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호 공간 & 공감]
계획형 인간은 아니지만, 계획을 세울 때면 기분이 좋다. 빳빳하고 부드러운 종이에 잘 굴러가는 펜으로 성장·희망·완성 같이 기분 좋은 말들을 떠올리면서 한 해의 계획을 쓸 때 벌써 꿈을 이룬 것 같은 느낌이다. 2024년도 어김없이 새로운 다이어리를 활짝 펼쳐 ‘올해 계획’을 적어볼 참이다. 유난히 올해 더 기운찬 이유는 2023년 덕분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세운 계획 ―체력을 기르자, 영국에 가자, 출판을 하자― 을 모두 이루었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두고두고 꺼내 볼 소중한 성취는 영국 방문이었다.
10년 전, 나는 서른의 나이로 영국 어학연수를 떠났었다. 목적은 영국에서 석사과정에 진학하는 것. 부족한 영어를 현지에서 보완 학습하고, 학업 목표에 맞는 학교를 탐색하고, 또 실제로 거주할 수 있을지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계획한 시간이었다. 당시 내가 심화 학습하려던 전공은 ‘국제정치’ ‘국제관계학’이었는데, 한국의 국제정치학계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주류였으나, 비주류인 영국으로 진학하기로 계획한 데는 이유가 있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유럽연합이 등장할 수 있었던 시민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아우르는 아시아 동맹체의 가능성을 연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였고, 남북 관계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며, 한·중·일 관계 역시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이렇게 원대한 꿈 이면에 조지 오웰의 《1984》를 보며 분노하고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을 읽으며 눈물 흘리던 감성적 이유도 충분히 차고 넘쳤다. 가드닝을 취미로 하고, 하루에 네 번 이상 티타임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이토록 장황하고 구체적으로 영국행의 이유를 밝히는 까닭은, 떠나기 전 세웠던 계획이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도 안 늘었고, 석사 진학에 실패했고, 자유롭고 여유로운 문화는커녕 생존조차 버거웠다. 2년 안에 석사도 따고, 자리도 잡은 후 금의환향하겠다는 나의 꿈은 8개월 만에 성과 한 줄 남기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그리고 영국을 떠난 지 10년 만에 다시 그곳이 그리워졌다. 10은 4나 7, 9 같은 숫자보다 무언가를 기념하기에 적당하니까(라며 가야 할 명분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기쁘고 설렜다. 머무는 21일 동안 그리웠던 마음을 한껏 펼치고 곳곳을 누비며 매 순간을 만끽해야지! 큰돈 들여 왔으니 후회가 남지 않도록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한시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리라!
함께 간 생활 동반자에게 내가 좋아했던 골목, 운동했던 공원, 매일 갔던 미술관을 보여주며 ‘좋지?’ ‘장난 아니지?’ ‘너무 멋지지?’라고 백번은 물었다. 그렇게 질문으로 포장된 좋음을 강요했던 이유는 사실, 내 마음에 벅차오름은 온데간데없고 어딘지 모르게 먹구름 같은 것이 드리웠기 때문이었다. 쾌청하고 밝은 런던 날씨와 다르게 내 마음에는 구름 그림자 같은 것이 넓고 낮게 드리워져 떨쳐지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우울한 마음으로 런던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옥스퍼드를 방문했다. 분명 7월 여름이지만, 두툼한 니트를 사서 입어야 할 정도로 기온은 낮았고, 샌들을 신은 발이 민망해질 정도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으며, 햇빛은 잠깐 얼굴만 비추고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들이 하늘을 떠돌고 있는 날씨였다.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에 갔으나 음료만 주문하면 안 된다고 하여, 그 맞은편 ‘진짜 가장 오래된 카페’라는 설명이 붙은 카페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동거인에게 갑작스레 고백했다.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는 당황하지 않았고, 아직 여행이 2주나 남았고, 당신이 그렇게 노래를 불러서 (비상금 죄다 털어서) 온 영국인데 도대체 왜? 라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원하면 내일이라도 갈 수 있다며 일단 케이크도 주문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시간을 들여 기다려주었다.
