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호 봄봄]

구 광주적십자병원 건물. (사진: 2018.9.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구 광주적십자병원 건물. (사진: 2018.9.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정육점 천장엔 파리 끈끈이가 기다랗게 늘어져있고, 죽은 지 사흘이 한참 지나 발인마저 끝났을 파리들이 끈끈이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붉은 형광등이 고깃덩어리를 비추고 있다. 죽은 파리들이 매달려있어도, 고깃덩어리는 형광등 붉은빛을 받아 갓 도축한 양 신선해 보인다. 어둑해질 무렵 붉은 형광등은 또렷하다. 저녁거리를 준비하거나 고기를 선물하려는 이들은 멀리서도 정육점을 알아볼 수 있다. 정육점은 이름 적힌 간판이 필요 없다. 붉은 형광등을 반사하는 고깃덩어리가 정육점 이름이었고 간판이었다.

반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으니까, 여름이었다. 나는 여섯 살이었다. 친구들이랑 놀다가 5시 30분까지 들어가야 했는데, 시계 차지 않은 아이가 한여름 5시 30분을 가늠하긴 어려웠다. 여름 잔빛이 남아있었지만,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가게들이 불을 켜고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육점 붉은 불빛도 들어왔다. 분명 정육점이라 여겼는데, 뭔가 이상했다. 동네 거리에 겨우 하나 있을, 많아야 두 개 있을 정육점이 여럿이었다. 재래시장 안에 정육점이 밀집해있는 곳이라도, 이렇게 많진 않을 텐데, 좌우로 정육점 붉은 형광등 빛이 뿜어져 나온 길은 낯설었다. 좌우로 도열한 정육점 불빛을 보고, 집에 갈 시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육점 진열장에 사람이 앉아있었다. 육상경기 신호총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호총이 나를 향해 쏘는 듯해 무서웠다. 뛰었다. 왜 살아있는 사람이 정육점 붉은 형광등 아래에 앉아있는 건지, 피부가 벗겨지지 않았는데, 왜 껍데기 벗겨진 고깃덩어리처럼 붉은 형광등 빛을 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1981년 여름에 여섯 살 아이가 고깃덩어리처럼 진열된 사람을 본 곳은 광주 황금동 끝자락이다. 당시 황금동은 유흥업소가 밀집한 사창가를 품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황금동 콜박스’라 이름하던 곳은 전남도청에서 7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중심 시가지라, 사람들이 어딘가 위치를 설명할 때 흔히 쓰는 이름이기도 했다. 옛 광주읍성 서문 터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전남도청 지척인 ‘황금동 콜박스’를 중심으로 일하던 여성들은 1980년 5월에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계엄군이 무얼 하는지, 눈앞에서 목격했다. 계엄군에 쫓긴 시민들이 황금동 유흥업소로 피해 들어가곤 했는데, 숨겨주었다. 유흥업소는 때로 단속을 피해야 하는 공간이다. 경찰이 나오면 손님을 빼돌리기도 해야 하는 공간이라, 계엄군을 따돌리기에 유용했다. 계엄군이 들이닥쳤을 때, 작업 한복을 입고 있던 여성이 치마 속에 숨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압봉과 착검과 총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기독교병원, 적십자병원, 전남대학교병원, 조선대학교병원 등 도청 인근 병원으로 실려 왔다. 피가 부족하단 소식을 듣고, 헌혈하게 해달라며 시민들이 울면서 병원으로 몰려왔다. 적십자병원은 황금동 콜박스에서 600미터 정도 거리에 있어, ‘황금동 콜박스’ 언니들도 줄을 섰다. 그러나 윤락 여성이라는 이유로 헌혈을 거부당하자, 피가 더러운지 깨끗한지 검사라도 받게 해달라며 항의했다고 한다. “내 몸은 더러워도 내 피는 깨끗합니다.”1) 전남대학교병원에선 어렵지 않게 헌혈할 수 있었지 싶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느낌을 주는 여성들도 수십 명이 울면서 병원을 찾아와 헌혈을 해 주었다.”2) 황금동 콜박스 여성뿐 아니라, 10대 어린 학생들도 일흔 넘은 어르신들도, 울면서 헌혈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어린 학생과 어르신이 헌혈하지 않아도 될 만큼,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선 줄은 길었다. 기독교병원에서 헌혈하고, 다시 헌혈차를 타고 돌아가던 박금희(전남여상 3학년)는 헌혈차를 향해 계엄군이 난사할 때 차 안에서 총에 맞았다. 헌혈하고 한 시간 뒤 죽어서 기독교병원으로 실려 왔다. “양림동 건너가는 양림다리 다급한 호소였다 / … / 피를 나눠주세요 / … / 저도함께 가겠어요 / 전남여상 3학년 여고생 박금희 / … / 기독교병원 헌혈하고 돌아오는 길 / 탕 탕 탕 / 헬기에서 쏜 / 총 맞아 / 거리에 피 다 쏟아버렸다”3) 헌혈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 피를 나누었다.

