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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이었다. 그가 보내는 어느 날도 평범할 순 없지만, 이 지역에서 비교적 무난한 축에 속하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10여 년 전 발생한 22일간의 폭격 속에서 가족과 살아남은 기적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디서든 갑자기 통제당하는 그 지역의 오래된 현실에 좌절감을 느낄 나이에서도 한참 멀어진 그였다. 1973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태어났고, 그때는 이미 팔레스타인 영토 상당수를 이스라엘이 강제 점령한 시기였으니까. 통제받는 식민지의 삶은 아마도 그의 성장 과정 자체이자 매일의 악몽이었겠지만, 그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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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409호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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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6년 8개월의 시간 동안 추위는 견딜 만했다. 우리 단체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 중에 4층에 있는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상 주차장과 철근으로 만든 아슬아슬한 외부 계단이 있었던 사무실 건물은 밝은 회색빛 페인트로 새롭게 단장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우지 못했다. 건물주의 배려로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유지했던 단체 사무실은, 입사했을 당시 사무국장 대행 1명과 회계 담당 간사 1명 등 총 2명이 채우기에는 매우 넓은 공간이었다.내 자리는 좌측 창가 자리였는데, 사무실 문을 열면 내 모니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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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408호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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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두 살배기 딸을 키우는 친구가 있다. 여느 때처럼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이 걸음에 맞추면 30분 정도 걸리는 S 아파트 단지 쪽으로 딸을 데리고 외출했다. 그녀가 사는 여덟 세대 연립주택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 놀이터가 바로 그 아파트 단지 앞에 있기 때문에. 마침내 당도한 놀이터에서 아이를 놀리는 중에 다른 엄마가 딸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고 한다. “얘~ 너는 몇 동 사니?”이 질문을 받고 내내 기분이 언짢았는지, 친구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내게 물었다. “그 엄마 정말 웃기지 않아?” 갑자기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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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407호 (202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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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는 생각보다 안온했다. 작은 테이블 하나와 고객용으로 준비된 파란색 다리에 검은색 뚜껑의 간이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다. 사주 상담사는 메뉴판을 주고 ‘어떤 상담’을 받을 것인지 물었다. 메뉴는 다양했다. 관상, 손금, 연애운과 금전운, 그리고 사주풀이. 고민 없이 사주풀이를 선택하자, 1인당 2만 원이라고 했다. 분명히 외부에 세워져있던 입간판에는 ‘사주 5천 원’이라고 쓰여있었는데…. 의아해하자 상담사는 그건 약식이고 1인당 2만 원을 내야 ‘정식’ 사주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 식사에도 정식과 간식이 있듯이 사주에도 정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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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406호 (202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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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길과 북촌로길이 만나는 길모퉁이 꼬마 건물 1층엔 ‘카페 무에’가 있다. 건물의 동쪽 앞으로 난 작은 앞마당은 보기에도 참 좋은 장소여서 길을 지나치던 누구라도 멈칫해 괜히 기웃거리다가 머무르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마당을 향한 벤치가 통유리창 벽에 설치되어있고, 코너에는 단풍나무가 있는 곳.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우리가 이 동네에 이사 오고 반년은 임대 광고만 붙은, 주인 없이 방치된 공간이었다. 바로 옆 건물 1층도 공실이어서 코로나로 상권이 죽었나 보다 했는데, 2018년 이후로 쭉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인터넷 지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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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405호 (2024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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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갔다.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영화관 나들이는 마음먹은 지 석 달 만에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사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영화표 가격 때문에 고민하는 사이 그 영화는 상영관에서 내려가고 말았다. 다큐멘터리영화라 상영관도 많지 않았고 상영 시간도 비인기 시간대였다. 1만 5천 원이라는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라고 하지 않나.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관객들에게 오기까지 닿았던 수많은 손길, 시간과 정성은 영화표 가격이 모두 담을 수 없을 것이다.문제는 ‘지금 상영되는 영화는 좀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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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404호 (202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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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져와야지!”처음 보는 할머니가 느닷없이 큰소리로 반말을 던졌다. 블라우스 사이즈를 교환하러 온 그녀에게 사이즈 재고를 확인해주고 그 제품으로 직접 가져오면 된다는 안내를 마치자마자. 소리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세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이 할망구가…”라고 손님한테 말할 순 없으니. 직원 수가 적은 평일, 기다리시라는 말을 전한 후,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도 위치를 잘 모르는 ‘이 할망구’ 물건을 재빨리 찾아와 처리했다. 