10년 전 영국에서 생활하는 내내 너무 늦은 나이에 온 건 아닌지, 나를 받아주는 학교가 있을지. 영국 사람들은 왜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인지, 어디선가 나만 빼고 파티가 열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을 달고 살았다. 그곳에서 공기, 아니 어쩌면 먼지처럼, 보여도 안 보이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하루 네 번 티타임은커녕 한국에서는 원할 때 마시던 2,500원짜리 아메리카노가 간절한 이곳에서의 삶이 서러웠고, 이 설움이 상처로 깊게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너무 외로워서, 생활이 아닌 생존이 버거워서, 두고 온 내 원래의 삶이 그리워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동안 계획보다 일찍 귀국한 나는 왜 돌아왔냐, 무슨 일 있었냐, 더 있지 그랬냐 등등의 말들을 들을까 봐 왜 갔는지, 왜 돌아왔는지, 어땠는지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얼마나 머물렀는지’조차도 정확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2년 계획에 8개월 만의 귀국은 너무나도 큰 실패였으니까. 지나간 시간을 헤아리지도 않았다. 대학을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아주 자리를 잡은 친구, 타지에서 귀인의 도움을 받아 여러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친구의 친구들, 또 영어 하나 확실하게 잡고 돌아와 외국계 기업에 취업한 친구들의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는데 나는, 나만 실패한 것 같았다.
이번 영국에 있는 동안 내내 과거에 그곳에서 힘들고 우울하고 막막했던 나 자신이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때 내가 왜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까?’ ‘파티가 없으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친구를 사귀고 커뮤니티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볼걸’ ‘조건부 합격이 어디야 일단 석사과정을 시작하지 그랬어’ ‘학비는 나중에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왜 조금 더 잘하지 않았어?’ ‘청춘답게 뭐든 열심히 해보지 그랬어’. 그 시절의 나에게 원망 어린 말들을 퍼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그때의 영국으로부터, 실패로부터.
이런 마음을 담담하게 (울지 않고) 전했다. 여행 내내 괴로울 수는 없으니 이후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당신만 동의해준다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여보, 당신, 이 여행 참 잘 왔다.”
나는 이 여행이 괴롭고 힘들어서 손해를 무릅쓰고 그냥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정전이랑 종전은 다른 거잖아. 여보! 당신은 10년 전 그 실패에 종전을 선언하려고 이 여행을 왔어야 했나 봐.”
그때부터 눈물이 광광 쏟아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진이라도 남기자는 심산에 모처럼 한 화장도 무너져 내렸다. 지난 시간 동안 한 번도, 누구에게도 나 어학연수 실패했어, 나 영국 갔다 온 거 후회해, 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 될까 봐, 사실이니까 나 자신에게조차 그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카페를 나와 우산을 써도 피할 수 없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아까의 맑은 날씨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가는 곳마다 폭우가 거침없이 쏟아지며 돌풍이 불었다. 샌들이 빗물에 젖은 지 오래. 춥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옥스퍼드 후드티를 맞춰 입고 ‘한숨의 다리’에서 크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단체 관광객들, 함께 수고한 가족들과 멋지게 차려입고 비를 맞으며 기념 촬영을 하는 졸업생들,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이 거리가 일상이라는 듯 무심하게 자전거를 타고 사람들 사이를 휙휙 잘도 지나다니는 현지인들. 모두 다 아름다웠다. 내 마음의 구름 사이로 광명하고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것 같았다.
내가 망했던 장소, 내가 실패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 스스로 마침표를 찍고 나니 드디어 새 문장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는 실패했고, 그 실패 덕분에 지금은 국제관계나 영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고 있으며, 무엇보다 실패 후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소중한 사람과 소박하고 기품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쓰고 싶어졌다.
모든 것 속에는 갈라진 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틈을 통해서 빛이 스며든다.
There is a crack,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 레오나드 코헨의 〈Anthem〉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