. 시인은 이렇게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 아래에서 한숨 돌릴 그늘을 찾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도 그런 비슷한 꿈을 품은 “방이 많은 집”이 하나 있습니다. 모나이 폴라이, 말 그대로 “많은 방”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집입니다. 번역가를 위한 환대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는 오랜 바람에서 시작된 곳인데요. 현실을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꿈이었지만, 어느 날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monai pollai)”며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알 수 없는 확신과 무모한 용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모든 것은 만물이 깃들 만큼 넉넉한 아버지의 집, 그 환대의 풍요로움을 나누고 맛보고 싶다는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후 정말로 ‘방 많은’ 집으로 이사하고, 번역가뿐 아니라 한숨 돌릴 작은 그늘이 필요한 이들에게 열려있는 게스트룸 ‘친구들의 방’을 꾸몄습니다. 그렇게 모나이 폴라이의 환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정현종 시인의 아름다운 시도 모나이 폴라이에 묵으셨던 귀한 손님이 주고 가신 특별한 선물이랍니다. 특별한 환대의 공간을 꿈꾸며 시작한 모나이 폴라이는 문화와 영성이 만나는 공간이 되고 싶기도 합니다. 버려져있던 뒤뜰의 헛간을 고쳐 만든 소박한 워크숍 공간에는 비움을 통해 채움을 경험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플레로마’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밴쿠버 도심 한복판에 대책 없이 모나이 폴라이를 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환대란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베풂을 통해 채워지는 신비를 맛보라는 하나님의 초대임을 천천히 배워가는 중입니다.

환대에 관하여

요즘 어디서나 환대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듣는 것 같습니다. 복음 전도나 영혼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진 기존의 교회에서 환대라는 말이 낯설기만 했던 것을 생각하면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지나가는 유행이 아닐까 싶어 지레 씁쓸하기도 합니다. 환대는 그저 한때 반짝 관심받고 지나가서는 안 될 기독교 신앙과 전통의 핵심 가치이자 실천이기 때문인데요. 환대는 우리가 믿는 것에 관한 심오한 통찰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구원이란 그저 심판에서 면해지는 것을 넘어, 궁극적으로 우리를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환대라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지요.

성경에서도 환대를 몇 차례 직접 언급합니다. 그중 한 구절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입니다.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를, 사실은 하나님(의 천사들)인 것을 알지 못한 채로 극진히 환대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지요. 여기서 “손님 대접하기”로 번역된 헬라어 ‘필록세니아’(philoxenia), 곧 환대(hospitality)는 ‘사랑하다, 친구가 되다’를 뜻하는 필로스(philos)와 ‘낯선 이, 이방인’을 뜻하는 크세노스(xenos)를 합친 단어인데요. 말 그대로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 낯선 이와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환대는 나와 다른 낯선 존재에서 출발할 뿐 아니라, 타자를 향한 개방성과 포용성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예가 보여주듯이, 타자를 향해 문을 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문을 여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신학자가 타자와의 만남을 하나님을 아는 것 혹은 초월의 경험과 연결해서 이해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성과 초월》에서 타자의 얼굴은 나를 초월하는 가장 근원적인 윤리적 요청으로 다가온다고 말합니다. 타자와 맺는 윤리적 관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는 초월적 차원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성공회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도 창조세계의 본질적 타자성에 대한 주의력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성장의 필수 요소로 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창조질서나 아름다움의 순전한 타자성에 몰입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 몰입이 지배적인 자아가 자리에서 밀려나는 근본적인 전환을 수반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전환 없이 영적 성장은 일어날 수 없다.”1)

윌리엄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는 타자를 향한 환대는 근본적인 자아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수반합니다. 이는 내 지식의 한계와 유한성, 내가 믿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에 타자를 맞아들이는 환대는, 진리를 대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이 믿는 진리가 절대적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요. 실로 우리 손에 쥐거나 통제할 수 없는, 살아있는 진리이신 예수님은 겸손하고 차별 없는 사랑으로 가는 곳마다 참된 환대를 통해 샬롬을 이루셨지요.

우리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에게 열려있는 환대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열망하는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분의 사랑과 샬롬의 실재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의 이야기, 곧 창조와 구속, 완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환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창조는 자신을 제한하고 하나님 아닌 것(not-God)들을 위해 존재의 공간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환대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죄로 인해 소외된 하나님 아닌 것들을 다시 품으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환대의 완성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환대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영원한 사랑의 친교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로부터 시작됩니다.

환대의 근원, 삼위일체의 신비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완벽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인간 공동체의 환대와 화해의 기초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 위격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상호적 사랑의 관계 안에 거하는 삼위일체의 본성이 인간 사회에서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는 포용과 환대의 기반이 된다는 말입니다. 모더니즘 미술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회화 〈춤(Dance)〉(1910)은 이러한 환대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 생명, 즉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내주)를 잘 보여줍니다. 마티스가 그려내는 부드럽고 역동적인 춤의 이미지는 세 분의 고유한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완벽하고 조화로운 연합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엿보게 합니다.

앙리 마티스의〈춤〉
앙리 마티스의〈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 14:2)

구독안내

이 기사는 유료회원만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 온라인구독 회원은 로그인을 해주시고 인증 절차를 거치면 유료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후원구독(월 1만 원 이상), 온라인구독(1년 5만 원) 회원이 아니시면 이번 기회에 〈복음과상황〉을 후원, 구독 해보세요.

저작권자 © 복음과상황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