원래는 손님에게 할인 방법이나 세탁 정보라도 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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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403호 (2024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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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그게 무슨 소리야?”야구는 모른다. 스포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에는 더더욱 흥미가 없다. 몇몇 화제가 되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만 찾아본다. 특히 야구는 현장에서 보는 것도, 중계를 보는 것도 딱히….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20대 초반, 야구팬이던 친구를 따라 몇 번 야구장에 갔을 때, 깎아지른 경사에 촘촘하게 놓인 플라스틱 의자도 불편하고, 경기 내내 야구공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많은 관중이 막대풍선을 두들겨 내는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찬 그 장소는 내 취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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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402호 (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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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장 무력함을 느끼는 일이 뭘까.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감각해본 적 없는 감각, 눈앞에 성큼 다가온 죽음 앞에 놓이면 비로소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진실로 느낄 것이다. 무력감, 그 감각이 일상화되는 시공간이 곧 전쟁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인적 드문 길 위를 달리던 9인승 밴이 멈추고 문이 열린다. 몸으로 운반할 짐만 챙긴 사람들이 빈 좌석을 채우기 시작한다. 밴은 두세 번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며 승객을 다 태웠는데,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종종 멈춰선다. 파손된 도로, 끊어진 다리 때문이다. 지뢰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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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401호 (2024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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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어디에 있을 때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다는 것은 또렷하다. 그야말로 삼복더위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조치원(현 세종시), 살던 집에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산골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안골’로 불리는 동네에서 사셨던 할아버지를 뵈려면 서울역에서 무궁화 열차를 타고 조치원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 뒤 종점에서 내려 또 한 번 버스를 갈아타고 내려서 걸어 올라가거나, 마중 나오시는 큰아버지 트럭을 타고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불러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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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400호 (2024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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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뒤척임도 느끼지 않고 오롯이 뇌가 깨서 일어났다. 어제 단 복숭아색 커튼이 눈앞에 있고, 대각선 왼쪽에 자리한 원목 책상엔 아직 정리 못 한 물건들이 그대로다. 원래는 책상만이 유일한 내 공간이었다. 그 옆에 새로 들어온 장롱은 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느낌을 연출한 빈티지풍, 동그란 돌출형 체리색 문고리가 주는 귀엽고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을 뺏겨 선택한 물건이다. 비로소 이 공간이 진짜인 게 실감 난다. 수사자 얼굴이 회전하는 쓰레기통, 강아지 모양 전화기도 이곳에 있다. 예닐곱 살 때부터 본능처럼 갈망해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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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399호 (202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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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형 인간은 아니지만, 계획을 세울 때면 기분이 좋다. 빳빳하고 부드러운 종이에 잘 굴러가는 펜으로 성장·희망·완성 같이 기분 좋은 말들을 떠올리면서 한 해의 계획을 쓸 때 벌써 꿈을 이룬 것 같은 느낌이다. 2024년도 어김없이 새로운 다이어리를 활짝 펼쳐 ‘올해 계획’을 적어볼 참이다. 유난히 올해 더 기운찬 이유는 2023년 덕분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세운 계획 ―체력을 기르자, 영국에 가자, 출판을 하자― 을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두고두고 꺼내 볼 소중한 성취는 영국 방문이었다.10년 전, 나는 서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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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398호 (2024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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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피아노가 사라진 건 16년 전이다. 4인 가족의 이사 앞에서 결국 팔려나갔다. 당근마켓도 없던 시대, 중고 거래가로 봐도 덩치를 생각해도 존재론적 지위가 아슬아슬하던 용품. 기억에도 생생한 엄마 말로 피아노는 성인 남자 여덟 명이 붙어도 낑낑댈 정도로 무거운,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었다. 황동색 굵은 돋움체 영어 로고가 교본 받침대 아래 박힌 갈색의 업라이트 피아노. 서로 다른 시기 피아노를 배운 8년 터울의 언니와 내가 연습하고 연주도 한 이 건반 악기는 25년 넘게 눌리고 눌리면서 한 번도 조율된 적이 없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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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397호 (202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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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가 꿈이라니. 내 꿈은 오주아파트였다. 오주아파트가 ‘되고 싶다’는 말은 아니고, ‘갖고 싶다’라는 것이 아직 분명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오주아파트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우리 동네에서 꽤 높은 건물이었던 오주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경비 아저씨의 삼엄한 수비를 뚫고 잠입에 성공한 날이면 하릴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무섭기도 했지만, 신기했다. 