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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하지 말라. 모세가 받았다는 십계명 여섯 번째 계명이다. 하ᄂᆞ님이 친히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도,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몸에 이미 새겨져있는 계명이다. 사람들 사는 곳에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이 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살인은 꺼려지는 것이다. 불가피한 경쟁도, 시비를 가리는 다툼도, 아무리 선한 싸움도, 살인에 이르도록 치열해선 안 된다. 안타깝게도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편들다 사람을 죽였다. 살인이 들통나자 광야로 도망쳤다. 명분 있고 우발적이었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적용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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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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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아스팔트 위에선 앉아쏴, 고층 빌딩에선 조준 사격으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쐈다. 총 맞아 쓰러진 사람을 부축한 이를 향해서도 조준 사격을 했다. 당시 발포에 대해 전두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 변명했다. 국제법상 자위권(自衛權, self-defence in international law)이란 외국 군대가 불법 침입했을 때 자국민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전두환은 계엄군의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불법 침입한 외국 군대로 다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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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18호 (202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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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 천장엔 파리 끈끈이가 기다랗게 늘어져있고, 죽은 지 사흘이 한참 지나 발인마저 끝났을 파리들이 끈끈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붉은 형광등이 고깃덩어리를 비추고 있다. 죽은 파리들이 매달려있어도, 고깃덩어리는 형광등 붉은빛을 받아 갓 도축한 양 신선해 보인다. 어둑해질 무렵 붉은 형광등은 또렷하다. 저녁거리를 준비하거나 고기를 선물하려는 이들은 멀리서도 정육점을 알아볼 수 있다. 정육점은 이름 적힌 간판이 필요 없다. 붉은 형광등을 반사하는 고깃덩어리가 정육점 이름이었고 간판이었다.반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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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16호 (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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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읽지 않았는데도 뇌에 눌어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68년 12월 5일 박정희가 발표한 국민교육헌장 첫 문장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왜 국가가 규정하는가. 한반도에서 섹스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인가. 국민교육헌장은 초등학교 졸업반(1987년)까지 교과서 속표지에 궁서체로 박혀있었다.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국민교육헌장은 “이다지도 욕될까”.형식적인 국무회의를 거치고 의례적으로 국회가 의결해 박정희가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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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14호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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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야외 예배 자리에서 문용동 전도사는 참 재미없고 깐깐한 설교를 했다. 1980년 5월 13일에 문용동 전도사(1952-1980)가 전남노회 여전도연합회 회원들과 상무대(육군 군사교육 시설)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며 나눈 설교 원고다. “신자는 저 높은 곳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나 혼자만 구원받고, 은혜받고 성전의 높은 담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골방에서 주를 만나 새 힘을 얻고, 다시 밑의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 많은 교회(가) 자체 내의 프로그램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1) 문용동은 당시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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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12호 (202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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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준비하며 병상 확보를 위해 와상 장애인들을 죽였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없는 우수한 아리안족만을 남겨야 한다는 게 히틀러의 판단이었다. 전쟁에 병사로 동원될 수 없거나, 장차 병사로 동원될 아이를 낳지 않을 사람들은 그 존재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고 실제로 처형된 셈이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은 전쟁 전에도 사람을 죽이며 전쟁을 준비했다.2024년 12월 2일 수도권 군 병원들에서 “환자 수가 폭증하는 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을 실시”했다고 한다.1) 군 병원에 이송될 환자들은 군인들일 것이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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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10호 (202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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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0일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 14화. ‘동훈’은 영화관 객석에 앉아있고, 〈박하사탕〉이 상영 중이다. 영화 〈박하사탕〉 속 ‘김영호’는 5·18 당시 민간인을 죽인 공수부대원이었고,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는 경찰이었다.〈나의 아저씨〉 14화 앞부분에선 ‘동훈’의 초등학교 동창 ‘애련’이 금기어였던 ‘윤상원’을 “우리의 추억”이라고 선언한다. 드라마 속 ‘윤상원’은 스님이다. 출가한 ‘윤상원’을 여전히 사랑하는 ‘정희’를 배려하느라 ‘윤상원’의 친구 ‘동훈’을 비롯해 동네 선후배 모두가 ‘윤상원’의 이름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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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08호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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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령관 이희성이 전남경찰국장 안병하에게 “경찰이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안병하는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한다. “경찰은 시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2019년 2차 경찰 시험 문제에 소개된 안병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경국장으로서, 과격한 진압을 지시했던 군과 달리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 등과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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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06호 (202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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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나.”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김남주는 저도 모르게 쌍욕을 해버렸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라디오에서 박정희가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를 해산했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했고, 언론을 사전 검열했고, 대학 휴교령을 내렸고, 직장 이탈을 금했다. 스스로 초법적 존재가 된 박정희는 김남주에게 “싸가지 없는 새끼”였다.당시 김남주(1946-1994)는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다. 김남주는 해남중학 시절부터 친구이자 동지인 이강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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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04호 (202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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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역사 선생님 별명이 고인돌이었다. 고인돌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학기 초에 기강을 잡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체벌을 가하셨다. 요새 기준을 따른다면 분명 폭력 교사지만 그땐 거의 그랬다. 수업도 재미없었다. 기계적으로 연도를 외우고, 시대별 문화재 이름들을 주워 담으며 선다형 문제집만 풀어대는 수업이 재밌을 리 없잖은가.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고인돌은 나를 싫어했다. 폭력적이고 지루한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기까지 하시니, 나 또한 역사 과목과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고인돌이 울었다. 1992년 5월 18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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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402호 (2024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