또, 밥을 나누었다. 양동 시장, 대인동 시장 상인들이 추렴해서 모은 쌀을 쪄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방앗간에서 몰래 밥을 찌기도 했고, 길목에 솥을 걸어 갓 지은 밥을 나누기도 했다. 시민군 먹일 밥을 할 때도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이 나섰다.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은 헌혈할 때도, 밥을 지을 때도 수십 명이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함께 밥을 짓는 시민들이 볼 때,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었지 싶다. 5·18 당시 중학생이었던 정경숙은 부모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물이랑 밥 지어서 날라주고 와서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는 거예요.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로 열심히 한다고. 음식도, 시민군들 뒷바라지도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이라고.”4)

교회는 예배드릴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 성찬례를 통해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고 고백한다. 예배 시간에 먹고 마시는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 믿기도 하고,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예배드리는 이들이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는 몸으로 변화되는 신비가 있다면, 화체설이든 상징설이든, 혹은 공재설이든 기념설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예배드리는 이들에게 생명이면 된다.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이 함께 모여 피를 나누고 밥을 지어준 것은, 분명 생명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싶다는, 살아가는 사람을 먹이고 싶다는 욕구야말로 생명의 활동이다. 폭력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위해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이 지은 밥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폭력에 희생당한 시민들을 위해 헌혈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데, 스승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길이 다했을 때 제자들이 예수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한다. 예수께서 떡을 떼어 나눠주실 때에야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본다. 이상한 이야기다.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께서 떡을 떼어주는 순간에 예수를 알아보는 이야기를 통해 누가는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 누가는 부활한 예수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 걸까.