그렇다고 자주 타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엘리베이터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 아파트 주민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볼 일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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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396호 (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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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는 조용하고, 인적은 드물다. 동네 초입에 있는 슬레이트 판 지붕 아래 어느 가게 출입문 유리엔 빛바랜 우편물 도착 안내 스티커가 여러 장 붙고, 우편물 뭉치가 문고리에 수북이 쌓였다. 철물점? 아니면 조명 가게였나. 나무 창틀, 쇼윈도 너머의 레트로풍 유리 갓 조명이 눈에 띈다. 전구 상자, 전선, 소켓 같은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인 선반은 먼지가 뽀얗다. 알루미늄 새시로 된 문이 굳게 닫힌 바로 옆 공간은 블라인드로 반쯤 가렸다. ‘세탁기 칼라TV 수리 매매.’ 여전히 견고해 보이는 옛 간판을 보니 꽤 오래전 시작한 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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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395호 (202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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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가능하다면, 카페를 열고 싶다. 가끔 일상에 지침과 피곤이 몰려올 때 이 상상만으로도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열고 싶은 카페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만 여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365일 동네를 지키는 당산나무 같은 카페다.아침 카페는 공간이 좁아도 상관없다. 커피머신 한 대 놓고, 아침 식사가 될 만한 간단한 샌드위치나 크루아상과 함께 커피 및 음료를 판매하고 싶다. 오고 가는 고객들과 아침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오늘 하루의 행운을 빌어주는 곳. 회의 때문에 긴장도가 높아지거나, 신나는 주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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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394호 (2023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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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여행 자금을 모으려 창고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델리 부서에 배치받은 나는 매일 출근 토큰을 찍고 방한복을 챙겨 입고 장화를 신은 채 냉장고에서 대량 조리와 패킹 등을 하곤 했다. 근무한 지 3주 정도 지났을 때였나. 그날도 냉장고에서 땀에 축축해진 채로 오전 작업을 마치고 40대 언니와 식판 밥을 비웠다. 잠시 다리를 뻗고 쉬는 중에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좋겠다, 넌. 끝이 있어서.”그녀 앞에 앉은 알바, 번들거리는 얼굴이어도 여전히 탱탱한 젊은이는 2주 후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돈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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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393호 (202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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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을 시작했다. 15년 전에 배운 적이 있으니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휴가철 물놀이를 가끔 즐기긴 했지만, 그동안 영법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탓에 긴장됐다. 몸을 씻고 수영복을 착용한 뒤 수영장으로. 그 냄새다. ‘락스냄새’로 불리는 염소 함유 수영장 물 냄새가 가장 먼저 마중 나왔다. 수업 시간보다 15분 일찍 준비를 마친 나는 수영장에 혼자 덩그러니 서있었다.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었지만, 어색함은 풀리지 않았다.수영을 시작하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돈 내고 누리는 스포츠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기 때문에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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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392호 (2023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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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왔다. 4월에서 5월. 이 시기 동네 공공도서관의 정원은 스스로 소생하고 자란다. 죽었나 싶던 마른 가지에 어느 날 새순 하나둘 돋으면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풍성해진다. 작은 잎은 커지기도 많아지기도 하다가 이내 뭔가 피우고 더러는 떨어뜨리다가 전보다 쌩쌩해진다. 그 속도가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다 보니 도서관이라는 유니버스는 오늘과 어제가, 어제와 그제가 또 다르다. 그렇게 식물들이 따로, 또 같이 이루는 장관을 목격하기 특히 좋은 때이면 나는 더 자주 도서관으로 걸어간다. 내 삶은 높은 확률로 늘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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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391호 (2023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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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집은 왜 항상 뭐가 많을까. 김치 가지러, 핸드폰에 애플리케이션 설치해드리러 등 엄마네 집에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갈 때마다 짐이 많고 복잡하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내 집도 아니면서.20평대 방 3개 기본 구조 아파트에 엄마 아빠 두 분이 살고 있지만, 살림은 다섯 식구가 살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우선 부엌. 주방의 핵심은 냉장고다. 냉장고를 중심으로 동선이 짜인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함께한 냉장고를 은퇴시키고 4도어 대용량 냉장고를 장만하셨다. 언니들과 필요한 일 있을 때 사용하려고 가족보험 목적의 회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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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
390호 (2023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