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호 공간 & 공감]

무엇이든 가능하다면, 카페를 열고 싶다. 가끔 일상에 지침과 피곤이 몰려올 때 이 상상만으로도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열고 싶은 카페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만 여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365일 동네를 지키는 당산나무 같은 카페다.

아침 카페는 공간이 좁아도 상관없다. 커피머신 한 대 놓고, 아침 식사가 될 만한 간단한 샌드위치나 크루아상과 함께 커피 및 음료를 판매하고 싶다. 오고 가는 고객들과 아침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오늘 하루의 행운을 빌어주는 곳. 회의 때문에 긴장도가 높아지거나, 신나는 주말을 보내고 난 직장인들의 월요일 아침을 응원하는 곳이면 좋겠다. 또 바쁜 아침, 부모들이 마음 놓고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챙길 수 있도록 짬을 열어주는 공간이 되고 싶다. 애들 깨우고 씻겨 밥 먹여서 크고 작은 실랑이를 치른 뒤 한숨 돌릴 수 있는 양육자들의 오아시스 같은 곳. 식구들이 남긴 밥이 아까워 먹더라도 일주일에 하루쯤은 자신을 위해 건강하고 간단하게 남이 해준 밥을 먹고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곳이었으면 싶다.

당산나무 카페는 동네 애들이 많이 와야 한다. 킥보드, 유아차 주차 공간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릴 수 있도록 음향을 고려한 공간으로 디자인하고 싶다.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을 줄줄이 꿰고 계시고 동네의 맥락을 몸으로 기억하시는 나이 드신 분들도 오셔야 한다. 호르몬 등의 영향으로 숙면에 방해받는 어른 세대에게는 커피 대신 향기로운 차를 내어드리고 싶다. 음식을 드시면 뭐가 들어갔는지 궁금해하시고 알아맞히고 싶어 하시는 어르신들의 특성을 고려하여(우리 엄마!) 익숙하고 평범한 재료로 새로운 맛을 제공하는 카페.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녀노소와 동식물들도 모두 환대받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앞이 마을 모임 장소였던 것처럼, 동네의 크고 작은 이벤트가 꾸준하게 열리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

언제부터 이렇게 카페를 좋아하게 됐을까. 커피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커피와 함께 누리는 카페라는 공간이 좋아서 커피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카페라는 공간의 매력은 뭘까.

일단 커피 맛이 중요하다. 예민한 미각은 아니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로스터리 카페에 가면 비교적 높은 확률로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소소하지만 새로운 맛에 도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좋다. 커피 원두의 원산지에 따라, 또 각 원두의 배합에 따라, 볶음 정도와 추출 방법에 따라 펼쳐지는 커피의 세계는, 카페라는 공간을 찾게 하는 유인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커피 맛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기분과 상황, 목적에 따라, 또는 취향과 성격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는 인테리어, 커피 제조, 접객, 화장실 관리까지 매뉴얼로 운영되기 때문에 실패가 적다. 전국을 넘어 세계 어디서나 기본 메뉴는 비슷하여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안도감이 큰 장점이다. 또 대형 카페의 넓은 공간은 글을 쓰거나 간단한 노트북 작업을 하기에 눈치가 덜 보인다는 점에서 좋다. 커피 등 제조 음료를 마실 때 적립해주는 쿠폰과 다양한 할인 제도 등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매력 포인트.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로스터리 카페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로스터리 카페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로스터리 카페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로스터리 카페는 개인이 직접 커피 원두를 볶고 조합하여 추출하는 형태로 운영되는 카페인데, 이런 곳은 카페 기획운영자(=카페 사장님) 취향이 곳곳에 묻어있다. 공간에 배치된 가구, 특히 의자! 조명과 향기는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크고 작은 소품들과 음악 그리고 그림들, 또 사용하는 식기류와 곁들임 음식까지도. ‘화장실’도 물론 중요하고(2022년 9월호 “나는 화장실이 무섭다” 참고). 또 카페 위치는 동선을 고려할 때 중요하다. 인근에 맛집, 공원과 미술관처럼 함께 갈 만한 공간이 있다면 카페에 갈 이유를 한 가지 더 얹어준다. 특히 카페를 운영하시거나, 서비스를 제공하시는 분들의 접객도 눈여겨본다.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개인 시간을 방해하거나 경계를 무시하는 듯한 과한 친절도 부담스럽지만, 운영 원칙이 너무나 확고하고 경직되어 ‘여기 싫으면 딴 데로 가든가’ 혹은 ‘가든지 말든지’ 같은 태도 역시 그 카페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늘 ‘적당히’가 어렵다.

