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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이완(가명, 37세)을 만났다. 벚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하천길을 지나 그의 집으로 가는 길, 평소 출퇴근하면서 보는 이 하천길을 좋아한다고 했다. 동네의 예쁜 풍경을 소개하기 바쁜 그를 보며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의 시선은 이토록 부지런하구나 싶었다. 청소는 했지만 지저분하다는 말과 달리, 집은 단정하고 온화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답게 영화 포스터와 기념품이 곳곳에 있었는데, 비닐에 곱게 싼 〈콘클라베〉 포스터와 그가 2024년 ‘올해의 영화’로 꼽은 〈로봇 드림〉 속 주인공 ‘로봇’의 얼굴이 눈에 띄
공간을 찾아서
박진영
416호 (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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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깨어 있어라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 25:13)2021년 9월에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붉은지구〉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4부작 구성의 이 다큐멘터리는 용암처럼 빨갛게 끓고 있는 지구 모습과 함께 마태복음 구절을 보여주면서 시작했다. 공영방송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 성경 말씀이 나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시청하는 동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이, 지구가 끝날 수도 있겠다’라는 위기감이 들면서 더 큰 공포가 이어졌다.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생명을
공간을 찾아서
박진영
414호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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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일흔하나 만에 처음이지. 혼자 사는 건.”‘처음’을 힘주어 말하는 표정에서 맑고 개운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배 속에서부터 꽉 막혀있던 체증이 뻥 뚫린 듯한 시원함이 얼굴에 퍼졌다. 1인 독립생활 9년 차를 맞이한 권유빈 님(가명, 79세)을 서울 구산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혼자’라는 말에는 외로움이나 고독감이 아니라 성취감, 해방감 같은 것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2017년 남편이 죽고, 같은 해 아들이 결혼하면서 70년 만에 비로소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결혼해서
공간을 찾아서
권유빈
413호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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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 들으면 좀 재밌을 건데.” 태운1) 씨가 말했다. 타고난 듯한 그 유머러스함에 긴장이 좀 풀렸다. 환자복 위에 허리보호대까지 착용한 상태에도 그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대구2)에서 살고 있는 빌라의 집단 전세사기 피해가 방송되고, 직장에서 계약 종료를 맞고, 피해자대책위 활동과 생업을 병행하려 얼마간 다시 배달 일을 하다가 불법 유턴을 하던 차에 교통사고를 당한 상황이었다. 흉추 골절 등으로 전치 12주 부상을 입었고, 입원 때문에 긴급 생활비 지원이 끊겼다.3)배달은 태운 씨에게 일의 시작점이자 가장 오래된 경력이다.
공간을 찾아서
정태운
412호 (202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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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1) 씨가 한국 사회에서 성인이 되고 가장 오래 산 집은 고시원이다. 서울 신림동. 집 기억이 시작되는 공간은 서울 포이동2), 아버지 사업이 잘되면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중계동 아파트로 이사했고, ‘학세권’으로 유명한 중계동 ‘은행사거리’ 학원을 다니며 그룹 과외도 받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부족함 없던 어린이였다. 풍족한 날이 지속되지 못한 건 “IMF가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업장은 외환 위기가 터진 이후 치솟는 금리를 버티지 못했다. 외가·친가랄 것 없이 가족 빚까지 쌓인 아버지는 결국 1년 뒤 도산했
공간을 찾아서
박현수
411호 (202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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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인터뷰를 시작하며1)2021년부터 터진 전세사기 문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상 피해자로 인정된 사례만 2만여 건, 그중 70% 이상이 20-30대 청년이다. ‘너무 비싼 집값, 낮은 사회주택 보급율’이라는 삭막한 현실에서 청년들은 비교적 낮은 가격대로 주거할 집을 찾고, 주로 빌라나 원룸(다세대·연립주택)으로 독립 가구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정부가 보증금 대출이자를 지원하는 방법으로 그간 청년 주거를 지원해온 사실은 전세사기의 주 타깃이 청년인 현실과 무관할 수 없
공간을 찾아서
박혜빈
410호 (2025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