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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미국에 이민 가 살고 있던 선생님이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제자들은 선생님을 환영하는 모임을 마련했고,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모임에 참석했던 제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선생님은 수시로 그 여름의 비극을 떠올린다. 제자의 죽음이 자신의 한국 방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이 사건으로 다른 제자들이 받았을 충격을 염려하는 선생님은 중학생 시절부터 십몇 년 이어 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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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202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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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유정은 경술국치에서 일제강점으로 이어지는 1930년대를 살았던 젊은이다. 〈봄봄〉·〈동백꽃〉 같은 해학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 시대의 비애를 담은 작품을 더 많이 썼다. 스물일곱이던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등단작 〈소낙비〉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다(《동백꽃-김유정 단편선》 수록). 이 소설은 거듭되는 흉작으로 빚을 지고 고향을 떠난 춘호 부부 이야기다. 그들은 야반도주해 어느 산골 마을에 정착했지만 떠돌이에게 소작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점점 더 궁핍해진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밑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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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202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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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읽었던 소설 중 제목에 ‘방’이 들어간 작품이 꽤 있다. 《지상의 방 한 칸》·《숲속의 방》·《숨어있기 좋은 방》. 여기서 방은 가족의 공간 ‘집’에 대비되는 개인의 공간을 의미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방은 개인의 은밀하고 고유한 장소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임시 거처, 삶을 유지하는 최소 공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많은 청년이 고시원, 원룸, 다세대주택, 반지하 단칸방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세태 탓이겠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김애란 작가의 작품에는 유난히 ‘방’이 자주 등장한다. 벌집 같은 구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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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호 (202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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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저명한 작가였다. 현대 히브리 문학의 아버지라 칭송받았던 그는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다. 아랍 국가들과의 공존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우파 시온주의 가문에서 자랐지만 생명과 평화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가 75세에 쓴 마지막 소설 《유다》(현대문학)도 이 문제를 다룬다.《유다》의 시대 배경은 이스라엘-아랍 전쟁이 일어난 후 10년이 지난 1959년 겨울이다. 주인공 슈무엘 아쉬는 스물다섯의 대학원생으로 유대인으로서는 드물게 예수에게 관심이 많다. 하지만 유대교와 예수의 관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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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2025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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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넓게 다른 교회 교인의 고민을 듣는 날이 있다. 대체로 내게 찾아오는 분들은 자기 교회에서는 털어놓지 못할 사연을 가진 분들이다. 얼마 전 만난 권사님은 ‘멀쩡한’ 아들이 왜 마흔 넘도록 결혼을 안 하는지 묻는 교우들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자기 아들을 좋게 보고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체한 것처럼 답답하단다. 아들이 결혼 안 하는 진짜 이유를 말하면, 아들을 멀쩡하게 보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멀쩡한 부모로 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싶고, 들을 수 없는 대답을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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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호 (2025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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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종말이 올 때까지 만들어질 것 같다. 작년에도 류츠신의 《삼체》(자음과모음, 전 3권)와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소미미디어)가 넷플릭스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두 소설에서 인류는 각각 외계인 침략과 소행성 충돌로 종말을 맞을 운명인데 예정된 시간표가 다르다. 《삼체》에서는 외계인이 보낸 침략 함대가 450년 후 지구에 도착하는데, 《종말의 바보》에서는 소행성이 8년 뒤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다. 시간표가 다르니 종말의 느낌도 다르다. 450년은 나 자신은 물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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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호 (2025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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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영화처럼 소름 끼치게 나쁜 악당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관객과 달리 소설의 독자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기 때문이다. 악당이라도, 그 마음을 알면 악행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도 덜 미워하게 된다. 하나님은 영화의 관객보다 소설의 독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인간의 행동을 보실 뿐 아니라 그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덜 미워하고, 남들은 모르는 용서의 이유를 찾으시리라. 그런데 가끔 소설에서도 용서를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하고 순수한 악당들을 만날 때가 있다. 스티븐 킹의 베스트셀러 소설 《그린 마일》(황금가지)에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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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 (2025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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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결혼하는 청년이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러 왔다가 편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혼집으로 이사하려고 짐 정리를 하다 고등학생 때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발견했단다. 편지에는 우정이 담긴 말과 함께 “우리 열심히 살자. 세월호 아이들의 몫까지”라는 친구의 다짐이 쓰여있었다. 편지를 읽고 청년은 마음이 찡해져 한참 동안 그때를 생각했다. 4월에 부부가 되는 커플은 10년 전 고등학생이었다. 문득, 잊고 있던 친구가 생각나듯 세월호 아이들이 떠올랐다. ‘살아있었으면 어른이 됐겠구나, 지금쯤 결혼할 나이구나.’ 그리고 궁금해졌다.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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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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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름이 같은 대학 선배가 시집을 냈다. 이 시집(이한주, 《몸이 기억하고 있다》, 삶창)에 실린 시 한 편을 딸에게 읽어주었다.자주 쓰는 문장은휴대폰 자판이 알아서 기억해준다감사한 마음 전하고자‘고’만 쳐도 ‘고맙습니다’완성된 문장이 마중 나오지만그 마음너무 쉽게 증발되는 게 싫어ㄱ ㅗ ㅁ ㅏ ㅂ ㅅ ㅡ ㅂ ㄴ ㅣ ㄷ ㅏ전해지지 않아도전하고 싶은 마음 담아한 자 한 자 꾹꾹 누른다- 〈고맙습니다〉 전문이 시를 읽고 핸드폰 자동완성 기능을 해제했다. 같은 문장이라도 자동으로 완성된 문장과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은 문장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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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 (2025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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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고난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고난에 대해 설교한 날 이런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날 나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고전 10:13)라는 구절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을 연결해서 인간에게는 고난을 견딜 힘이 있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고난은 지나간다고 설교했다. 