카페를 창업하기 전에 주인은 기획자로서 의도를 담아 공간을 설계하고 만든다. 커피와 메뉴를 개발하고, 간판과 바닥재, 가구들과 식기류, 운영 시간과 사업자등록유형, 이름과 전화번호, 어울리는 음악 등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흙을 고르고 반죽을 하고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넣어 마침내 최고의 도자기를 기다리는 장인들 모습과 같다. 수없이 많은 고민과 연습, 실행과 실패의 과정을 반복하며 아직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 없는 고객들과 함께 완성하게 될 공간을 빚는 장인들. 그런 기획자들에게 카페는 생계 수단을 넘어 달항아리를 굽는 장인의 가마일 것이다.

그런데 카페는 사장이 만들지라도, 이용자들이 와야 완성된다. 카페를 연 이들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어보면 신기할 정도로 주인 취향과 비슷한 고객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잘 눈에 띄지 않지만, 나만 아는 정성을 알아주고, 발견해주는 리뷰를 볼 때 카페 주인이 아닌 나도 뭉클하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를 다른 사람이 같은 이유로 또 다른 이유로 좋아해줄 때 그 공간에 대한 매력이 입체적이 된다. 누군가의 언어로 내 마음이 설명될 때 시원하고, 언어를 찾아준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의도와 상관없이 공간을 파괴하는 이들도 종종 등장한다. 기사화되었던 ‘먹튀’(음식값을 내지 않고 퇴장한 사람들) 사건이나 모든 세대가 ‘예스’(YES)인 공간에 아기 기저귀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간 일도 있었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자 직접 만든 화장실 비치용 손수건이나, 함께 읽고 싶어서 둔 책을 가져가기도 한다. 심사숙고 끝에 가장 좋은 가구들을 놓았는데 이를 ‘내 것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다뤄 훼손하거나 기물들을 망가뜨리는 일에 대한 하소연도 읽었다. 나 역시 몇 년 전 카페에 갔다가 옆 테이블에서 손톱을 깎는 사람을 목격하고서 바로 음료를 들고 피신해야 했다.

카페를 만든 사람도, 이용하는 사람도 서로가 필요하다. 악수에 악수를 두는 하강 관계가 아니라,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하는 상승의 관계로 가면 좋겠다. 직접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다회용 손수건이 계속 분실된다면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 티슈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소중한 가구들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덜 소중한, 망가져도 상관없는 누구의 것도 아닌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또 오래된 커피 원두를 사용하거나, 정리되지 않은 테이블, 위생에 대한 최소한의 원칙이 반복적으로 파괴되는 공간은 이용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고객들이 불편하기를 바라는 사장은 없다. 웃는 사람을 볼 때 웃고, 우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진다. 우리의 진화 과정에서 감정을 전달하고 느끼는 기관이 그렇게 진화했다. 공감하는 인류가 살아남도록. 좋은 것을 내어놓고,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는 일상적인 장소가 카페였으면 좋겠다. 상승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반복할 수 있는 곳. 카페 기획운영자는 자신을 속이지 말고(다른 사람을 속이는 건 자신을 속이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용자들은 공간의 권리는 내 집처럼 부리지 말고, 함께 상승할 수 있는 장소로서 카페를 보고 싶다.

‘초단기 부동산 임대업’이라는 말 대신 사회 교류의 장이면서 개인 사색의 공간으로서 카페도 필요하지 않나.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하기 위한 카페인 충전소도 괜찮지만 삶의 갈증을 잠시 해갈할 수 있는 우물 같은 곳으로서, 위협과 경계의 장소가 아니라 배려와 환대의 장소로서, 빈부 격차가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희미해지는 공간으로서 카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모든 카페가 그래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카페도 생겨나길 바란다는, 이용자이자 언젠가 카페기획운영자가 되고 싶은 희망을 담아 쓴다.

박진영
기독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인중개사로 일한다. 책 읽기와 걷기, 여행을 좋아하고 “one life, live it”의 줄임말 ‘올리’로 활동하는 자기(self)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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