떡을 떼어주는 얼굴에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확인한다. 부활의 시제는 과거완료라기보다 현재(완료진행)형 아닐까. 예수는 지금도 부활한다. 떡을 떼어주고 피를 나누는 현장에서 부활의 시제는 현재다. 밥을 먹이고 피를 나누는 사람에게 예수는 부활한다. 적어도 5·18 광주에서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을 비롯해 밥을 먹이고 피를 나눈 사람에게 우리는 하ᄂᆞ님을 뵙는다. 사람 예수를 통해 하ᄂᆞ님을 뵙듯, 예수처럼 떡을 떼는 사람을 통해 하ᄂᆞ님을 뵙는 것이다. 사람은 인생의 어느 때 불꽃처럼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 영원과 닿는 순간이 있다. 인간이 신과 접속되는 순간이 있다. 순간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눅 24:31)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콜박스 여성들” “특수 직업 종사자들” “윤락 여성들”이 5·18 관련 문서들에 등장하지만, 고유명사로 소개되거나 1인칭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없다. “황금동 유흥가의 아가씨들이 양푼과 밤색 고무대야에 물을 떠 와서 최루탄에 고통스러워하는 시위대에게 제공”5)했다는데, 황금동 아가씨들 이름은 모른다.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은 옷가지와 신발들을 모으고, 계란 한판을 들고와 황금동 끝자락 수퍼에 맡겼다는데, 그 이름들을 모른다.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자에 관한 상세 정보가 없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도 존재하나 그 이름을 모르는 존재자가 등장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불꽃처럼 타오르며 히브리 사람을 구하라 말씀하시는 존재자, 그 이름을 우리는 모른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I am who I am)”라고 소개하시던, 분명 존재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존재자를, 나는 하ᄂᆞ님이라 고백한다.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 중, 5·18 유공자로 등록된 사람이 없고,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 이름을 알려주며 무엇을 했는지 증언한 사람이 없다. 5·18 현장에서 밥을 짓고 피를 나누는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을 목격한 사람은 넘치는데, 그 이름을 아는, 혹은 알려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당사자 중 단 한 명도 자기 행위를 말해주는 이 없다. 5·18 광주처럼, 광주 안에서도 고립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퇴폐하고 문란한 존재라는 낙인으로 인해 5월의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들은 ‘시민’의 자리조차 할당받기 어려웠다. 이들을 한사코 지우려 들던 건 계엄군만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항쟁이 종료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까지 어떤 목소리도 들려온 바 없다.6)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 여성들〉을 처음 보았을 때, 슬펐다. 여섯 살 때 유리 진열대 안에 앉아있던 황금동 콜박스 여성들이 떠올랐다. 피카소 그림을 해석할 역량이 내겐 없다. 그림을 보며 슬퍼하는 게 피카소가 의도한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교과서 속 작은 그림을 오래 들여다봤었다.

피카소의 〈아비뇽 여성들〉(1907)
피카소의 〈아비뇽 여성들〉(1907)

그때 정육점에선 고깃덩어리를 신문지에 싸주었다. 신문지 두 장을 덧대어 마름모 모양 되게 틀어 고깃덩어리를 올린 후, 두 번 말아 접은 다음, 좌우 귀퉁이를 모아 붙이고, 마름모 남은 꼭지를 끼워 넣었다. 신문지에 말린 고기를 꺼내면 돼지고기 껍데기에 신문지 글씨가 묻어 나오기도 했다. 황금동 콜박스 언니들 이야기는 돼지고기 껍데기에 묻어있던 신문 기사처럼, 앞뒤를 헤아리기 어려운 조각 기사와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어떤 자료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를 쓰기 전에 한강이 한 달 동안 매일 9시간씩 읽었다는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 9백여 명의 증언이 소개되지만, 황금동 콜박스 여성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여섯 살 아이였던 내가 1981년 여름, 무서워서 빠르게 지나쳤던, 유리 진열대 안에 앉아있던 여성들 중 누군가는, 1980년 5월에 밥 짓고 피 나누던 현장에 계시지 않았을까. 1980년 5월 처참했던, 통신과 도로가 막혀 ‘바위섬’ 같던 광주에서, 황금동 콜박스 레드마리아는 밥과 피로 여느 시민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진 않았을까. 5·18은 언젠가 헌법 전문에 수록될 것이다. 광주는 더 이상 ‘바위섬’이 아니다. 길이 끊겨 참혹했던 열흘, 그러나 밥과 피를 나누는 찬란했을 열흘, 지나고, 다시 유리 진열대에 갇힌 채, 붉은 형광 불빛에 고깃덩어리처럼 전시되는 사람들이 있다. 존재하지만 존재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하ᄂᆞ님을 닮은 사람들이 있다.

■ 주

1) 정미경,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 〈오마이뉴스〉(2018.5.18.)
2) 서순팔, 〈헌혈에 동참한 광주 시민들〉,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전남대학교병원, 2017)
3) 고은, 〈만인보단상 3689〉, 《만인보》
4)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
5) 김상집, 《윤상원 평전》(동녘, 2021), 215쪽.
6) 정유승, ‘5·18의 황금동, 그리고 ‘빛’고을이 비추지 않는 세계’, 〈한겨레〉(2021.5.25.)


김영준
1980년에 다섯 살이었다, 초·중·고를 광주에서 다녔다, 3개월에 한 번 양림동과 금남로를 걷는다, 김포에서 모이는 민들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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