이 설교가 너무 순진하게 들렸나 보다. 내게 고난이 뭔지 모른다고 했던 이는 자신의 굴곡진 인생과 질곡에 매인 형편을 이야기했다.“시험을 당한 사람의 마음에는 금이 갑니다. 다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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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2025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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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상》(열린책들)에서 므이쉬킨 공작은 어떤 살인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오래전부터 친구 사이인 늙수그레한 두 명의 농부가 술에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 함께 차를 실컷 마시고 한 골방에서 같이 잠을 자려고 했다는 거야. 그런데 한 친구가 이틀 전에 다른 친구의 노란 구슬 줄이 달린 은시계를 보았지. 예전에는 그런 시계가 없었는데. 그는 도둑이 아닌 데다 아주 정직하기까지 했고, 농민들 수준으로는 전혀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런데 친구의 시계가 너무나 마음에 들고 멋져 보여서 그만 참지 못했던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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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호 (202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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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 작가는 20여 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다. 그가 쓴 에세이집 《일인칭 가난》(마티)은 이렇게 시작한다.방학식 끝나고 17번, 28번은 집에 가지 말고 교무실로 와서 우유 받아가세요. 17번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아이 A였고 28번은 나였다. 우리 둘은 친구들이 다 떠날 때까지 교실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교무실에 갔다. (11쪽)열한 살 초등학생은 빈곤 가정 자녀에게 나눠주는 멸균우유로 가난을 깨닫는다. 그런데 멸균우유를 받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다. 같은 주공 아파트에 사는 A도 우유를 받는다. 두 사람은 교실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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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호 (202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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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뜻밖의 돈이 생겼다. 우리 교회를 응원하는 어떤 분이 예배당 리모델링에 쓰라고 꽤 큰 금액을 헌금하신 것이다. 헌금을 받고 보니 다른 욕심이 생겼다. 리모델링에 필요한 자금을 보내달라 기도하지 않았지만, 이 헌금을 기도의 응답으로 만들고 싶어진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헌금이 아니라, 기도 응답으로 받은 헌금이라고 하면 얼마나 은혜로운가?하나님께서 기도에 선명하게 응답하신 이야기가 우리 교회에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로 공동체를 결집하는 게 목사의 책임이고 능력이란 생각도 들었다. 여러 번 생각하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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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2024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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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가 아닌 소설판 〈옹고집전〉(종합출판범우, 《토끼전 옹고집전 배비장전(외)》에 수록)을 읽으니, 며느리까지 있는 옹고집의 나이가 37세로 나온다. 노인으로 알고 있던 옹고집이 30대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15-16세가 되면 혼인했던 조선시대였으니 30대 후반에 시아버지가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옹고집과 비슷한 나이인 30대 후반 미혼 청년에게 이런 하소연을 들은 적 있다. “열여섯 살에 몽정을 처음 했는데, 그 후로 20년 동안 참기만 하고 살았어요. 이걸 생각하면 억울하고 비참해요.”완성된 생식능력을 20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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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02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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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거장 아서 C. 클라크의 장편 《유년기의 끝》(시공사)은 앞선 문명을 가진 외계인과 인간의 만남을 소재로 했다. 인류가 수백 년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는 초고도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온다. 오버로드(스타크래프트의 ‘오버로드’가 여기서 유래한 듯하다)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보낸 거대한 우주선들이 세계 주요 도시 하늘에 떠있고 인류는 혼란과 불안 속에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한다. 다행히 미지의 외계인은 지구인들에게 동물 학대 금지령을 내려 그들이 자비로운 존재인 것을 알리지만, 외계인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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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호 (2024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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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22일 대전의 낮 기온은 영하 12도였다. 이걸 정확히 아는 건 그날 성서대전에서 이태원 특별법 홍보 피케팅을 했기 때문이다. 성서대전 전남식 목사와 성심당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는데 10분도 안 돼 온몸이 떨렸다. 추운 만큼 시간도 더디게 흘러 지루함을 달래보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다 요즘 무슨 책 읽느냐는 질문에 이르렀다. 전 목사는 며칠 전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를 다시 읽었다며,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마치 자기 같다고 했다. 그날 나도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은 이렇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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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호 (2024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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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준 미리엘 신부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어낸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후 장 발장에게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감옥에 갈 위기를 모면하고 신부와 헤어진 장 발장은 신부가 베풀어준 자비에 감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을 느낀다. 거칠고 억울하게 살아온 장 발장에게 인생은 싸움터고 증오는 무기였다. 장 발장은 갈등했다.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가진 유일한 무기인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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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호 (2024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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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는 러시아정교회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한 여인이 조시마 장로를 찾아와 죄를 고백한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이 병들어 눕자 그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괴롭힘당할 것이란 두려움에 ‘어떤 일’을 했다. (아마 병든 남편이 죽음에 이르도록 방조했던 것 같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영혼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조시마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진실로 회개하면서도 하느님께 용서받지 못할 그런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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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202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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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만들어진 《노예 12년》(열린책들)은 미국 남부에서 12년 동안 노예로 생활했던 솔로몬 노섭의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주일마다 노예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백인 주인이 나오는데 어느 주일 노예들을 불러 모아 누가복음 12:47을 읽는다. (누가복음을 몇 번 읽었으면서도 있는 줄도 몰랐던 구절이다.)“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그는 이 구절을 읽어주며 이렇게 말한다.주의하지 않는 깜둥이들, 자기 주인 나리에게 순종하지 않는 깜둥이들, 그런 깜둥이들은 매를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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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호 (2023년 09월호)